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산문

창동인블루6-3-1

jhkmsn 2018. 5. 14. 08:08

        두 화가 -이상갑과 김주석-를 회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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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마술 쇼가 끝나자 관객들은 이날 강연의 주제인 <두 화가- 이상갑과 김주석'-를 회상하다>의 강연회가 예정된 2층 갤러리로 올라가 자리를 잡는다. 얼마 후 이날의 행사 주최자인 송창우 시인이 연단에 오른다.

"여러분, 오늘 마술쇼, 좋았는지요? 아마도 매달 한 번씩은 이곳에서 그 키다리 마술사의 재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총각 마술사가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해거름 무렵 여기서 그런 마술쇼를 펼치게 될 것입니다.
지난날 이곳 '창동 상가회'의 임시직원으로 창동골목을 뻔질나게 왔다 갔다 하다 돌연히 모습을 감추었던 이군이 몇 년이 지난 지금 저런 근사한 차림을 한 마술사가 되어 다시 나타났습니다. 이군은 앞으로 지난날의 '창동 허세비' 이선관 시인이나 ‘어시장 아지매현재화 화가처럼 창동의 전설이 되겠다는 각오로 돌아왔다는군요. 지금은, 보기에, 아직은 아마추어 마술사로 이 무대에 섰지만, 뭔가 남다른 꿈을 가지고 다시 이곳으로 되돌아온 것 같아 보입니다.. 어쨌거나 당분간은 그를 이곳 황금당 뒷골목에 있는 리좀 게스트하우스에서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잘 아시겠지만, 게스트하우스란 여행객 숙소입니다. 그곳 휴게실 겸 실내 소극장에서 그가 마술교실도 열 생각이더군요.”
사회자의 다소 긴 인사말이 계속되는 동안  뒤쪽 자리에는 앞서 있었던 그 마술쇼에서처럼  여전히 소곤거림이 섞인다.
"그 키다리가 전에 이곳 골목에서 '어린이 돌봄 봉사자'로도 왔다 갔다 했었잖아. 그리고 '따로 카드'인가 뭔가를 들고 다니며 우리들 손금도 봐주기도 하고. 하여간 다시 만나게 되니 이제 덜 심심하겠어."
사회자는 이어 이날의 강연자 윤용에 대한 소개를 시작한다.
오늘 여러분에게 지난날의 두 화가에 대해 이야기해주실 서양화가 윤용님을 모시겠습니다. 다 아시는 것처럼, 윤용 화백은 그림 읽어주시는 분으로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화가로서 추상화 작업의 막막함에서 허우적거리기보다 창동의 예술인으로 살다 떠난 지난 날의 화가들의 그림 세계에 관해 대화 나누기를 더 소중한 일로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이 지역에서 그 이름이 귀에 익은 화가들, 이른바 남정현, 현재화, 허청륭 등 이른바 ‘에콜 드 창동화가들이나 현재 이곳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이정남, 정진해, 김경미 등 여성화가들의 그림에 대해서도 그는 애정 어린 탐색의 글을 발표하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 따스한 박수로 이 분을 맞이해 주시기를!”

