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산문

창동인블루6-2-2

jhkmsn 2018. 5. 13. 19:57

                                          2.



창동골목에서 모습을 감춘 지 몇 년 만에 다시 이곳 창동예술촌에 콧수염을 기른 마술사의 풍모로 불쑥 나타난 '키다리' 이군을 특별히 반긴 이가 있었다. 이 골목 이곳저곳에서 화가들과 어울리는 인문이 바로 그였다. 사흘이 멀다 하고 창동을 드나드는 인문에게는 키다리 이 군이 사라진 창동은 전과는 달리 무료한 도심으로 여겨졌었던 것이다. 전에 이군은 인문을 만날 때는  상식을 넘어서는 철학적 물음이나 재치로 그를 자주 궁지로 모는  말재주꾼이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현대회화에 대한 식견이 풍부한 이군과 만나면 둘만이 즐길 수 있는 대화꺼리가 많았다.
키다리 이군은 전에 인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 제가 요즘 들어 화가들의 삶에 대해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제법 이름난 화가들이, 자신들의 그림을 일반적인 공예품과는 차원이 다른 순수예술품이라는 명목으로 경쟁적으로 작품 값을 높이려는 세속적 행태를 곁에서 지켜보았거든요. 어떤 화가들은 실제 삶에서 영업사원보다 더 빠른 눈치로 처세하고요. 얼마 전 책에서 뉴욕의 거리의 낙서화가로 이름 단 키스 헤링(Kiss Haring)의 그림에 관해 읽었습니다. 그때 그의 이런 예술적 사색이 눈에 들더군요: '그림이 왜 갤러리라는 한정된 공간에 놓인 특별히 고가인 상품으로 대우받아야 하는가?” 제겐 그런 비판적 물음은 신선하기도 했습니다.'
"
그랬어? 일리 있는 물음이야.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어",라고 인문이 대답하였다.
키다리는 이군은 다시 말을 이었다. " 주제넘지만 한 마디 더 보태겠습니다. 전에 인문님이 '에콜 드 창동'이라 부른 화가들- 현재호, 남정현, 허청륭- 있잖아요. 그때 제 눈에는 화가들로서 그들의 시선은 너무 좁은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낯선 세계와 소통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세계에 갇힌 채 너무 자만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정말 그랬어?” 
제 생각입니다만, 사실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던 그림세계에서  그 형태나 색채에 어느 정도 독자적인 양식을 얻게되면서 그 순간부터는 그들의 그림이 변하지 않아요. 그때부터는 그려진 그림마다 형태로나 색채가 앞의 것들을 그대로 답습하더군요. 더 이상 새로움을 추구하지 않아요. 창동의 중심적 원로화가들, 이를테면, 박춘성이나 윤복희, 윤종학 등 원로화가들의 그림에서 특히 그런 현상이 두드러졌어요. 일정한 형태나 색채가 어느 단계에 오른 다음부터는 그림들이 그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않아요. 새로운 것을 모색하거나 추구하는 일을 두려워하나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그들 중 어떤 이는 그림 값에 대한 욕심만 드러내고."
한 번은 이 군이 느닷없이 반 고흐를 들먹이며, 그 화가는 독창적 양식과 기법에 비해 이념적 메시지가 부족하다고 느꼈다고 하였다. 고흐의 그림에서는, 철학적 빈곤. 이를테면 철학적 사색한 흔적이 없다고 한 적도 있었다. 고흐는 사유의 시선으로 보다 감성적 느낌만으로 그렸다는 것이 이군의 주장이었다부림 시장 안에서 물리치료실을 차려놓고 살아가는 40대의 작가 지망생 조 선생과 셋이 만난 자리에서 그렇게 말했었다. 이군에 의하면, 고흐의 그 점은 충동적이고 성급한 그의 성격 탓이기도 하지만, 습관적인 모사(주로 밀레의 그림을) 의 습관 탓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남달리 책을 많이 읽는 터라 어딘가에서 그런 주장을 읽었던 모양이었다. “고흐에게 그런 점이 있었어.”, 하면서 조 선생은 고개를 끄떡이며 나름대로 그의 논리에 수긍하는 자세였고, 인문도 역시 그의 색다른 말에 호기심을 보이며 그를 대견스러워 했었다.
 
