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산문

창동인블루6-5-1

jhkmsn 2018. 5. 14. 11:56

                      


   4. 글쓰는 화가 이제하와 수채화 화가 조현계                   

                       1.
마산의 옛 경남은행 본점건물 앞 식당골목에 위치한 홍화집에서 윤용 화가가, 인문과 함께 앉은 식탁 옆 벽에 걸린 낯선 두 그림을 한 참이나 쳐다보고는 마침 주방에서 나오며 그들을 미소로 맞이하는 안주인을 향해 한 마디 물음을 던진다.
"
홍여사, 먼저 소주 하나 주세요. 비빔밥은 천천히 주시고요. 그런데 저 그림들, 누구 그림입니까? 그림 아래에 이제하라는 이름이 사인되어있는데요"
 "
두분은 늘 함께 오시는군요. ? 저 작은 그림들요? 소설가 이제하의 그림입니다. 저 화가 선생은 제 남편의 마산고 동기입니다. 마산 오면 이곳에 들리는 편이지요."
윤용이 홍화집의 첫 머리글자를 따 그냥 홍여사라 부르는 그녀는 여전히 미소로 그렇게 대답하고는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
소설가가 그린 그림이라!"
윤용은 혼자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 그림에 역시 시선을 보내고있는 인문에게 말을 던진다.
"
저 두 소품들 어때요? "
"
색감이 좋은 데요. poetic  and melancholic..... "

"인문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는가 보네. 아닌가 아니라, 그렇죠?."
'
윤선생의 말을 들으니 더욱 그렇네요. 난 그 시인의 '세월이 가면'이 생각납니다. 참 감미로운 시이지요. 노래로 불리는 그 시는 지금도 여전히 듣기 좋지요. 혹시 오래전 서울 신촌에서 함께 만났던 내 친구, N 군 기억나세요? 술자리에서 TS 엘리엇의  '황무지'를 들먹이든, 더욱이 스스로를 지고이너 (집시)’ 라던, 그 멋쟁이를.”

, 그때 인문이 자꾸 부추기자 세월이 가면을 못이긴척 한가락 뽑던 그 친구! 기억납니다.”
그 노래는 그 친구의 목소리에 아주 잘 어울렸어요. 지금은 거의 만나지 못하지만 가끔 보고 싶은 친구이지요. 지난 날 그 친구는 술이 거나해지면 서울을 공허의 도시로 부르며 엘리어트의 이 토막 구절도 자주 읊조리기도 했습니다:
<
공허의 도시,
겨울날 새벽 갈색 안개 속으로,
군중이 런던교 위로 흘러갔다.>

" 지금 이 시간이 저녁이라면 좋겠네, 인문에게 그 시 낭송을 한번 부탁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분위기만 띄우고 그냥 일어서려니 좀 아쉽네. "
아니, 난 그 시, 듣기만 좋아하지 외우지는 못합니다.”
두 친구는 점심을 다 먹은 후에도 자리에 앉아 한 참이나 두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 그림들이 걸린 곳은 전에 마티스의 '푸른 누드' 복사품과 지역의 몇 몇 시인들의 시작품들이 붙어있었던 그 자리였다.
 
윤용의 이번 '그림읽기' 강연의 주제 <글쓰는 소설가 이제하와 수채화 화가 조현계>는 홍화식당에 걸린 그 두 그림이 그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날의 강연 장소로 '리솜 게스트하우스'의 휴게실로 결정된 데에는 앞장에서 소개한 영화해설가 이승기선생의 권유로 인해서였다. 이곳에 살지 않는 이제하와는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닌지라 그림 전시와 관련하여 그 소설가와 직접 만나 의논하기도 그렇고 해서 윤용 혼자 고심하던 중 그 문제는 뜻밖에 이승기선생의 아이디어와 주선으로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 이 곳 게스트하우스에 설치된 인터넷 장치와 영사시설을 이용하여 필요한 그림을 화면을 통해 보여주면 될 걸 아니냐는 것이 그것이었다.
 
