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 앞바다와 화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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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11월 창동 24 갤러리에서 개최된 '마산을 그리다' 의 그룹 작품전에 지금은 그림들만 남아있는 두 화가,최운과 현재호 그리고 현재 창동무대에서 활동중인 박춘성, 윤형근, 정순옥 등의 그림들이 전시되었다. 창동의 구시민극장곁에 위치한 건물인 창동도시재생센터의 2층이 곧 창동24갤러리로 이 그룹전은 이 갤러리의 개장과 더불어 전시된 첫번째 그림전이었다. 아래는 이 그룸저에 대해 경남도민일보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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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이 가진 짙은 향토성과 정체성을 구상 또는 추상 등 자신만의 독창적인 화법으로 표현하는 우리지역의 회화 작가 5인의 작품세계를 ‘그리다, 마산’이라는 테마로 조명하고자 한다.
이번 전시에 초대된 지역작가는 총 5인으로 작고작가 故최운, 故현재호 두 분과 지역의 원로 박춘성, 그리고 중견작가 윤형근, 정순옥 작가이다. 이들은 여러 가지 공통점과 연결고리를 가진다. 시간적으로 60년대부터 현재까지를 아우르는 작품세계를 만나볼 수 있는데, 주로 마산의 바다, 어시장, 어머니 등을 소재로 지금은 잃어버린 지역의 이름, 마산에 대한 기억, 향수 등을 작가들은 제각기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번 ‘그리다, 마산’展은 단순히 마산의 풍경이나 감성을 표현한 작가들의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펼치는 의미만이 아니다. ‘마산’이라는 이름 안에 담긴 아련한 우리 지역만의 정서, 이야기, 정체성을 각자의 조형언어와 표현방식으로 농도 짙게 표현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세계 조명과 함께 세대를 이어 면면히 이어져 가고 있는 지역미술의 계보를 잇는 연결고리의 의미를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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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화가의 이미지를 올린다.
최운
현재호
박춘성
'마산을 그리다' 그룹전 오픈식에 참석한 인문은 솔직히 이 날의 그림전 자체에 보다 함께 참석한 카다리 마술사가 어떤 눈으로 이 그림들을 바라보는 가가 더 궁금했었다. 키다리 조군이 아마추어 마술사가 되어 다시 창동에 나타난 이래 ,인문은 도심에 나들이할 때면 꼭 그를 만나고 싶어하였고, 이 날도 그와 함께 자리했다. 창동에서 지난 몇 년간 보이지않던 그가, 인문의 눈에는, 탐미안이 깊어진 젊은이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카다리 조군 역시 인문을 겉으로는 비판하면서도 내심 그의 그림읽기에 두터운 공감의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에, 둘이 함께 만나면 세대를 뛰어 넘어 격의 없이 자유롭게 대화할 수 그러하였다. 무엇보다 조군에게는 노년기의 인문의 몸과 마음에 배어있는 마산 앞바다의 갯내가 그저 좋았던 것이다.
얼마전 키다리 조군이 팝아트를 저급예 술이라고 평가하는 인문에게 정색하며 그건 선생님의 편견이라며 그건 좁은 예술적 시각에서 비롯된 편견이라고 응대했을 때 인문은 저어기 놀랐었던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속으로는 키다리 조군이 그렇게 말한 데에는 그럴 만한 어떤 논리적 명분이 있을 것이라 여기며 그 자리에서는 더 이상 팝 아트를 입에 올리지 않았었다. 다음에 만나면 이에 관한 그의 견해를 꼭 들어볼 요량이엇던 것이다.
이 날 두 사람은, 한 사람은 상대방을 노년기의 창동인으로 존경하는 자세로,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이 젊은 이의 열렬한 지적 탐구욕에 가득한 눈빛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격의없이 물음과 답을 이어가는 시간을 가졌다. 둘이 만난 자리에서 인문이 전에 물어보고 싶었던 주제를 먼저 끄내었다.
인문: 팝아트란 장르가 보편적으로 우리가 알고있는 회화-이를 테면, 세잔느나 드가 등 인상추의 전후의 그림들-처럼 예술적 가치가 있는거니?
