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마술쇼를 끝낸 키다리 마술사가 무대에서 내려와 제일 먼저 다가가 인사를 드린 관객은 앞자리에 앉아있던 인문이었다. 전에 부림시장 상인들의 잔심부름 일을 맡아 창동 골목을 바쁘게 왔다 갔다 하는 그 키다리 이군을 인문은 그의 선한 눈빛이 마음에 들어 그를 호기심 반 우려 반으로 만났었다. 그의 엉뚱하나 탐구적 사고에 은근히 끌렸었고, 세상 일에 둔감한듯해 실생활에 잘 적응하기 힘들겠구나 싶기도 했었던 것이다.
"창동 사나이가 다시 나타났구먼! 그동안 어디 있었어? 잘 지냈어? 어쨌거나 참 잘 돌아왔어. 이제 창동골목에 생기가 좀 돌겠어요. 게다가 어엿한 마술사가 되어 나타났으니!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마술을 익혔어?"
" 말하자면 길어요. 지난 몇 년간 이곳저곳 반 노숙자로 떠돌며 성찰의 시간을 가진 편이지요. 나이 더 들기 전에 공무원이라도 되어볼까 싶어 서울 변두리에서 고시원에 묻혀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골방에서 몰두 한 게, 글쎄 마술 책이지 뭐겠습니까! 지방대학에서 철학사를 공부한 제게는 시험 준비를 위한 책이 영 손에 잡히지 않아 답답해하던 중 우연히 그렇게 되었답니다. 마술이란 게 여간 재미있지 않던데요. 단순히 눈속임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나저나 솔직히 그 어디에도 창동만 한 곳이 있어야지요. 이곳 뒷골목의 여러 화실의 물감 냄새도 그리웠고요."
"그랬어? 그런 남다른 삶을 맛보았다니, 재운이, 다시 봐야겠어. 앞으로는 마술사 님이라 부를게."
" 내친김에 한 마디 더 할게요. 솔직히 말해, 젊은 제게는 전부터 인문님이나 윤용 선생님 두 분이 딱해 보였습니다. 인문님은 아무 하는 일이 없이 창동을 배회하는 분 같고, 윤용 화백님은 이런저런 전시회장을 찾아다니며 주례사 같은 비평의 말씀만 늘어놓으시고. 화가로서 붓을 들기보다 말이 능하신 윤용 화백님을 ' 장식적인 말만 그럴듯하게 늘어놓으며...라고 속으로 비판했었지요. 그리고 인문님은 입만 열면 인상주의의 회화적 향기를 들먹이는 게 제 귀에는 좀 그랬어요. 전 땀 흘려 일하는 밀레의 그림이 참 좋았는데, 인문님은 전엔 밀레의 그림을 그저 현실의 재현에 불과한 그림이라고 말했었거든요. 사회적 갈등이나 구체적 생활상을 그린 쿠르베, 도미에 등 사실주의 화가들 대신 삶의 현장과는 거리가 먼, 한가한 인상주의 화가들, 이를테면, 모네 드가 등의 그림에 주로 매료되신 듯했었습니다. 고흐의 그림에서도 그의 감자 먹는 가족들의 그림이 어떠시냐고 했더니, 글쎄, 그럴 수도 있지만, 고흐라면 그 '오베르 교회', 언덕 위에서 위로 휘감아 오르는 형상을 한 그 뒤틀림의 유화야말로 탁월한 작품이라고 했었거든요."
"그래?, 나에 관한 그런 비판적 사색도 했었어? 사실, 내게는 지금도 고흐의 그림이 참 좋아요, 그렇게 뜨겁게 표현된 작품도 드물거든. 그나저나 이 군이!, 그 콧수염 참 근사해. 마술사로서 잘 어울려."
