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에꼴드 창동
1.
이른바 '에꼴드 파리' 화가들이 학야를 그림의 세계 속으로 끌어들인
책 속의 화가들이었다면, 마산 어시장에 화실을 두고 있었던 현재호는
학야로 하여금 현실 속의 화가들과 술동무로 어울리게 하였다.
인상파 화가들이 글과 그림을 통해 학야의 의식 속으로 들어와
회화에 홀리는 맛을 일깨워 준, 과거의 인물들이었다면,
창동의 현재호는 물감냄새가 물씬 나는 캔버스 속의 회화 곁으로
그를 인도하였던 화가였다. 그 화가로 인해 어느 시점에선가부터
창동과 그 골목의 화가들의 삶과 그림이 그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다.
'에꼴드 파리'라고 하면 제1차 대전을 전후하여 파리의 몽파르나스 거리나
몽마르트르 언덕에 모여든 일군의 화가들을 말한다. 그리고 파리 태생의
유트릴로를 제외한 대부분의 에꼴드 파리화가들은 외국인 화가들이었다.
파리의 이 화가들은 당시 유럽의 전후파적 절망감이나 파리의 예술적 향취를
시적으로 그림에 담아낸 온건한 사고의 화가들이었다.
'전통은 혁명으로서만 유지 된다'고 한 프랑스 작가가 말을 상기해 본다면,
이들은 회화사적 차원에서 볼 때, 피카소 마티스 등 중요한 의미를 띤
화가들이라기보다 탈속적 기품의 허무주의적 이웃사이더 화가들이었다.
자신의 삶에 있어서나 예술적으로 모두 낭만주의자들이었고,
샤갈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몽마르트르나 몽 파르나스에서
이 카페 저 카페를 떠돈 보헤미안적 삶을 살았던 이들이다.
학야는 그림 보기에 몰두하기에 앞서 한 문예 저서 '카페 소사이어티'를
번역하는 동안 친숙해진 파리의 모딜리아니와 유틀릴로로 인해
에꼴드 파리에 매료되었다. 첫 글귀가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그 영문 저서는
몇 년이나 그의 침상 주변을 떠나지 않았던 애독서였었다:
".... 과장 섞인 도덕주의와 상투적 어휘들이 무성한 공식적 모임의
무리들의 표정을, 비밀스런 속삭임의 장소에서 지어 보이는 생생한 음모성의
표정과 비교해 보아라. 그 순간 그들은 전혀 낯선 얼굴로 다가설 것이다.
당신은 전혀 새로운 인물들의 야무지고 생기 넘치는 발상의 번뜩임,
행동과 결정의 민첩성에 감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화가들 관련 글 중에 드러나고있는 모딜리아니의 어떤 의식의 표현, 즉,
'보편적으로 행복이란 것이 비속하고 천박하다'는 이 한 마디는 무엇보다
강한 유혹이었다. 그가 창동 골목에서 함께 술을 마시게 된 현재호의
그림과 삶에 마음이 끌리게 된 것에는 그리고 그 화가를 에꼴드 창동이라
이름 붙이게 된 것에는 아마도 그 에꼴드 파리 화가의 삶과 예술성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로부터 창동 골목의 화가들-현재호, 남정현과 허청륭과 그리고, 학야가
얼마 전부터 자주 사색하게 된, 변상봉-이 이른바 창동 에꼴드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 화가들에게 마산의 도심 창동이 화가로서의 삶의 중심무대이고,
저마다 독특한 개성의 자유인들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에콜드 창동'이라는
말을 학야에게 제일 먼저 떠올리게 한 화가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현재호였다. 어시장 풍경과 노점상 여인들을 주로 화폭에 담은 화가로
그의 삶 자체가 이곳 도심 골목의 관심거리였던 것이다.
현재호는 창동에서 만초라는 주점을 열고있는 옛 친구 조남융의 권유로
마산에 와 이 도심에 눌러앉아 그 낭만성 짙은 '푸른 창동시대'를 펼치다
몇 년전 홀연히 세상을 떠난 화가였다. 사람들의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는
그의 그림은 그 비실재적 인물이나 대상으로 인해 샤갈을 연상케 하고,
보헤미안적 삶을 살다 술병으로 죽은 그 화가의 삶은 영판 에꼴드 파리의
유들릴로를 떠올리게 하였던 것이다. 한 번은 학야가 그에게
'당신이 제일 좋아하는 게 무엇인가 ?'하고 물었을 때 그는 소나기 내린 뒤
불종거리의 희다방 건물 위로 선 무지개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어떤 점에서 현재호의 그림은 회화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소곤거림의
시적 산문이다. 무형식의 자유로운 시다. 그림 속의 비실재적 인물들의
마술적 형상은 곧 그의 영혼의 시선에 포착된 이웃의 삶의 뼈저림이다.