뒤이어 연사 윤용 화가가 이 날의 주제인 <두 화가-이상갑과 김주석->의 회화세계와 관련된 그림 이미지를 담은 자신의 노트북을 들고 연단에 올랐다. 이 날도  연사의 지인들인 경남 원로 작가회의 두 화가 윤종학과 박춘성이, 그리고 <창동인 블루>의 작가인 인문이 앞자리에서 그의 강연을 경청하였고 강연 후 자유대담에도 다 함께 참여하였다. 아래는 윤용의 오늘의 강연 요지이다.             
                    '
다음'
오늘 그림으로 만나는 두 화가, 이 상갑과 김주석은 지난 1950년대에서 60년대에 이곳 창동에서 함께 활동한 지역화가들이다. 이상갑은 이른 청년기에   대한민국의선전에 입선한 뛰어난 서양화가로 그의 작품에 대해 누군가는언제 봐도 예쁜 아가씨의 앵두 색 입술 같다고 감탄했었다. 그의 아름다운 그림은 실제의 대상과 꼭 닮아 그림 앞에 서면 누구라도 내면에서 잔잔하게 이는 지난날의 고향에 대한 향수의 물결을 느낄 것이다. 이에 비해, 김주석은 몽상적이고 비사실적인 의인화된 괴암들을 굵고 육중한 선과 무겁고 진한 색조로 화면을 채웠다. 아마도 그의 꿈속에서나 아른거렸을 사람들의 얼굴을 한 그런 거암 괴석들을 그는 화면 위에 담아 놓았으리라
두 화가-이상갑과 김주석-의 그림을 함께 대하면, 한쪽의 경우, 회화가 전통적으로 현실의 재현에 예술적 가치를 높이 두었던 시대를 대변하는 작품으로 여겨지고, 다른 쪽에서는 사실주의적 재현으로부터 자유로운 탈전통의 독창성을 추구하려는 갈망이 후자의 내면에 가득했음을 느낄 수 있다
대체로 현대에 이르러 회화에서나 조각에서  대상에 대한 객관적 묘사의 정확성이 더 이상 조형미의 판단 기준이 아니라는 게 일반적인데, 전자는 재현에 대한 전통성을 유지하려는데 비해, 후자는  기존의 전통성에서 벗어나려는 과감한 시도를 보여주었다.
이상갑의 경우, 그의 유화 중 하나인자화상은 세련된 균형미와 뛰어난 객관성에서아카데미즘(academism)’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여겨졌다. 조형예술이란 실기 능력뿐 아니라 이성적 절제 미도 갖추어야 하며 이 두 가지 요소는 모두 전문적인 미술교육기관을 통해 얻어질 수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카데미즘이라고 하면, 대체로 이성적 균형과 조화미를 중시하고 대상의 외형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고전주의적 경향을 넓은 의미에서 아카데미즘 양식으로 통칭한다. 이상갑의 풍경화 한 점, '어느 여름날'은 원근법을 일종의 법칙으로 여긴 전통적인 구상작품으로. 2차원의 화면에 3차원의 깊은 공간감이 사실적이다. 그는 평면 위에 착시적 가상공간을 만들어 그 안에 그려진 인물과 사물들을 3차원적으로 보이게 하는, 이른바 원근법의 원칙을 고수하였던 것이다.
이상갑 화가의 삶과 그림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원로 시인 오화룡 선생의 시이상갑의 그림에서 (1989년)-를 인용한다.
<이상갑 화백 그림에서>
가장 잘 살아서 누구든
그림 앞에 서면
, 신음 같은 찬탄
토할 수밖에 없는 그런 고운 색감이
나는 평소 이 화백님의 심정이라 생각합니다.
이상갑 화백 지리산 설경 가운데서도
가장 험준한 듯 하나 볼수록 아늑하여
드디어는 간절한 손짓이라도 있는 양
들뜨게 하는 깊디깊은 골짜기를
나는 이 화백님의 인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리산 설경에서
가장 많이 드러내 보이는 눈 덮인 등성이와
그 아래 몇 채 외로운 농가의 지붕과 지붕이
서로 어깨동무하듯 이마 맞대고 있는 걸
이 화백님의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갑) 화백님이 그 누구보다도 이 세상을 자세히 담으려
자나 깨나 온통 마음과 몸을
캔버스 앞에 묵묵히 정좌시켜 놓은 자세를
나는 이 화백님의 이 세상에 대한 애정 아리 확신합니다.
산촌 마을에서도
가장 외롭고 쓸쓸해 보이는 외딴집 곁으로
깨끗한 개울 한줄기 흘로 물레방아 하나
힘겹게 돌리는 정성 역시
이 화백님의 어느 날 심사로 이해합니다.
이 화백 자신이 아끼는 자화상 속에
그의 단정한 모습은
평소 그의 있는 그대로입니다만
그 이마의 엷은 주름살 몇 가락은
그가 평생 동안 살면서 터득한 창으로
가슴 닿는 많은 이야기로 살아 들립니다.
이 화백 그림의 산촌 풍경 가운데서도
가장산촌스러운우리 농가 배경하여
고목 감나무 몇 그루에서 보이는
홍시 몇 날의 기막힌 정경
이것이 오늘 이 자리의 이상갑 화백님의 상징입니다.

