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산문

창불 7-4-1

jhkmsn 2019. 1. 10. 10:04

창불 7-4-1


모더니즘 미술과 아름다움 
1.
0월0일
Dear 카시오페.
오랜만에 다시 필을 들었습니다.
혹시 여기 계실때 창동에서 자주 눈에 띄였던 키다리 조군 기억하세요? 한 7,8년 전인가요. 창동 해설사 김경년씨 따라 골목길을 바쁘게 왔다갔다하던,눈이 선하게 생겼던 그 키다리 청년! 그런데 말이예요, 한 3년 전, 그러니까 카시오페님이 여길 떠난 진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을 감추더니 이번 여름 초 그 키다리 조군이 근사한 콧수염을 기른 정장의 마술사로 나타났지 뭡니까.
그런데 지난 몇달 사이 그를 여러번 만나면서 더 놀라게 된 것은 그가 실은 마술에보다 미술에 훨씬 더 해박한 눈을 가진 마술사란 점이었습니다. 앞으로  결혼식 주례사같은 그림해설을 습관적으로 해오던  윤용 화백이나 알맹이 없는 모호한 '그림읽기'로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인문은 이제  이 예술촌 무대에서 더 이상 설자리를 갖지못하게 되지않을까 염려스럽습니다. 이 젊은 예술적 논객 앞에서는 알아서 처신해야할 것 같습니다. 
어제 시내에서 몇 분 화가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 키다리의 위트와 논리적 분석을 또 듣게되었는데요. 젊은이란 몇년 사이에도 비온 뒤 죽순처럼 저렇게 지적으로 성장하기도 하나봐요. 
한가지 예로, 그의 주장에 의하면, 19세기 아래의 현대미술은 이전의 전통적 회화의 재현적 특징을 부차적인 것으로 보고 , 회화의 평면성, 물감과 붓질에 대한 의식, 직사각형 형태 등 회화의 비모방성이 더 중요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 말에는 회화적 창조자러서의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중요하지 그와 마주하거나 상상한 대상의 아름다움이 어떻니 하는 것은 부차적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기 전에는 우리들이 사고하기 전에는 저 대상들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는 말로 들렸습니다, 매우 데카르트적이었어요. '나의 생각'이 중요하고 내가 생각한 것의 표현인 내리티브가 회화의 중심에 서있는 것- 이것이 모더니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마네의 그림 '풀밭위의 식사'라고 덧붙였습니다.
또 다른 예로, 그는 '우리는 아름다운 것과 결합되어있는 유용한 것을 거의 보지 못합니다'라는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무용하고 무익한 것이  예술가의 특징'이라고 했습니다. 순수한 예술가라면 '필요와 욕구의 저 둔중한 세속적 분위기'에서 벗어나야한다고도 했습니다. 시각적 재현의 굴레에서 벗어지니 못하는 화가들은 이제는  리얼리티의 모방을 극복해야합니다. 그림이란 리얼리티 자체를 그리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리얼리티가 끌어내는 정서를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데에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화가는 '사물 자체를 그리지 않고 사물로부터 받은 인상을 그립니다'는 슽테판 말라르메의 회화관을 들먹이기도 해씁니다.
우리가 이런 점은 알게 모르게 감지는 하고는 있었으나 그 키다리처럼 그렇게 철학적 탐구의 눈으로 미술을 대하지는 아니었잖습니까.  하여간 그는 더 넓게는  고대, 중세, 현대 그리고 더 나아가 지금 이 시점의 콘템프러리의 미술이 어떻게 변화를 거치며 이행되어 왔는가도 해설하였습니다
조군은 지난 몇 년 동안 예술에 대해 탐구의 나날들을 보냈나봅니다. 그는 넉넉한 부모님들 덕에 스스로 밥벌이를 위해 뛰고 절고 하지않아도 되는 처지여서 그런지, 그렇게 유유자적하며 예술탐구에 몰입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하여간 그 때묻지않은 얼굴은 여전해서 지금도 보기에 참 태평스럽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깊어진 눈빛으로 이제는  더 이상 그를 그저 조군이라 부르거나 반날로 대하지 않으려 합니다.
애쨋거나 요즘 조군으로 인해 이래 저래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속으로 좀은, 부끄러지기도 했습니다. 여지껏 그림 탐구자랍시고  지역화가들의 그림들에 대하여 주관적 인상을 듣기좋은 말만 널어놓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자책감 때문이었습니다.
 오늘은 여기서 줄입니다.
또 연락드릴께요. 
문.