창동의 남정현 화가와의 대화 중에 그가 현재호는 현실의 절망감을 면제받은
운 좋은 보헤미언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화가의 말에 그 순간 학야는
소주잔과 찬물 한 그릇이 늘 그의 곁에 있었던 그에게서 언뜻
에콜드 파리의 모딜리아니나 슈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때부터 현재호를
에콜드 창동(창동의 화가)라고 불러야겠다고 혼자 마음먹었던 것이다.
현재호와 그의 그림이 지닌 묘한 흡인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것은 그와의 만남 이래 학야가 스스로에게 늘 던지는 물음이었다.
그의 그림의 대상은 대부분 사회적 저층 인물의 얼굴들이다.
수줍음이 가득한 얼굴의 감은 눈, 나무뿌리처럼 투박하고 굵은 손과 발,
유난히 큰 젖가슴 등이 비실재적으로 그려져 있음이 그의 인물의 특징이다.
그 인물들은 초현실주의적 표현의 얼굴들이다. 합리적인 지성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소주에 젖은 환각의 손에 의해 포착된 얼굴이다.
이 화가의 그림 속에는 인물들의 무언의 신뢰와 그리고 무한히 적은
소유가 주는 무한히 큰 자유가 담겨 있다. 그들의 침묵은 물안개빛
몽상의 평면 위에서 부드러운 검은 선을 타고 애잔하게 흐른다.
이 화가의 그림 앞에서 눈시울이 젖는 관람자들이 있다.
그림 속 대상과의 감성적 교감이 깊어 그럴 것이다.
'작품 곁에 있을 때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익숙해 있는 곳과는
완전히 다른 곳에 있음'을 체험하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학야는 그렇게 믿었다.
현재호의 이른바 '창동의 마술사 시대'의 그림들은 1980년대 후반을
전후하여 화폭 위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는 게 학야의 개인적인 관찰이다.
그 이전의 그림들은, 그 이후의 그림들과는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의미 있는 차이를 보여 주었던 것이다. 예컨대, 그 이전의 한 그림을 보면,
화가의 자화상으로 여겨지는 한 얼굴이 외진 구석에 몸을 반쯤 웅크린 채
앉아 뭔가에 골몰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땐 화가의 품에서 영감의 알이
부화를 기다리고 있었던 시대가 아니었던가 싶다. 그 이후 시기 이래로
그림의 주요인물들이 감은 눈의 얼굴을 하고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테면, 어미닭 품 안의 병아리들처럼, 그 인물들이 어떤 보호막 안에서
서로 몸과 몸을 맞대고 체온을 나누는 그런 그림이 화폭 위에 그려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 화가는 자신에 대해 말할 줄 모르는 화가였다. 그의 말은 논리적 질서의
굴레를 벗어나 있었다. 게다가 그는 언어 자체가 결핍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이 점은 신기하게도 그의 그림에 대해 간혹 대화를 나눌 때
거의 불편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들의 상상을 자극하여 폭과 깊이를
오히려 더 심화시키는 묘한 요소였다. 그림 그 자체뿐 아니라 화가 자신의 모습이
또한 그의 창동의 마술사 시대를 연 요소들이었다. 현재호의 그림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그와의 소주잔 부딪침이 늘어나면서였고,
그 이후부터 창동의 골목 선술집들의 담배연기 자욱한 취기가 학야 자신에게도
잘 어울린다는 기분이 들게 되었던 것이다.
2.
불종거리의 남정현 화실 입구에 걸린 반추상의 유화는 비회화적 상징이나
문학적 일화가 담겨 있지 않다. 코발트 색조의 화면 위에 바다풍경이
반추상적 패턴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난 80년대부터의 그의 그림에서는
막연한 사색적 흔적은 사라지고, 작가가 추구한 '순란한 색채에 의한
가시적 구조의 질서'만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남정현은 감상주의적 연상이 묻어나는 화면에 거부감이 생기면서
자신의 손길이 그렇게 경도되었다고 하였다. 남정현은 현재호 그림의
유기체적 곡선, 부드러운 따스함 그리고 풍만함이 자신에게는
물컹물컹한 느낌을 주더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미는 차가운 속성의 것.