이군은 반 고흐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그 화가는 20세의 청년기에 그가 존경한 밀레를 비롯한 바르비종파의 기법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었습니다. 고흐가 평생 동안 모작에서 벗어나지 못한 까닭도 거기 있었고요. 돌이켜 보면, 많이 이들이 사랑하는 고흐에게 밀레는 자신의 창조적 상상력이나 예술적 영감의 발휘를 위해서도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난 날 인문은 때때로 이군이 느닷없이 툭툭 던지는 예상치 못한 지적 물음에 속으로 곤혹스럽게 했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번은 그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노트르담의 꼽추 이야기를 꺼낸 후 은근히 그 성당의 건축양식을 꺼내고는 그것이 고딕인지 로마네스크적 물었던 적도 있었다. 인문이 머뭇거리며 "그거 고딕식 아니야?",라고 대답하자, "저도 그렇게 듣긴 했는데요, 그런데 여전히 그 두 건축양식이 어떻게 다른지 잘 감지되지 않아요.”라는 말로 어려운 물음을 이었다.
"글쎄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는데, 이 군이 나중에 알아보고 내게도 좀 설명해줘. 아닌 게 아니라, 나도 그 두 양식 상의 차이가 궁금해."  인문을 만날 때는 그런 비일상적 대화 나누기를 좋아한 이 군이 나중에 그 두 건축양식의 특징적 차이점을 인문에게 아래와 같이 알려주었음은 물론이다:
"
제가 살펴보니까요, 로마네스크는 '로마 같다'라는 뜻이래요. 로마의 대표적인 건축 양식인, 아치형을 본뜬, 돌로 만든 천정과 두터운 석벽, 작은 창문이 로마네스크의 특징이던데요. 파사 대성당이 그 대표적인 건축양식이고요. "
"
그래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아. 그런데 고딕 양식은 이와는 어떤 차이가 난데?"
"
고딕 양식은 로마네스크 이후의 건축양식으로, 이보다 더 크고, 더 높은 건축양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돌로 만든 육중한 천정을 받치고 있는 게 두터운 돌 벽이나 거대한 기둥이 아니라여러 개의 가는 돌기둥의 조합이었습니다. 가는 살 여러 개로 무게를 지탱한 자전거 바퀴 달의 원리와 같은 거라던데요. 그리고 두껍고 육중한 벽 대신 커다란 창들을 설치하고 이 창을 스타인 유리로 꾸밀 수 있었답니다. 가는 기둥과 높은 첨탑이 특징인 노트르담 사원처럼 말입니다."
"
그래 맞아. 이제 그 두 양식이 좀 구별이 되는군. 이군, 고마워."
더 나아가 이런 경우도 있었다. 그 키다리는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를 존경한다며, 그렇게 된 계기는 그 철학자의 죽음 때문이라고 하였다. 인문은 그의 말에 처음엔 의아했으니 나중엔 웃지 않을 수 없었던 적이 있었다. , 디오게네스가 나이 90에 이르러 이제 그만 살아야겠다며 의식적으로 자신의 숨을 멈추었던 것이 그의 삶의 최후였다는 것이다. 그의 그런 초인적인 착상과 결단에 감탄했다고 이군은 말하였던 것이다.
"
거리의 철학자 디오게네스의 죽음에 그런 영웅적인 일화가 담겨있다니죽음과 마주하는 자세에서 그가 소크라테스보다 한 수 위인 것 같아. 안 그래?"
"
그래요. 소크라테스는 재판장에서 사형과 추방령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추방을 택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그는 오히려 사형을 선택하여 독배를 마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지만 그건 자신이 죽음을 스스로 결정한 것이 아니었지요. 그렇잖아요?"
그래 맞아.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스스로 선택한 것은 아니지"
"
그럼요.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디오게네스는, 스스로의 의지로 호흡을 멈추었다니까요."
"정말? 그게 사실이야? 이군이 꾸며낸 거지? 아니, 그게 서실이라면, 그는 참 놀라운 존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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