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산문

창블 7-9-2

jhkmsn 2019. 1. 20. 09:45

2.


"인문님에게는 처음 어떤 그림들이 마음에 들었습니까?"
한번은 마술사 조군이 인문에게 그런 질문을 했던 적이 있었다. 창동의 향숲 까페에서 인문이 포토그래퍼 제갈선생과 그와 더불어 오후시간에 만났을 때였다.
" 어떤 그림이 처음에 아름답게 보였는가, 이런 의미의 물음이라면, 글쎄,
그건, 마술사 선생이에게나 내게나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은데. 아름다움을 보는 눈은 특별히 개인적이고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라서. 그렇지만  그 시작은, 보편적인 말이겠지만, 그리스적 이상주의의 그림이었을 것 같은데. 뭔가 황금분할이라든지 비례라든지 하는 말들을 생각하며. 그리고 또 자연에 대한 근사한 모방이나 충실한 재현에 바탕을 둔 그림었을거야."
인문은 그렇게 답하고는 곁의 포토그래퍼 제갈 선생에게 눈길을 보냈었다.
'왜, 나를 쳐다 봐. 나더라 좋은 답 좀 해보라 이런 의미이지." 라며 웃으며 계속 말을 잇는다.
"뭐 어려울 게 뭐 있어. 인문이 전에 한창 좋아했던 그림이 있었잖는가, 창동에서 카시오페와 자주 만날 때  날 만날때 마다 그녀의 누드 그림들에 대해 열을 올리며 칭찬하지 않았던가."
"그땐 그랬었지. 왜냐하면 당시엔 내가 마티스의 그림을 좋아했었고, 그녀의 데프롬된 그림들이 마티스의 작품들을 연상케하였으니까. 추상에 가까운 그녀의 그림들은 보기에 단순한 색면과 간결하고 부드러운 곡선으로 되어있어, 그림을 그릴 때의 노고의 흔적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않았어요. 뭐랄까, 그녀의 뛰어난 붓놀림에 감탄했었거든. 아닌게 아니라, 마티스의 그림 '분홍의 누드'가 그렇거든. 명암이나 볼륨감도 없는데다, 따스하고 고요한 평면성이 마티스의 그 누드화의 특징인데. 그녀의 그림에서 그런 탐미적인 분위기가 느껴젔었던게지."
"인문님, 좀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키다리 마술사가  끼어들어며 인문의 말을 가로채서는  지난 날, 남들 눈에 흥미롭게 비쳤던 인문과 카시오페 간의 묘한 관계를 어제 일처럼 기억해내는 것이었다. 여기서 '묘한'이라는 표현은  남의 눈에 좀은 특이하게 보였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둘 다 서로 가정을 가진 데에다 젊음이 중년들 훌쩍 넘은 사람들이이 창동이라는 이 좁은 도시공간에서 자주 짝을 이루어 등장하였으니까. 키다리 마술사는 말을 멈추지 않고 이었다.
" 제가 마술사가 되기 이전 이 곳 창동 상가회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여러 화가 선생님들 뵐 때 인문님 잔심부름도 이따금 했잖아요. 그 땐 아름다운 카시오페 님도 창동에 계실 때를 저는 잘 기억하고 있거든요. 지금 계시지 않으니 그냥 털어놓아도 별일 없겠지요. 뭐. 그 땐 인문님은 뵐 때마다 카시오페님 하고 함께 계셨잖아요. 그림전에서나 '시와 자작나무' 카페에서 특히   두분이 함께 계신 게 자주 눈에 띄었었습니다."
"그땐 그랬엇지. 그런데 둘이 자주 어울린 것과 그녀의 그림이 좋았다는 것과는 무슨 상관인데".
인문이 상기된 표정으로 응대했다.
"인문! 키다리 마술사의 말이 맟구먼, 그녀가 매혹적이었으니 그림은 그저 도매금으로 좋았던거지. 인문,  뭘 그렇게 변명이 길어요."
제갈 포코드래퍼가 정색을 하며 그렇게 인문에게 결정타를 날렸다.
인문은 순간적으로 지난 10여년 전 이 곳에서 만나던 카시오페가  환한 미소로 눈 앞에서 신기루처럼 아른거리는 것이었다. 음악적 리듬을 띤  그녀의 빠른 템포의 목소리마져 들리는 듯 했었다. 그리고는 속으로 그녀도 이제 60 중반쯤에 이르렀겟지, 하였다. 
얼마 전 세 지인들이 창동에서 그렇게 한담을 즐겼던 일이 있었는데. 이를 이 자리에서 필자가 새삼스레 꺼내는 건, 어떤 그림이 아름다운가 라는 물음 자체는 그림을 보는 눈은 너무나 개인적이고 감성적이어서, 더우기 가을하늘처럼 변하기 쉬워 ,이에 대해 객관성을 띤 어떤 논리적 대답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인문의 눈에는 여러 화가들의 그림들이 세월의 흐름을 따라 주기성을 띠고 마음에 들었다 들지않았다한 경우도 있었다. 창동의 전설이 되어가고 있는 현재호의 비현실성의 그림들이 그러했었다. 또  창동의 윤종학의 그림은 긴 시간 그 색감이나 형태가 마음에 와 닿지 않더니 어느 시점부터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의 경우는 물론, 화가의 그림이 변하였기에 그러했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화가들은 나이가 깊어지면서 그림이 그 아름다움을 더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일어난다는 게, 인문의 생각이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없는 윤병석 화가의 그림은 그의 만년의 그림들이  인문의 눈에는 그 색감에 있어서, 두더러지게 아름답게 다가왔었던 것이다.
한가지 비유로, 음악을 듣는 귀가 사람에 따라 일반적으로 제마다 다르고 듣고 싶으 음악 역시 심리상태에 따라 듣고 싶은 곡이 달라지는 것과 유사할 것이다. 인문의 귀와 관련해서는 그의 귀는 엘비시 프레슬리의 팝송에도, 우리나라의 가곡 중 비목에도 친숙하지만, 베토벤과 슈베르트에 더 오래 더 자주 귀가 열려 잇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브흐의 바로크 음악에 쏠리기 시작하면서 베토벤은 너무 규격에 짜여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바흐곡의 경우, 처음엔 첼로나 바이올린 곳이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기타솔로로 된 바흐곡으로 기울어졌었다. 그뿐 아니다. 그는 노년기 들면서 우연히 듣게 된 플라멩코의 깊은 소리에 점점 더 빠져들어  지금은 자주 그 소리를 유트브를 통해 가까이 한다. 참, 매혹적이야 라고 혼자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듣는 플라멩코의 그 깊은 노래는 실은 창자의 애통(lament)의 소리인 것이다. 판소리의 경우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플라멩코의 경우, 창자의 그 극복할 수 없는  지극한  슬픔의 소리가  듣는 귀에는 한없는 아름다움의 소리가 되는 것이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보자. 솔직히  그녀의 그림은 보통스람들의 눈에도 세련되고 아름답게 보였엇지만, 그림을 좀 아는 이라면 그녀의 그림 앞에서는 마티스적 분위기를 쉽게 떠올렸을 것이다. 인문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그림 앞에서는 이성적인 눈이 흐려졌었던 게 사실이었다. 아니, 그녀의 그림에 담긴 마티스적 분위기가 인문에게는 흠이 아니라 오히려 세련됨으로 여겨졌었으니까.  목소리에 리듬과 감미로운 멜로디가 담긴 그녀의 말소리가 그녀의 그림에 스며있다는 느낌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림의 아름다움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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