이날 게스트하우스 휴게실에 마련된 강단에 사회자 송창우 시인이 오르자 그의 뒤쪽 벽의 화면이 커지고 이제하와 조현계, 두 화가의 그림들이 영상으로 나타났다. 사회자는 관객들에게 강연자 윤용화가를 소개하였고, 이어 이 강연에 참석한 화가 조현계를 특별히 앞으로 모셔서 관객들의 박수를 유도하였다. 이날 <글쓰는 화가 이제하와 수채화 화가 조현계>를 주제로 한 그의 강연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
다음'
조현계의, 생기 가득하고 티없이 고운 자연풍경은, 그 대상과 마주하는 관객에게 직접적인 미적 정서를 불러 일으킨다.  그는 탈 이미지적 추상을 추구하는 작가가 아니다. 칸딘스키적 순수 추상의 흐름과는 무관한 작품들이다. 표현기법이 거의 정형화된 그의 수채화는 이미지나 색감이 티없이 고운 회화이다. 이를테면 사물의 범주를 선과 색채로 구획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외곽선을 중첩하거나 흐림으로써 화면의 공간감을 더 강조하는 듯해서   대상으로서의 아름다운 풍경이 순화된 회화로 재현되어 관람자에게 시각적 미감이나 정서적 치유감을 준다.

조현계는 산, , , 나무, 들판에서 가장 마음이 통하는 소재를 찾아 그것들을 시적 감성으로 재현하였다. 화폭에 담긴 티 없이 흐르는 강물노랗게 피어난 유채꽃 (제목-유채밭)을 마주하면 그 속에 자신도 동화되는 느낌이다.
그의 수채화 작품에는 웅장한 산악이나 건조하고 메마른 황야가 아니라 인간을 다정하게 안아주고 인간의 마음에 안식을 주는, 아기 자기한 울긋불긋한 꽃과 나무와 개울의 자연이 담겨있다. 그의 작품 어디에도 인간을 압도하는 자연은 담겨있지않다. 록키 산맥의 거대한 암석, 인적을 거부하는 황량한 사막의 모래 땅, 안달루시아 거친 잡목들만이 듬섬듬성 눈에 띄는 산악의 자갈길 등은 그의 섬세한 손과는 인연이 멀다. 그는 그를 낳고 자라게 한 다정한 주변의 땅과 산하를 그림에 담는다. 요컨대, 조현계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색상 곱게 갓 피어난 들 꽃과 푸릇푸릇한 나뭇잎 그리고 맑은 계곡이 잘 어우러진 자연의 대상을 사실성을 바탕으로, 그리고 때로는 시적 감수성으로 촉촉하고 몽롱하게 재현해내고있다. 조현계의 그런 담백한 회화는 관객은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시심을 담은 눈으로 대화를 즐기면 될 것이다.


(사과꽃 필 때)아래






반면, 이제하의 그림의 경우, 회화를 자주 가까이 하지않는 관객이라면 아마도 그의 그림 앞에서 화가의 솜씨와 기교가 어쩐지 서툰듯한 느낌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는 미술교육기관에서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익히지 않은 화가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림보기에 좀 익숙한 이라면, 모르긴 해도 그의 사실성과는 거리를 둔그림들이 주는 그 탐미적 색감에 이끌릴 것이다. 우리들의 눈에 익은 북유럽의 뭉크나 고갱의 그림들에서처럼 자연이 줄 수 없는 예술미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하의 그의 작품에는 문예적 메타포가 스며있어, 관객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저 말은 목마인가, 저 여인의 표정은 뭘 의미하는 것일까? 색채감은 깊고 사색적이야. 등등의 중얼거림으로 마주하게 될 것 같다. 이 강연자에게는 개인적으로, 그의 그림속에 담긴 싯적 우울함이 이런 저런 이미지나 소리들을 함께 떠오르게 하였다. 예컨대, 그의 <푸른 목고리의 소녀> 가이 불러 일으켠 첫 연상은 6-7세기의 목판 그림 마돈나였다. 그 그림의 흡인력에 걸음을 멈춰 다시 한번 더 살펴보니 이번에는 목이 긴 잔느’ (모질리아니) 그림도 연상되었다.
그의 그림세계는 한마디로 회화로 쓰인 일종의 시적 산문으로 보는 이로 하여금 문학적 상상력을 요구한다. 솜씨는 아마추어적인 듯하면서도 전체적으로 탐미적 색조가 물씬 난다. 여인과 말의 도회적이고 탈자연적인 형상과 색상에서 모던한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가 뜨오른다.
*그림 이미지
푸른 목도리의 소녀( 오마이뉴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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