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산문

창블 7-4-2

jhkmsn 2019. 1. 12. 10:30

                      2.
 

창동무대에서 그 키다리 마술사의 존재감이 점점 커져감은 상대적으로 인문의 '그림읽기'가 그만큼 그 빛을 불가피하게 잃어가게되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지적 탐구욕으로 무장한 젊은 이의 등장은  타성에 젖은 화가들의 은신처인 이 곳 예술촌 광장이 점차 새로 돋아나는  나뭇잎으로 푸릇해질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자면, 창동무대에 새로운 바람이 일기 시작하는구나 하고 여겨진다.  우리 창동의 관객들은 계속하여  그 키다리 마술사의  예술적 통찰력이 번떡이는 한마디 한마디에 깊은 호기심으로 귀를 기울여보자.  이제는 누구도 더 이상 그 키다리 마술사를  지난날 처럼 함부로 '키다리 조군'이라고 부르질 못하한다. 예컨대, 한 질문자가  키다리 마술사를 젊은 예술 탐구가로 예우하는 뜻으로 선생이라고 호칭하며 물음을 이어간다.

질문자 A : 선생은 어떤 그림을 좋아하십니까?
마술사:  그 질문에는 시각적 재현을 고집하는 전통주의적 그림대신 탈 재현의 모더니즘의 회화를 더 좋아한다는 말을 제게서 듣고 싶어하는 듯 느껴지는데요. 질문자님은 아마 사실주의 그림을 좋아하지 않으신가봅니다.
질문자 A : 꼭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 인물사진을 보며 초상화를 그리는 지역화가들이 있던데요.  눈 앞에 놓인 인물 사진을 보이는 그대로 화폭에 그냥 옮기는 화가들이 더러 있던데요?.
마술사: 내가 보기엔, 창동의 화가들 사이에서는 사실주의 그림보다 오히려 추상화를 더 회화답다고 여기는 분들이 많은 것 같던데요 혹시 질문자께서는 화가인가요?
질문자 A : 화가가 되고 싶습니다.
마술사: 지금은 무얼하시는 분인가요?
질문자A : 창동 지역에 사는 자영업자입니다. 선생은 그림 탐구가 이시니 '그림읽기'로 이 지역에서 이름이 알려진 인문님을 잘 아시게겠네요. 전 그 분을 만날 때마다 그림에 대한 궁금한 점을 물어보고 싶어했습니다. 그 분은 창동의 원로화가님들의 그림과 관련하여 말을 신중히 하면서도 이 곳 화가들은 변화를 두려워하는 분들이라고 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요?
마술사: 아, 박춘성과 윤종학 등 원로화가 등 여러 워로 화가들을 두고 말씀하시는군요.  그분들도 물론 지난 날 긴 시간동안 자신 만의 깊은 사색과 체험을 거치  지금의 그 형태나 색감 을 좋하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중들도 그러리라고 판단했을 거구요. 한편 지금은 그 이름만 세인들의 입에 화자되는 어시장 화가 현재호의 회화가 생각나는 군요. 제가 집중적으로 그 화가의 회화를 탐색해보니 그 화가의 회화 분위기가 어느 시점에 이르고부터는 천편일률적이 되더군요. 아마도  그렇게 되기 시작한 시점의 그 형태, 그 색감의 그림들을 대중들이 좋아하고 그림수집가들도 그걸 원한다는 판단을 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현실적으로 그림이 팔릴 수 있는 그림이냐 아니냐는 화가들게는 너무나 중요한 판단의 근거 중의 하나일 테니까요.
질문자 B: 화가 초년생입니다. 대학에서나 사회적으로 원로로 여기는 황원철 교수님이나 윤종학 선생님의 그림에 대해 한마디 들려 주십시요. 두 분 다 추상을 추구하시던데요. 
마술사: 솔직히 저도 그 분들이 이젤과 마주하는 순간에 무엇을 염두에 두는지 궁금합니다. 한 분의 추상에는 선의 흐름이, 이를테면 여러 색선들이 웨이브를 이루며 어떤 동세의 형태를 이루고있음을 보여주고, 다른 한 분의 경우, 기하학적 선들의 만남이나 어울림으로 비물질적 기호를이루고있는 화면을 보여줍니다. 두 분 다 그림의 제목에 의하면,  사각형의 화면에는 뭔가 자신들의  예술적 사색이나 개인적인 회상의 이야기를 담고있다는 것입니다. 전자의 경우, 그의 추상적인 그림들의 제목인 '바람'의 경우, 그 그림들은 우리 눈에 보이 않는, 자연의 물리적 현상인 바람은 이렇게 생겼을 것이라며 그렇게 주관적으로 묘사하고있다는 점에서, 그' 바람'의 그림들은 역설적이게도 사실주의적이라는 의미가 되기도 하지요. 그림전시장에서  '바람'이라는 제목의  어느 그림 앞에서 어린 아들이 바람은 저렇게 생겼나요 하고 묻는다면, 그 아이의 엄마는, 이 화가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나봐 하고  대답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야 물론 나뭇잎 흔드리는 것을 통해서나 얼굴에 닿는 바람을 느낄 수 있을 뿐 보지는 못합니다. 혹시, 질문자께서는 현재 그림을 그리는 분이라니 한가지 묻고 싶습니다. 사각의 텅 빈 평면 캔버스를 무엇으로 채우기 전에 머리속에 어떤  이미지가 내재되어 있는지요? 아니면, 혹시 마음에 드는 풍경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자신의 캔버스에 그대로 재현하고 싶어하면서 그림을 그리는가요?
질문자 B: 전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화가로서 좀 고통을 느낍니다. 묘사력에 자신이 없어서 입니다. 그래서  그 풍경을 화폭에 담을 땐 자신도 모르게 데프로마숑된 재현이 됩니다. 창원의 김태홍 화백의 '잉어'를 볼 때면 더욱 더 기가 죽지요. 어떻게 그렇게 사실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까 하면서 말입니다.
질문자B :선생의 생각에는 어떤 그림이 아름다운 그림인가요?

