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난 날 인문은 여행 길에 언제나 호주머니에 담배를 넣고 다녔다. 여행지에서 만나는, 특히 호스텔에서 침상을 함께 나누는, 젊은 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싶어서였다. 젊은 여행객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대개 담배의 유혹에 약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50 중반의 나이에 처음 알게 된 호스텔 체류는 그에게 특별한 체험이었다. 호스텔은 그에게 브릿또를 맛보게 하였고, 잭 케루악을 알게 해 주었다. 집시들의 목쉰 절규의 플라멩코 소리를 처음 듣게 해주었다. 만약 그가 호스텔을 알지 못하였다면, 처음 대하는 그런 낯선 이국적인 정취를 느껴보지 못하였을 것이다. 안달루시아 집시들의 ‘깊은 노래는 첫 키스와 첫 흐느낌으로부터 나온다." 거나, "플라멩코는 천사의 도움 없이도 우리들이 하늘에 이를 수 있는 길이다'라는 매혹적인 글귀들과도 만나지 못하였을 것이다. 여행지에서 그가 처음 만나는 호스텔의 출입구 밖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릴 때마다 그곳은 언제나 호기심의 동굴이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어제 일인 것처럼 잊히지 않는 체험들이었다. 아래는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게 회상되는 특별한 체험들이다.
'아래'
워싱턴주, 시애틀
0월 0일, 1999년
'터틀(turtle) 게스트 하우스'에서
여행경비가 예상 밖으로 적게 들어 집을 나설 때에 비해 마음이 퍽 가벼운 편이다. 호스텔- 이층 침대가 한 공간에 대여섯 개나 놓여있는 홀에서 10여 명이 함께 잠자며 생활하는, 이른바 여행객 합숙소-에 익숙해지면서부터이다. 이곳 시애틀의 호스텔 숙박비가 일박에 13달러인데 이 비용인 저급 호텔의 일당 숙박비 35달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액수이다. 지금은 이 액수마저 좀 더 줄일 수 있는 방안이 없나 하고 욕심(?)을 내본다. 뜻밖에 이런 희한한 숙소를 발견한 게 얼마나 대견스러웠던지! 작년 샌프란시스코 여행길에 한 중급 호텔에서 70달러를 주고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었고, 그 근처의 한 작은 도시 산 호세에서는 하룻밤 방값이 100 달러였었다.
지금 내 머리 위의 위 칸 침상으로 기어올라 부스럭거리는 갈기머리의 스페인 청년 드링크, 내 옆에 나란히 놓인 바닥 침상에서 서너 달 정도 자신의 보금자리로 삼아왔다는 LA 출신의 흑인 톰, 그리고 어제 투숙한 멕시코 젊은이 등, 이들이 이곳에서 내가 만나기 전 무엇을 하던 자 들인지는 잘 모르지만, 모두 서로에게 친절하고 이웃에 불편을 주지 않으려는 예의 바른 젊은이들이었다. 그 스페인 녀석은 미국에 온 김에 이곳 시애틀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싶어 하였고, 내게 특별히 겸손한 태도를 보이는 존이라는 한 중년의 백인 미국인은 이곳에 가까운 한 호텔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였고, 이름 모르는 멕시코 청년은 서툰 영어로 모레면 알래스카로 올라가 원양어선을 타게 될 거라고 하였다.
이제 이 호스텔은 내게 더없이 적합한 휴식처이다. 아침식사로는 따뜻한 계란과 토스트를 무료로 먹을 수 있고, 지하 휴게실에서는 여러 문화권의 젊은이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며 어울린다.여럿이 함께 자는 큰 방에서 더없이 편한 잠을 잘 수 있는 게 예상 밖이다. 어제 밤엔 같은 방에서 투숙하는 젊은 이들 틈에 끼어 맥주 파티를 즐기기도 하였다. 밖에서 혼자 저녁을 사 먹은 뒤 한 8시 경 숙소로 돌아와 내 침상에서 뒹굴고 있는데 그 스페인 녀석이 문을 열며 들어와 존과 나더러 맥주 마시러 휴게실로 내려가자는 것이었다. 휴게실에는 이미 남녀 투숙객들이 근 10명이나 모여 앉아 맥주와 한담을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이들은 대개 미 동부지역이나 유럽에서 여행 온 젊은 이들이었다. 일본인 오토바이 여행객도 한명 있었다.