키다리 조군: 팝아트의 예술성? 이에 관해서는 글세요. 인문님도 아시겠지만, 서양미술의 역사는 크게 보아 두개의 주요 에피소드로 나누어지잖아요.미술을 재현적인 것으로 보는 시각이 그 하나의 에피소드이고, 회화예술을 다른 모든 예술로부터 구별해주는 게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또 하나의 에피소드이지요. 그런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실재를 묘사하는 데 동영상이 회화보다 낫다는 사실이 증명되자 재현의 미술은 그 의의를 잃고 말았잖아요. 그 다음으로 데카르트적 사유이래 모더니즘이 미술의 큰 흐름을 이어가다 이 팝아트의 등장과 함께 이 시각 또한 모순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말하자면, 예술작품이 어떠해야한다는 특별한 방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되었으까요. 팝아트의 등장이 불러일으킨 점은, 이제 '모든 것이 예술이다'거니 심지어 모든 사물이 예술같다' 따위의 슬로건의 출현이 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예술에 대한 철학적 정체성이 사라지고 만 것이지요. 이제 화가가 물감으로 여인을 그리건, 일반 사람이 상자를 만들거나 사각형을 그리건, 모든 게 자유로워졌습니다. 이제는 어떤 그림이 다른 그림보다 더 좋은 그림이라고 말 할 만한 기준도 없어지고, 어떤 것도 나머지 것들보다 더 옳다고 말할 수도 없어졌습니다. 단일한 방향 같은 것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방향들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반 곡물 상자와 꼭 같은 워홀의 <브릴로 상자>의 등장과 예술의 종어니라는 말이 나타났는데, 즉, 재현의 예술성이나 모디니즘적 예술이 그만 설 자리를 잃고 만 것이지요.
인문: 팝아트의 존재가 던진 철학적 물음이 그렇게까지 비화되나? 하기야 요즘 미술을 바라보면서 어떤 가치의 기준을 세울 수 없어 속으로 여간 당황스럽지않아요. 난 여지껏 재현적 사실에 충실한 그림보다 어떤 형식아래 대상이 화가의 손에 의해 재창조된 그림을 좋은 그림이라고 여겨왔거든. 좀 뭣한 말이지만, 조선시대의 단원 김홍도나 혜원 신윤복처럼 재현적 묘사력이 뛰어난 사실성의 그림들을 보면, 이 그림들을 그린 화가들은 예술가로서보다 손 솜씨가 탁월한 장인으로 여겨졌던 , 탈구상의 화가들, 이를테면 몬드리안의 기하학적 추상를 그린 몬드리안이나 음악성이 넘치는 추상화의 칸딘스키 갗은 추상화가들은 철학적 영감이 넘치는 예술가들로 여겨졌었거든. 더 심하게, 신라시대의 솔거를 그 시대의 장인으로 여겼을 뿐 예술가로서는 보지않았다거나, 현대의 잭슨 플록의 물감뿌리기의 그림을 보면 이 화가는 철학적 사색이 얼마나 깊은 예술가 일까, 이런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니까. 그러다 최근에 이르러 미술계에 등장한 팝예술 작품들 보면 정말 혼란스러워요. 무엇이 예술이고 무엇이 예술이 아닌지, 조군 이야기를 들어니 이제 좀은 이해가 돼. 그렇지만 내 눈에 좋은 그림을 좋은 그림이라 말하지 못하고 나쁜 그림을 나쁜 그림이라 말할 수 없다면, 예술을 이야기하는 우리들은 스스로 모순에 빠져드는 게 아닐까? 난 달리의 그 그림들은 누가 뭐래도 더더웠어. 엿가락 처럼 녹아든 그 시계그림을 빼고 말일 세.
키다리 마술사: 르네상스 시대에도 레오나르드 다빈치나 라파엘로 같은 대가들의 시대에서나 솔거가 화가로 살았던 신라시대에선 예술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잖아요. 대상이나 자연대상을 얼마나 잘 묘사하여 재현시키는가가, 상을 얼마나 이상주의적으로 그려내는가가 화가에게 중요한 것이었으니까요.
인문: 그래, 그렇지. 마티에르니, 사각형의 평면이니 하는 말들은 데카르트 이후에서나 등장한 모더니즘적 용어들이지. 그나 저나, 그림과 예술과의 관계에 대해 뭘 어떻게 말해야 나로서는 아직은 막막해. 조군은 그렇지제 않는가 본대. 그건 젊은이의 지적 탐구정신 탓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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