마술사: 아름다운 그림이란 어떤 그림인가? 답하기 난갑한데요. 이 질문에 앞서 우선 우리가 미적인 것(das asthetische)이라는 개념에 대해 먼저 생각해봅시다. 칸트에 의하면, 미(asthetic)은 ‘개념적 사유의 매개없이 오직 직관에 의하여 직접 얻게 되는 쾌’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이 '쾌'는 숭고·우미·비장·골계·유머 등과 동렬에 위치하는 하나의 미적 범주를 의미합니다. 미를 대하는 태도에는 미적 태도와 비미적 태도가 있는데. 미적 태도 즉,‘세계를 미적으로 바라보는 방식’은 실제적 태도(practial attitude)와는 구별됩니다.. 실제적 태도는 대상의 유용성에만 관계하지만 미적 테도는 이와는 오히려 반대의 개념입니다.

질문자B: 세계를 미적으로 바라보는 방식!?  그 의미는, 글세, 알듯 모를듯 해요. 실생활과는 관련없는 미적 추구의 의미를 담은 예술지상주의란 말과 일맥상통할 것 같기도 한데요.

마술사: 질문의 요지가 너무 확대되는데요. 어떤 그림이 아름다운 가?쪽으로 요자를 좀 좁혀봅니다. 일단 자연미와 예술미로 한번 나누어봅시다. 자연미란 예술미의 대립 개념으로서 자연적 현실의 미이며 자연의 사물이나 대상에서 주어지는 미일 수 있지요. 인공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현실적 대상 내지 자연현상에서 체험되는 미입니다.이에 반해 인간이 예술의욕에 의해 미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을 창조하려는 의도 하에 자연에서 주어진 재료를 가공 형성함으로써 성립되는 미이다. 또한 예술미는 예술작품의 미로서 인간에 의해 창조되는 정신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자연미와는 근본적으로 이와는 상이하지요.대체로 그렇게 대비되지요

질문자B: 그렇디면 회화에서는 자연미란 표현은 적절하지 못하겠네요.

마술사: 논리적으로는 그렇게 되나? 그렇지만 자연이나 사물을 아주 있는 그대로 닮게 그린 그림을 보면 그 자연미를 잘 살린 그림이라고 하지요. 사실주의 그림이 그런 경우이니까요.