처음 이 호스텔에 들어왔을 땐 여간 당황스럽지 않았다. 이 곳 시애틀의 그레이 하운드 정류소의 안내판을 찾아 든 이 호스텔이 프론트 여직원에게 숙박비 1주일 분을 지불하고 방 열쇠를 손에 쥐었을 때에만 해도 어떻게나 값이 싸든지 마음은 그저 가볍고 이런 곳도 다 있나 싶어 신기하기 조차하였다. 숙박비가 싸니 한국의 도시 변두리의 여인숙처럼 누추하고 화장실이 없는 좁은 방이겠거니 하며 그래도 이게 어딘데 싶어 계단을 올라 이층의 방 입구에서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실내의 낯선 광경에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한동안 도어 손잡이를 붙든 채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하였다. 위칸 아래칸의 여러 침상 위의, 십 수명의 다양한 얼굴들과 입구에 선 내게로 향한 호기심 가득한 시선들! 순간적으로 당황스러워 지갑이 든 호주머니로 손이 가면서, 아차 싶었다. 이런 공간에서 어찌 잠을 잘 수 있단 말인가? 방문을 열고 선 나는 한동안 안으로 들어설 수도, 그렇다고 숙박비를 선물한 마당에 되돌아 설 수 도 없는 말하자면 진퇴양난의 처지에 빠진 느낌이었다.내게는 여행 때마다 안식처가 된 호스텔을 처음 그렇게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필자의 '마술피리' 60.P)
오레곤주,포틀란드
7월 0일, 2000년
'센트랄 프라자' 호스텔에서
여행객으로서 나는 미국사회의 아웃사이드들을 주로 만난 편이었다. 다른 지역의 호스텔에서 유럽이나 아시아 국가에서 여행 온 젊은 이들을 주로 만난 것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이곳 투숙객들은 나처럼 멀리서 온 여행객이 아니라 대개 미국 사회의 소외자들이었다. 내가 한 방에서 지낸 상당수의 투숙객들에게는 가정이나 가족이란 개념이 없었다. '나의 가족'이란 말은 그들의 머리속에서 잊혀져 있었다. 이 도시에서 한 때 재즈 작곡가로 활동했다는 '래리'라는 이름의 늙은 흑인이나, 이틀 밤을 침상에서 식은 땀을 흘리며 헛소리까지 하며 앓고는 다음 날 아침 소리없이 떠난 한 중년의 백인이 그러했었고, 내 침상의 윗칸 침상에서 지내는 더벅머리 멕시코 청년 가브리엘도 그러했다.
이 곳 호스텔에서 리와 같이 친하게 지내는 동안 그는 내게 자상한 영어 가정교사이다. 영어책을 읽다 만나는 어려운 문장은 곁에 있는 리를 통해 자연스럽게 이해 이해되었다. 그리고 그는 대화 중에 나의 잘못된 영어표현을 바로 잡아주고, 듣기 어려운 말은 일부러 천천히 발음해주기조차 한다. 그는 긴 브론디 머리를 늘 뒤로 묶은 채 선글래스로 자신의 얼굴을 감추고 싶어하였고, 예수를 닮고 싶다며 성경을 탐독한다. 그는 미국 땅은 썩고 병들어 더 이상 구제할 수 없는 나라이므로 자신은 늘 인도로 가는 꿈을 꾼다고도 하였다. 한번은 자신이 피우던 마리화나를 내게 권하면서 자신은 젊은 날 감옥에서 얻어맞아 생긴 가슴 통증을 견디고 싶어 마리화나를 피운다고 하였다.( 필자의 '마술피리' 92P)
인문은 그 몇년 후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역의 도시들을 혼자 돌아다닐 때에도 호스텔을 찾았다. 그라나다에서는 보름 가까이 호스텔에서 지냈다. 그의 회상에 의하면, 그는 그 곳에 머물던 동안 늦은 밤마다 숙소인 '호스탈 안타레스'를 혼자 빠져나와 플라멩코 전용 잠브라 혹은 빼냐에 묻혀 플라멩코 춤과 포도주에 취했었다. 그라나다의 그랑비아 대로와 가까운 노에바 광장의 한 모퉁이에 있는 플라멩코 전용 바 '다로'에서 바일라오라 후아나의 불꽃같은 춤에 취하였고, 알바이신 언덕 입구의 한 카페에서는 쉰 목소리의 소리꾼 안토니와 운 좋게 공연 전에 무대 아래에서 비노 불랑코 잔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집시구역인 세크라몬테에 올라 동굴 플라멩코 홀 '라 로시오'에서 그라나다 집시들의 전통적인 풀라멩코 춤에 홀리기도 하였다. 그는 그라나다에서 호스텔에 머물면서 그렇게 밤마다 포도주와 플라멩코에 빠져들었다(필자의 '플라멩코 이야기' p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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