곡선들의 부드러운 조화가 불러일으키는 유기성의 물질감보다
비물질성의 직선들이 이루는 직각이나 예각이 더 아름다움에 가깝다.
언젠가부터 그의 손길은 그런 이식을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남정현의 그림은 탈문학적이다. 사람들은 대개 그림 앞에 서면
자신도 모르게 그 속에 인간적인 의미, 이를테면 슬픔이나 고뇌 혹은
회상적 달콤함을 찾으려드는데, 이 화가는 자신의 그림이
그런 감상과 어울리는 것을 거부한다. 이 화가의 그림이 학야의
시선을 당기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내면에서 일어난 문학적 성향의
변화와 궤를 같이하였다. 도스토에프스키나 햇센의 내면적 성찰의 글에 담긴,
꿈틀거리는 생명의 유기성이 칙칙하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 대신 까뮈적인 허무주의적 도회성이나 아라비아 로렌스가
글 속에 담은 모래사막이나 음모적 기질의 건조한 글귀들에
더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세상은 한 마리의 거대한 짐승. 그 뼈는 깨끗하다.'-
까뮈의 그런 건조한 글귀들이 좋아지기 시작하였을 때부터였다.
남정현의 그림은 애매한 비가시적 정신성을 배제하였다.
세속성의 아기자기한 이야기나 낭만주의적 시정이 담겨있지 않다.
빨강이나 감청의 색채가 순수한 회화적 질서를 찾아내고 있을 뿐,
언어적 표현의 상상을 거부하고 있다. 그의 그림엔 언어가 들어설
공간이 없다.
그의 그림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던 것으로, 그 화가가 관심을 갖는
것은 색채의 대비, 양감의 관계, 직선과 곡선의 어울림의 어떤 형태적
구성이지 오브제의 언어적 의미가 아니었다. 화가가 구상과 일정한
거리를 둘 때 비로소 현실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런 추상성 지향의 바탕엔 그의 의식에 늘
잠재해 있는 남해 쪽의 해안풍경임을 다른 그림들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그의 반추상의 중심엔 늘 마산의 앞바다가 숨겨져 있었다.
남정현은 무엇보다 뇌리 속의 순간적 번쩍임인 영감보다 손의 긴 노역을
견디는 것을 더 귀하게 여기는 화가이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영감의 번쩍임은
번개처럼 사라지므로 그 잔상은 너무 희미하여 포착하기 힘들다.
따라서 그 잔상을 형상화하기 위한 노력은 힘겹고 지루하지만 자신에 관한 한
그림은 그런 긴 노역의 결과인 것이었다. 그의 주된 삶의 공간은 곧 화실이다.
또 다른 에꼴드 창동인 허청륭의 그림 앞에 서면 형태의 단순화, 시적 향기
그리고 아름다움에 대한 이 화가의 끊임없는 사색들을 느낀다.
그는 자연의 형태에서 아름다운 원형을 찾아내려 애쓴다.
허청륭은 김환기의 화첩에 담긴 '나무와 달'을, 그리고 그 화가의 산문집
'그림에 부치는 노래'에 적힌 김환기의 아호 수화-나무들과 대화하다-를
좋아한다. 학야에게 그 수화에 얽힌 아래의 옛이야기를 귀가 솔깃하게
들려준 적이 있었다.
옛날에 한 공주를 모시는 어린 시녀가 있었다.
화창한 어느 봄날에 어린 이 소녀는 맘 둘 곳이 없어 하루는
후원에 나가 양지 바른 곳에 앉아 양손으로 흙을 파헤치면서
거기다 대고는 마음의 호소를 실컷 하고 난 다음에 그 말들을
흙으로 다시 덮어 메워 버렸는데 가랑비가 내리고 다시 봄날이
화창해지자 거기서 이름 모를 싹이 돋아 매끈한 나무로 자라더니
가지도 크지고 잎이 푸르고 무성한 그늘을 이루었는데 봄도 가고
여름도 가고 낙엽 지는 가을이 되자 이 미끈히 자란 나뭇잎들이
가을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한 잎 두 잎 팔랑 팔랑 떨어져 성 밖으로
날아가면서 그 어린 시녀가 속삭였던 아름다운 비밀의 말들이 공
중으로 퍼져 나갔다고 하였다.
김환기의 별칭 수화는 그 이야기가 좋아 화가가 스스로 지은 별칭이었다고
하였다.