그런점에는 저는 예술성에 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진한 것 같군요. 즉,  그림을 그리는 이의 주관적인 창조성이 핵심적 요소로 담긴, 이른 바 모디니즘적 표현의그림이 내 눈에는 더 마음이 드는 그림입니다.

질문자B: 창조성이 핵심저 요소라? 모더니즘적 표현의 그림이 아름답다? 둘 다 알듯 모를듯 한대요.

마술사: 그 점은 인문이 자신의 그림읽기에서 은근히 강조해왔습니다. 즉, 탈 사실주의적 그림을 그려라는 것이지요.그렇지만 시대는 더욱 급박하게 그런 모더니즘적 사조에서 또 벗어나고 있어요.이른바 포스트 모니니즘이 회화에서도 새로운 대세, 한 마디로 예술의 소멸이라고나 할까,그렇게 되고있어요. 화가의 길로 들어서는 분들에게는 퍽이나 혼돈스러운 현상이지만.





관찰자의 눈으로 보기에,인문의 '그림읽기'에는  글쓴이의 주관적 정서가 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그는 사실주의적인 그림보다 추상화인를 선호하였으며, 그의 회화적 스펙트럼은  인상주의에서 입체주의 사이의 모더니즘에 집중되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 우리들이 느끼기엔, 키다리 마술사는 인문에 비해 그림을 가치중립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그의 회화적 스펙트럼은 인문보다 훨씬 그 폭이 넓다. 르네상스 이전의 성상화에 대한 이해에서 컨템퍼러리에 대한 포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더 나아가 사진의 예술성에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다.,
다시 인문의 견해로 되돌아가보면, 그는 여지껏 장그르니에의 회화관에 경도되어 있었다. 프랑스의 산문작가인 그리니에는  다음과 같이 말한 것처럼 창조적 상상력이 그림의 좋고 나쁨을 가르는 기준으로 보았다: "출생 주변이나 청춘기의 테두리에 안주하는 예술가는 자기 바깥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을 이해하지 못한다.....창조하는 것, 그것은 새롭게 하는 것이다. 관념을 새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교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대한 예술전통은 내용보다는  <형식>이라고 불리웠던 것과 더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인문은  그렇게 그림의 그림다움은 그 형식에 달려있다고 믿으며 형식의 창조적 변화에 촛점을 맞추어 좋은 그림과 그렇지 않은 그림을 구분하는 경향이 농후하였다. 창동의 어시장 화가로 세인들의 사람을 받았던 현재호,허청륭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 활동중인 대부분의 원로 화가들이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타성에 젖어 안주하였다며 비판적 시선을 보낸 것은 그런 점에 근거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열심히 작업은 하고는 있지만 더 이상 창조하지 않는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한편, 젊은 마술사 조군의 말과 글에 자주 등장하는 미술에 관한 어휘들은 이런 것들이다: "시각적 외관의 재현을 고집하는 전통주의/탈재현의 모더니즘, 포스트 모든의 예술성 부재, 직사각형의 굴레, 색면 추상과 추상표현주의,젝슨 폴록의 물감뿌리기 작업이 의미하는 것은?" 등 모디니즘 이후의 변화에 관한 것들이다. 
그리고 그는 때로는 좋은 회화의 특질에 대해 인문이 강조하는 어떤 형식에 대해 회의감을 드러내면서 어떤 것이나 예술이 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자문하기도 하였다. 회화작품에는 의당 그렇게 보여야 할  특별한 방식 같은 것은 없다는 생각에 까지 이르고 있다. 이런 생각은 보통 사람 누구라도 화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누구라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카다리 마술사의 예술적 모더니즘의 시각으로
모더니즘과 그 이전의 회화 그리고 탈 모더니즘적 회화의 의미
회화의 순수성 지향이 주는 의미?
윤종학, 이강용의 그림평을 ???? 그리고 카시오페의 그림에 대해서도?
윤종학의 정적 추상과 황교수의 동적 추상 그는 보이지않는 바람을 시각화화려하려는 몽상가?
이강용- 그는 민중적 문학 이야기를 추상화한 낭만주의자,
카시오페는?
윤복희의 변함없는 꽃밭은  모더니즘 이전의 환영을 그대로 이어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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