0월 0일
Dear 문
안녕!
인문의 이번 메일보고 조금은 실망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데 붓질하는 손이 열정 가득한 가슴보다 상상력 넘치는 머리보다 훨씬  더 큰 위력을 가진다는 점을 들어 그런 공허한 이론에 왜 어른스럽게 당당한 반론을 펴지지않았는지요? 말만 번지르러 한 젊은 독서가에 너무 기죽은 것 아닙니까?  그림은 물감으로 그리는것이지, 말로 그리는 게 아니란 걸,  인문은 긴 시간 창동 화가들의 화실에서 물감냄새맡아가며 터득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나이 앞 세우며 신진화가들에게 일방적인 충고나 하는 버릇은 버려야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창동에서의 역할을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듯 그렇게 위축된 자세라니!.
저 자신 이미 나이로는  인문이나 윤용화백을 뒤따르고 있으니 저야말로 화가로서의 삶을 자책적으로 돌이켜 보게됩니다. 저는 제 손이 그린 그림 한 점 한 점 마다 저의 삶의 한 부분이기에, 물감냄새가 얼마나 유혹적인지 알지도 못하는  이론가들의 눈에  내가 그린 그림들이 시대에 뒤진 캐캐묵은 잡동사니로 보일 수도 있겠다고 여겨지기도 했습니다만, 저는 이를 개의치 않습니다.
그런데 불현듯 기분이 좀 묘해지는데요. 혹시 평소 인문이 우리들 화가에게 가졌던 비판적 시각을 우리들 앞에서는 대놓고 말할 수 없으니, 은근히 이 젊은 마술사의 거침없는 입을 빌려 들려주는 건 아닌가 이런 생각이 퍼뜩 드는데요. 지난 십 여년간 인문에게는 입으로는 화가의 손이 부럽다고는 하면서 화가들은 물감만 만질 줄 알지 책을 가까지 하는 않는 고집불통들이라는 말을 개인적으로 하셨잖아요. 지금와서 말이지만, 나보고도 마티스 류의 천편일률적인 회화만 그린다며 솔직히 실망스럽다고 말한 적이 있었으니까요

어쨋거나 이번 메일은  제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성찰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닌가 아니라, 저도 기가 좀 죽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놓고 막 불만을 토로하게되는 군요. 너그럽게 받아주시기를!
안녕히!

카시오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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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미적인 것(das asthetische)이라는 개념을 쓰는 일이 많다. 이 말은 본래 희랍어의 ‘αίσθαυεσθαι(지각한다)’, ‘αίσθητσς(감각적인)’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칸트가 『판단력 비판』에서 ‘ästhetisch’라는 말에 ‘오직 직관에 의하여 개념적 사유의 매개 없이 직접 얻게 되는 쾌’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이런 의미를 가진 ‘미적인 것’에 대하여 미(das schöne)는 그 하위 개념이며, 숭고·우미·비장·골계·유머 등과 동렬에 위치하는 하나의 미적 범주를 의미한다. 미를 대하는 태도에는 미적 태도와 비 미적 태도가 있다. 미적 태도 또는 ‘세계를 미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은 실제적 태도(practial attitude)와 가장 보편적으로 대조되는데 실제적 태도는 문제되는 대상의 유용성에만 관계한다. 미적 태도는 또한 인식적 태도와 구별된다.