허청륭이 창동외곽에 있는 그의 화실에서 오후 햇살 아래
소주잔을 앞에 놓고 앉아 뭔가에 몰입하는 순간의 모습을 학야는
두 번이나 본 적이 있었다. 그 모습은 학야에게는 그의 가장 멋진
순간의 것이었다. 현재호나 남정현의 화실에서도 화가들이 그림 그리기에
몰입하는 분위기를 느끼기는 했었지만 ,방문객이 들어오는 것조차 모른 채
사색에 몰입하고 있는 그런 모습은 드문 일이었던 것이다.
학야는 그 순간 불현듯 '영감은 집중의 산물'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던 일이 있었다.
'달빛 사냥꾼'이라는 말은 허청륭에게 어울리는 표현이다.
산사에서 깊은 새벽 술이 반쯤 깬 상태로 만나는 보름달,
푸르스름한 앞산 능선 그리고 홍매화 꽃잎 한 점 등이 그의 풍경에
녹아 있다. '푸른색 가장자리에 흰빛의 선이 유난히 드러나는 달빛 풍경들',
하루에 소주 몇 되를 마시면 오장 육부가 춤을 춘다.', 그리고
'.... 그래도 예술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아름다움의 구현이다.',
이런 어휘들은 허청륭이 술자리에서 자주 입에 올리던 표현들이다.
매우 사적인 말이지만, 허청륭의 그림 한 점은 지금 미국 LA에 거주하는 학야의
아들집에 걸려 있다. 그 둘은 그의 그림을 매우 아낀다. 둘의 결혼 축하선물로 준
그림으로 화가가 무엇을 어떻게 그릴까 하며 근 일주일이나 그 둘만을 위해
고심하여 창작한 그림이었던 것이다. 허청륭이 시적인 화가임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학야와 술잔 나눌 때 둘은 김환기의 달 항아리를 자주 들먹였고,
그림의 미적 본질은 시적 표현에 있음에 둘은 자주 공감했었다.
3.
남성동 우체국 앞 나삼수의 기획사무실에 최근에 작고한 변상봉의
풍경화 그림을 찍은 사진이 한 장 걸려 있다. 변상봉 화가가 함안 문화센터 건축물을
주요 대상으로 그린 풍경화를 찍은 사진이다. 한 도회적 건축물의 시적 풍경을 담은
채색화이다. 건축물이 선의 흐름을 타고 한 폭 풍경의 시로 시각화되고 있다.
함안 문화센터가 저렇게나 미려한 건축작품인가.! 그 화가의 손에 의해 화면 위에
그려진 건축물 그림의 아름다움에 누구나 감탄한다.
화선지 위의 살아 있는 선, 특별히 누드의 선으로 세인들의 감탄을 자아내던
변상봉이 얼마전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어느 누구도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그의 필선의 자유분방한 그리고 도발적인 유영, 우리의 전통에 대한 현대적
소화력 그리고 미의 세계를 추구하는 지적 도발로 세인들의 사랑을 받던
그가 남기고 떠난 빈자리가 학야에게는 가슴 깊게 느껴졌다.
그 화가는 데생이라는 절차를 거치지 않고 수묵으로 일필에 살아 있는 선
즉 여체의 선을 그어 버리는 그가 술자리에서 한 말,-'누드의 선을 가장 아름답게
그은 작가로 평가받고 싶소.'-이 창동 골목길로 들어서면 어김없이 귀에
쟁쟁거렸다.
서구의 미술품이 주된 미적 관찰의 대상이었던 학야에게 필과 묵을 바탕으로 한
변상봉의 눈부신 손동작과 선, 특별히 누드의 선은 탐색하기에 쉬운 주제가 아니었다.
학야는 한동안 그 화가의 누드와 풍경을 더 잘 느끼고 싶어 어렵게 구입한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의 두 저서 누드론(The Nude)과
풍경예술론(Landscape into Art)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탐독했으며
그를 만날 때는 항상 이런저런 미적 호기심이 발동했었는데,
그만 중도에 탐색 대상으로서의 그 인물이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누군가가 변상봉은 누드모델에 비정한 객관의 시선으로 대하였으며
그가 누드의 하체만 강조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학야가
느끼기에는, 그 화가에게 누드의 하체는 오히려 그의 선의 필력을
집중시키고 싶은 주제였었고, 그 화가는 the nude와 the naked를
구별하는 눈을 가진 예인이었다.
