어떤 그림이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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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그림이 아름다운가? 아름다운 것과 그렇지못한 것 사이에는 어떤 기준이 있는가? 무엇이 자신의 미의식에 변화를 일어나게 하는가? 과거에는 아름다웠던 것들이 지금은 그 아름다움을 잃었거나 잃어가고있는 현상은 어찌하여 그런가?
인문이 스스로에게 던진 얼마 전의 그런 물음들은 수시로 그를 뒤따르며 다음 것들도 그의 산책길에 꼬리를 물고 그 뒤를 잇는다: 예술과 아름다움은 어떤 관계인가? 시각예술은 얼마나 아름다워야 하는가? 이 물음은 회화나 조각인 기본적으로 아름다움을 전제로 한 물음이 아닌가? 아니, 아름다움이란 어떤 상태를 두고 한 말인가? 소위, 황금분활이란 개념과 미의식은 어떤 관계인가? 등등. 미술 비평가인 허버트 리드에 의하면, "미감이란 것은
역사의 흐름대로 대단히 불확실할 뿐더러 번번이 아주 이해할수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아주 변동이 심한 현상'이었다. 그리고 "진정한 예술연구가라면 자신이 어떠한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든 간에 시대도 다르고 인종도 다른 사람들의 미감의 순수한 표현을 예술의 영역으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그는 개인적으로 피력한 바 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원시예술이나 고전예술에나 고딕예술에나 다 같이 흥미를 가져야 한다며, 시대에 다라 다른 미감을 표현하는 방식의 우열을 평가하기보다는 모든 시대에 걸쳐 진짜와 가짜를 식별하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게 허버트 리드의 견해이었다.
리드의 이 견해는 필자로 하여금 피카소나 모질리아니와 같은 어떤 현대미술가들이 우연히 만난 원시미술로부터 특별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는 작품을 떠 올리게 하였다. 모질리아니의 경우, 그의 회화'카리아티드 여상주'는 아프리카 공고의 루바 부족이 제사용으로 만든 한 목각으로 부터 받은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라고 하였다. 피카소의 경우, 그의 표현주의적 선 드로잉 한 점, '두상'과 아프리카 레가 부족이 의식을 위해 사용했던 인물상과는 구조적 유사성이 분명하였다. 원시세계에서 제사를 위한 의식의 보조 도구가 현대의 문명사회에서 돌연히 예술품으로 둔갑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예술에 관한 한 인문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말을 자주 들먹였다. 어딘가에서 읽은 그 말이 그의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이다. 그 말에는 예술은 말 그대로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한다는 판단에 입각하여 예술의 형식과 내용을 구분하는 성향이 강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현실의 충실한 모사나 모방이라는 기본 전제를 근거로 한 자연주의 (시각)예술관을 거부하고, 뭔가를 만들어내는 '주체자의 질서화와 구조화의 원리'를 두고 한 말이라는 것이다.
부연하자면, '예술지상주의'를 뜻하는 이 '구호'는 역사적으로 낭만주의에서 유래했고 자유를 위한 한 투쟁의 수단을 대변하였다. 그것은 낭만주의적 예술이론이자 어느 정도 결산이기도 하다. 원래는 다만 고전주의적 예술규범에 대한 반발이었던 것이 모든 외적 제약에 대한 저항으로, 모든 비예술적이고 도덕적이며 지적인 가치에서의 해방, 특히 공리적 목표에 대한 무관심을 뜻하는 것이었다.
인문의 생각으로는, (시각)예술을 창조하는 주체는 이런 원리에 따라 원료나 재료와 같은 객관적 현실의 것들을 색채나 붓 또는 조각칼 등 도구와 같은 예술적 매체를 이용해 지금까지는 없었던 완전히 다른 세계로 주조한다는 것이다. 예숧행위에 있어서 동일한 대상이나 내용이 다양한 방식으로 관찰되고 표현될 수 있다는 그런 주체자의 주관성이 중요한 요소인데. 자연주의 예술관은 이 점을 간과하고있다는 보편적인 사고에 그는 공감하였던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우리 삶의 의미를 스스로 체험하고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어떤 예술양식은 모방이나 재현보다도 더욱 더 진실되고 현실에 충실한 것으로 여겨져왔다. 예술은 자연에 대한 모방의 차원을 넘어 주체가 객체를 어떻게 추상하는가라는 사고가 자연의 모방이라는 사고를 대체하였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현대세계에는 다양한 예술양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객체를 어떻게 추상할 것인가 라는 게 예술행위라는 점에서 ,주체와 객체 사이에는 다양한 거리가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술을 위한 예술'에 대한 그의 선호의식은, 예술은 현실과 얽히고 설키면서 진해되는 삶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준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예술은 그에게 일종의 구원이었다는 말인데, 그 이면에는 실제적인 삶이 견디게 힘들어 현실을 도피하려는 사고가 깔려있기도 하였다. 하여간 예술- 그 자신은 문학적 창작행위나 자신의 '그림읽기' 글쓰기가 예술행위에 포함된다고 여겼다.-은 피하고 싶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의 수단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그런 현실의 극복이기도 하였다.
돌이켜 보면, 다행스럽게도 그것은 자신을 옥죄는 현실의 극복이었다. 처음인문의 마음에 그런 문학적 창작에 대한 열망이 차오를 즈음 그는 릴케의 작은 책,'젊은 시인에게 준 글'(Brief An Einen jungen Dichter)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었고, 아래의 이런 글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당신에게 쓰라고 명령하는 근거를 탐구하십시요. 그 근거가 당신의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있는가를 음미하십시요. 만약 당신에게 시를 쓰는 것이 거부된다면 ,당신은 마땅히 죽지않을 수 없는가를 고백하십시요.틱히 당신은 밤의 가장 조용한 시간에 ,나는 쓰지않고는 배겨날 수 없는가 하고,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요.....
그런 열망의 혼돈속에서 좌왕우왕하던 중 시작된 그의 무모한 글쓰기는 엉뚱하게도 표현주의 화가 루오의 한 마디 충고로 인한 것이었다: 예술의 열렬한 고백이다. 루오의 그 한 마디 말은 그로 하여금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었고 그 때이래 자신에게는 예술행위로 믿어진 문학적 창작의 길로 주저 주저하는 마음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그의 글쓰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아주 오래 전 그의 마음에 떠오른 너무나도 평범한 한 마디,- '내게는 늘 그리는 마음으로 그리는 바다가 있다.'-가 사라지지않은 채 계속 맴돌다 급기야 눈 앞에 나타나면서 예상치 못한 이런 저런 말들이 자연스럽게 하나 둘씩 나타나 그 뒤를 잇는 것이었다. 이건 그에게 아주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