(1) 자연미

자연미는 인간과 대립적인 대상의 미가 아니라 무위자연()의 도에 순응하고 이를 존숭하는 가운데 체험되는 인간의 미적 감동에 근원을 둔 미이다. 자연미는 예술미의 대립 개념으로서 자연적 현실의 미이며, 풍경 미와 같은 통속적 의미에서 비인간적 대상의 미만이 아니라, 이 이외에 널리 인간·인생·역사·사회 등을 포함해서 일반적으로 현실의 생에서 체험되는 미를 의미하므로 이른바 인간미 내지 역사미 등도 이에 포괄된다. 자연미는 자연의 사물이나 대상에서 주어지는 미이고, 수용성(receptivity)을 특성으로 하는 미이며, 시청 양각에 소구한다는 점에서 극적이며 변화무쌍한 자연현상에서 체험되는 그러한 극적 인상은 예술작품으로서는 도저히 표현해 낼 수 없다는 점에서 그 우월성을 주장한다.

또한 자연미는 자연 그대로의 현실적 대상 내지 자연현상에서 체험되는 미이다. 자연미는 자연에 바탕을 둔 것이며, 자연현상 내지 대상에 대한 우리의 미적 체험에 직접 반영되는 것으로서 순수 소여성에 의한 감각적 소재성 내지 자연적 존재성 등의 파악으로 자연감적 계기를 각각 그 특질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성질을 자극하고 그와 조화를 이룸으로써 우리와 독특한 관계를 맺는다. 자연미는 미의 첫째 부문에 해당된다. 미의 이념에 유일하게 적합한 형태로 현실화된 것은 예술이다. 이상()이 스스로 완성된 미라면 그에 반해서 자연미는 완전하지 못한 미라고 우리는 추상적으로 말할 수 있다. 자연미(das naturschöne)는 인간의 기교를 넘어선 직접적인 아름다움이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향수할 뿐이다. 따라서 자연미는 무게재성(immediacy) 내지 자발성의 특성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자연미는 대상의 형식에 관한 미이다. 우리는 자연현상의 개념에 맞는 대상성을 띠고 생명력을 보이는 관계를 자연미(die schoenheit der Natur)라고 부른다.