그는 벗겨진(naked) 여인의 부끄러운 부분을 그리려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필력이 여체미의 가장 정교한 부분에 합당한 수준인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한 순간에 그려진 담채의 누드 소묘의
필선은 정확하고 힘차다. 어느 그림애호가에 의하면, 변상봉은 여자의 음부를
단순한 치부로 보지 않고 생명의 문, 희열의 샘, 성스러운 땅, 성의 못,
창조적 근원지로 보고 있었다. 여자 누드에 대한 찬미는 서구미술과 문화에서
잘 확립된 전통이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인체가 성적 행위와 관계되어 나타나는
비밀스런 예술형식을 동반해 왔음은 잘 아는 일이다.
변상봉은 타고난 선의 대가였다. 그 화가의 선만큼 감치는 맛을 주는
그림도 드물다. 아마도 선은 시각요소들 중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보편적이다.
대상을 취급함에 있어서 우리는 사실상 우리의 손가락으로 윤곽선을 긋는다.
선은 명확하고 단정적이며 지적이다. 그 굴곡과 패턴이 대단히 복잡해질 수
있지만 그리고 정확하며 모호하지 않다. 그리고 선은 근본적이고 자연적인
현상과의 동일화를 통해 의미를 전달한다.
학야의 창동 애착은 먼저 그의 후각과 관련이 있다. 불종네거리에 이르면
그의 오랜 잠재의식 탓인지 창동의 특이한 냄새를 맡게 된다. 어시장 쪽에서
부는 바닷바람에 실려 오는 갯내로 밥상에서 자주 먹던 멸치젓갈이나
파래무침의 냄새 같은 것이다. 그리고 어떤 회상의 청각적 요소,
이를 테면 창동의 이 골목 저 주점에서 듣던, 지금은 없는 어느 화가의 고양이
발자국 소리, 아득한 날의 젊은 의분의 함성과 바흐의 둔중한 첼로의 선율.....
무엇보다 창동은 학야에게 파리의 몽마르트가 연상되는 곳이다.
그곳의 파리파의 화가들과 더불어, 아래는 카페 소사이어티(Cafe Society)에
담긴, 그곳에 대한 두어 구절의 인용문이다. 그 책은 마음에 들어 학야가
열정을 다하여 우리말로 옮긴 문예서이다.:
'아래'
'몽마르트르는 여전히 라일락꽃, 꼬불꼬불한 오솔길 그리고 하얀 지붕의
초라한 고옥들이 붙어 있는 시정 넘치는 언덕 마을이었다.
파리의 현대예술가들은 대부분 이 고립된 언덕의 싸구려 하숙집에서
생활하였다.'
'모딜리아니가 호주머니에 오스카 와일드의 책 한 권만 넣고 빈털터리로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는 압상트 주와 담배 그리고 보헤미안 예술가들을
싫어하였다. 센강의 남쪽 지역인 몽파르나스의 카페 로통드에 나타난
그 검고 빈정대는 안달루시아인 피카소는 모디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 재능이 있다고 해서 그것은 옷을 아무렇게나 입어도 좋다는 이유는
될 수 없다'고 피카소를 비판하였다........
모디는 남이 있거나 말거나 마약에 취한 몽롱한 상태를 숨기지 않았다...
작업 중에 모디가 호주머니에서 지독한 약품냄새가 나는 녹색 혼합물로
가득한 작은 상자를 꺼냈다.'
"좀 들어 보련? 마리화나야. 인도산 대마초 원액인데.
벵골에서 들여온 거래. 진짜야. 이 진기한 물질이 상상력을 북돋아 주지."
"난 여태껏 맛보지 못했는걸." "솔직히 나 역시 그래. 이것은 빈속에
마셔야 한대. 샌드위치는 나중에 먹자구. 마리화나의 효과가 줄지 않게 말일세.
돈은 내가 낼게. 설탕을 타서 재빨리 마시게. 그런 다음 커피로 입가심하고."
창동의 무엇이 자신의 발걸음을 그곳으로 끌어당겼는지, 학야는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남성동 우체국 앞 골목길의 이끼 낀 화강암 돌담, 간판 없는
주점 창동인블루의 축음기와 고전음반들, 그곳으로 드나든 허청륭의 쉰 목소리,
현재호의 손가락 춤, 남정현의 파이프 담배 향, 그리고 인문주의자 정자봉의
수필 같은 적재적소의 위트 한마디 그리고 선의 탁월한 장인 변상봉의 선누드화
등등이.....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길에서 유틀릴로나 모딜리아니 혹은 로트렉 같은
화가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돌담이 진정한 몽마르트르 골목길이 될 수 없듯이,
창동의 그 화가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골목길이라면 그건 진전한 창동의 골목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학야는 혼자 그렇게 회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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