" 인문님! 제가 그동안 마술에 빠져들면서 한가지 깨달은 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건 마술과 회화, 특히 현대의 사실주의 그림과 마술 사이에 한가지 공통점이었습니다. 눈속임의 비법, 그것입니다. 평면의 2차원 회화는 기하학적 구도를 통해 평면이 입체로 보이게 눈속임하고 있다면, 마술 역시 능란하고 민첩한 손놀림으로 관객의 눈을 속여 관객을 놀라게 하는 것이지요. 알라딘이 램프를 문지르면 램프 속의 요정 ‘지니’가 나타나잖아요. 알라딘의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 속의 그 거인 말입니다. 그 거인이 곧 마술사입니다. 그 요정처럼 우리 마술사도 현실이 아닌 상상의 세계를 다루는 것이지요. 제가 마술을 처음 배울 때는 모방이 나쁜 것 만은 아니지만, 곧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더군요 그리고 마술이 일상생활과는 거리가 먼 것이기에 관객은 마술을 사랑합니다. 특히나, 마술사는 화가들처럼 독창성을 추구합니다.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화가처럼 마술사도 자신만의 마술을 구상합니다. 세상 어디에도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나와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습니다. 나와 똑같은 경험을 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이군은 역시 그동안에도 역시 돈 안 되는 철학적 궁리만 골라서 했었군. "
"하나 더 말씀드릴게요. 마술이 제게 처음 초기 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성경에 나오는 3명의 동방박사 이야기였습니다. 아시잖아요. 세 사람의 그 박사들이 가장 먼저 아기 예수를 찾아가 금과 유황 몰약과 같은 귀한 선물을 바쳤다는 그들에 대해 저는 오랫동안 궁금했었습니다. 도대체 그들은 동방의 어느 나라의 박사들인가 하고요. 그런데 고시촌 골방에서 무료를 달램 겸 마술사 책을 뒤져보던 중 ‘동방박사’는 그리스어 magi의 번역어이었습니다. 당시 magi는 말은 페르시아 지역의 조로아스터 교의 성직자를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성경 속의 그 동방박사가 조로아스터교 성직자였다니! 그나저나, 제가 마술에 깊게 매료된 것은 한가지 특별한 마술의 속임수의 사례 때문이었습니다. 그 속임의 마술은 단순한 속임수나 거짓말이 아니라 기적과 같은 놀라운 힘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도 마술 공부를 좀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지요."
"아니, 어떤 기적의 속임수였기에?"
"그건 이렇습니다. 한 마술사가 미국 일리노이 주의 한 극장에서 마술공연을 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연기냄새가 났습니다. 그는 무대 뒤쪽에서 불이 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불이 곧 퍼질 것을 예상한 그는 관객에게 인도의 힌두 로프 마술에 필요한 검은 연기를 준비한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대가 아니라 극장 바깥, 그러니까 길거리 한가운데에서 보이겠다고 했습니다. 한쪽 관객과 가운데 관객 그리고 나머지 모든 관객들에게 각각 일렬로 밖으로 이동하라고 말했습니다. 거리에서 모두가 함께 봐야 한다면서 말입니다. 이내 극장 안은 텅 비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수 극장 안이 엄청난 불길에 휩싸였습니다. 그 마술사는 모든 관객이 짧은 시간 동안 질서 정연하게 극장을 빠져나갈 수 있게 한 그런 기적의 거짓말로 관객을 감쪽같이 속였던 것입니다."
"와! 마술에 그런 면도 다 있구나. 놀랍군!"
" 그렇다니까요. 참, 제 없는 동안 창동 거리에 한 기타리스트 말썽꾼이 있었다면서요? 기타를 들고 다니다 사람이 모인 곳이라면 거리 아무 데서나 자리를 깔고 앉아 기타를 연주하는? 그리고는 돌발적으로 아무하고나 싸움질을 벌였다면서요. 며칠 전 만난 예술촌 가이드, 경년이 누나가 그러던데요. 누나도 그 술꾼에게 졸지에 험한 꼴을 당했던 적이 있었다고 하던데요"
" 그래, 그런 특이한 악사가 있었지. "
" 그 악사, 호기심이 동하는데요. "
" 그 일은 지금은 지난 일이지. 그나저나, 이군! 거처는 어디로 정했어. 부모님 집에 다시 얹혀 지내?..."
"아닙니다. 혹시 이곳 고려당 골목 안의 피 좀 게스트하우스의 레지던스로 머물게 되었습니다. 마술사로서 용' 그곳엔 프랑스 여행객들이 간혹 찾아오더군요. 그곳 운영자는 프랑스에서 오래 살았던 분이라던데요. "
'그래? 창동 사람인 내가 이곳에 호스텔이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다니! 한번 찾아가 봐야겠어. 외국인 여행객들은 많아? “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며칠 전 프랑스인 여학생이 열흘간 머물다 떠났대요. "
"아니, 창동에 호스텔이 있다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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