(2) 예술미

예술미는 그러한 자연미와 인간과의 사이의 매체 내지 통로로서 존재하게 되며, 결국 예술미는 자연미와 동일한 것으로 완상되는 것이다. 예술미는 예술적 소산의 미로서 인간이 예술의욕에 의해 미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을 창조하려는 의도 하에 자연에서 주어진 재료를 가공 형성함으로써 성립되는 미이다. 또한 예술미는 예술작품의 미로서 인간에 의해 창조되는 정신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자연미와는 근본적으로 상이하며 각각 독자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받아들인다. 예술미는 생산성(productivity)을 특성으로 하는 미라 하여 자연미와는 본질적으로 상이한 이자()인 것으로 흔히들 이해한다. 예술미는 자연형태의 모든 불필요하고 무의미한 세부를 버리고 정신적인 개성적 창조성에 의해 더욱 진실한 가치가 있는 것을 창조해 낸다는 점에서 그 우월성이 주장되기도 한다. 예술미는 예술작품으로까지 형성된 대상으로서의 예술물에서 체험되는 미이므로 자연미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예술미는 인간의 미적 활동에서 나오는 인간 세계의 소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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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월0일
아름다운 카시오페!
 님의 따끔한 질책이 담긴  메일에 릴케의 편지속의 한 줄 글이 떠오르기에, 이 것이 머리속에서 지워지기 전에 보내고 싶어  이렇게 서둘러 메일을 열었습니다. 전부터 제가 좋아하였던 구절이기도 합니다.
" ......나는  아직도 그림에 대해서는 자신이 없고,
훌륭한 그림과  그보다 못한 작품을 가려내는 데에 시간이 많이 걸릴 뿐더라, 초기 작품과 후기 작품과는 늘 혼돈스럽다오..... 나는 지금 커다란 유혹을 받으면서도 세잔느에 관해서는 글쓰기가 조심스럽다오. 남들과 달리 그림에 깊이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그 이유만으로도  회화작품들에 관한 글을 쓸 정당한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오!"
그렇습니다. 어떤 회화작품 앞에서 , 그 그림에 대해 내가 한 마디 하리다 하며 쉽게 그림평을 할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글 쓰는 자가 어떻게 회화를 위해 옳은 눈을 가진 자인가? 등의 물음들이 내 안에서 끊임없이 이어질 때 그 글을 떠올리곤 햇었지요. 그리고 그 때의 혼란스러움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꼮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이 또 있습니다. 카시오페를의  몇 몇그림들과 님의 밝고 싱그러운 미소를  처음 본 순간의의  첫 느낌을 여기에 솔직히 고백하고자 합니다. 그 때 그림 앞에 선 순간 그것은 마티스의 분위기가 그대로 드러나는 그림들이었습니다.
대상으로서의 사실주의적 재현과는 거리가 먼, 갯벌 갑각류의 이미지를 떠 올리는 선의 동세, 물질성이나 입체감을 걷어낸 여체 누드의 선과 형상, 야야수파적 원색이 평면의 화면을 채운 그림들! 어느 수준의 지적 절제력이 느껴지는 누드의 곡선의 동세와 원색의 어울림! 카세오페의 그림들은 내 눈에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감성의 무분별한 노출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없었습니다.
우리들이 처음 인사를 나눈 후 그 때 이래 우리 둘은 자주 지역화가들의 전시회나 모임에 자리를 함게 하며 , 내쪽에서는 남 몰래 가슴두근거리며, 자연스런 사회적 만남을 지속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카시오페를  내 마음을 흔드는 여인으로 강한게 여기게 된 것은 , 얼마 지나지 않으면 그녀가 창동을 떠난다는 말을  직접 듣고부터였습니다.
괘나 긴 시간  아름답고 세련된 여류화가로서만 대했던 그녀에게서 균형 잡힌 육체를 지닌 매력적인 이성적 존재로 바라보게 되었던 것이지요. 아니, 제가 카시오페를 처음 본 이래 내내 윤리적 의식 안에 감춰져 있었던 연정이 떠남의 소식을 듣고서는 어쩔 수 없이........사실 그랬습니다. 지금에서 몇년간 그런 마음으로 카시오페를 보고 싶어하기만 했었지요.그리고 화가로서 소중한 분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긴 말을 드립니다. 
이 곳을 잊지 마시기를



인문님,
안녕!
저의 별 뜻없는 뽀죽거림에 그렇게 정색하며 마음 쓰시다니. Very sorry!
그렇지만 멀리서 온 오늘의 이메일, 레몬향처럼 향긋한데요. 이 메일 하나만으로도 오늘 하루는 충분히 상쾌한 날이 될 것 같습니다.
돌이켜 보니, 오래전 제가 그 곳 창동에 처음 갔을 때, 아니, 왔을 때가 맞겠어요, 마산 앞바다의 아침의 그 눈부신 잔물결에 매료되었었지요.그리고 그곳 어시장과 해안의 갯내가 저의 고향 몽산포 앞바다를 연상케했습니다. '가고파' 바다의 해안은 옛날에는 ,지금과는 달리, 만조의 충만함과 갯벌의 텅빔이 바다를 대하는 눈을 언제나 새롭게 했다는 인문님의 말에, 전  제 고향 앞바다인 서해안의 몽산포의 해안이 떠올랐습니다. 저는 어린 날 어린 날 꼭 하루에 두번을 그 해안과 만났습니다. 아침엔 바다와 그리고 오후에는 넓은 모래들판이 된 그 버이있는 바다를! 오늘 인문의 메일은 특별히 감성적으로 회상에 젖어들게 하는 군요

참, 일 전에 말한 두 분 화가--이강용과 윤종학-에 대한 감상을 제가 친하게 지냈던 그 곳 지인들 끼리하고만 나누지 마시기를! 그 대화속에 저도 끼고 싶으나 제게도 좀 전해 주세요. 한국 나가면, 서울보다, 저를 알아주는(?)  창동에 더오래 머물고 싶어요.
윤용화백에도 안부전해주시고요.건강 지키시기를
뉴욕에서
카시오페 드림


이강용과 윤종학 그림평으로, 마술사의 그림평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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