한편, 김주석의 경우, 지인 화가들 사이에 '괴암'이라는 별칭으로 통하는 이 화가는 전통적인 사실주의적 재현 방식이나 고전주의적 규칙들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나 감성이 이끄는 대로 자신의 독특한 상상의 세계를  창의적으로 그려내었다. 잿빛 바다의 위에 떠있는 낯선 바위섬은 거대한 괴암과 여체의 누드 토르소의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 바위들은 꿈에서나 있을 수 있는 비현실적인 형상이다.
김주석에 관한 한, '예술이란, 보이는 것을 묘사하는 데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손으로 더듬어 찾아내는 작업이다.라고 믿었던 듯하다. 진한 색채에다 굵은 선으로 둔탁하고 거대한 바위산을, 그것도 의인화된 괴암으로 잿빛 바다 위에 빚어놓았다. 당시엔 그의 그런 그림은  전통적인 화가들의 눈에는잘못 그린 그림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화가 스스로도 자신의 그런 그림에 대한 이웃의 뜨악한 시선에 화가로서의 회의감이나 썰렁함에 견디기 힘든 마음의 고통을 느꼈을 것이다.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그것은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은 자의 무모한 도전으로 여겨진다. 무엇에 대한 도전이었을까? 얼핏 옛 그리스 건축양식 카트리 아드 기둥을 연상케 하는 그런 누드 여체 형상의 암괴나 바위산이 굵고 둔탁한 색채의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이는 김주석의 어떤 풍경화에서, 스산하고 불안하여 뭉크의 실존주의적인 그림이 떠오른다고 하였고, 이 작가의 인물화를 두고, 그 왜곡된 형상은 초현실주의적이기도 하다고도 하였다.
한편 어떤 관객은  선생의 그런 의인화된 자연 풍경은 그의 독특한 자유상상화이면서 그의 철학을 담은 것이라고 하였다그렇다면, 김주석이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한 주관적인 철학적 상념이 무엇인지 여전히 궁금하다. 그는 이젤 앞에서 빈 캔버스와 마주한 순간회화란 무엇인가?’,  ‘그림의 그림다움이란 무슨 의미인가?’  등등의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거나 하면서 남들이 관심을 가져주던  말던, 자신의 손이, 꿈에서나 보았을, 비현실적인 형상들을 마음 가는 대로 화면을 지칠 줄 모르게 채워나갔다는 뜻일까? '자유상상'이라는 표현의 경우, 그것은 작가가  낭만적 유희 즐기기보다, 모르긴 해도화가로서의 자신에 대한  좌절감이나 회의 의식의 다른 말이 아니었을까도 싶다. 어쨌거나, 화가로서 자신이 처한 상황의 인습적인 관념의 굴레를 뛰어넘는 몽상적 발상은 지금에 이르러 시대를 앞선 시도로 여겨져 새삼스럽게 호기심이 간다.
화가로서 김주석이 드러낸 아방가르드적 성향과 관련하여 한가지 추가할 것이 있다. 그는 스무 살 이전의  청년기에  의분과 체제 도전적 의식이 강하였다는 점이 그것이다. 일제 치하에서 그가 20세 이전의 이른 청년기에  항일 저항의식을 품고 이를 겁 없이 실행에 옮기는 무모함과 과감성을 보였었다. 되돌아보면, 철학자 사르트르나 문학가 카뮈는  2차 세계대전 중 나치 정권이 파리를 점령하고 있던 암울한 시기에 의로운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안다. 그 두 프랑스 지식인들이 후세의 사랑을 받는 데에는 그들이 남긴 작품으로 인한 것 만은 아니다. 그들의 정의감과 용기가 그들의 작품을 더욱 값지게 하기 때문이다. 김주석의 그런 체제 도전적 행위에 대해 한 사회운동가가 아래와 같이 증언하였다.
               '아래'
"
김주석은 틈틈이 그림을 그리면서 교내뿐만 아니라 서울과 진해를 오가면서 독립운동을 했다. 그는 뜻을 같이 한 여러 학우들- 김창석, 전종호, 우순석, 서철호, 이 일 전, 이병주, 이춘상 등-과 더불어 항일결사대인 학우 동인회를 구성하여 명세서와 활동 계획을 작성했다. 투쟁 목표로는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郞)를 위시한 일본의 고위 관리의 암살, 총독부 행정 마비, 통신 군사시설 파괴, 독립군에 정보제공, 우리말·우리글 고수 투쟁, 동포들의 문맹퇴치, 등이었다. 안타깝게도 그 계획은 실행에 옮기지 못한 채 전원 체포되었고 그는 그후 오래동안 고문 후유증에 시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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