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산문

창동인블루2- 최운의 꽃게

jhkmsn 2014. 10. 8. 19:11

       3. 최운의 꽃게

 

        1.

 

구름할배라면

이 고장 사람들이라면

최운 선생이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합포만에서 기어 나온

최운 선생의 게들이

바다로 되돌아가지 않고

삼복 구름을 헤치고

힘들게 서마지기 고개를

기어 넘으려 합니다.

마침내

게들은 모두 꽃게들이 되고

꽃게들은 나비들이 되어

최운 선생과 같이

서마지기 고개를

가볍게 훨훨 날아갑니다.

 

'창동 허새비'로 불리던 시인 이선관의 위의 이 시, '마침내 나비가 되어'를

통해 궁금해진 '게' 그림의 화가 최운은, 그와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아온 필자가

창동에서 한 번도 만나지 못한 화가이다. 아니 서로 알아보지 못한 채

어시장 어귀 어딘가에서 서로 스치고 지냈을 것이다. 최운의 '게'는

문신의 회화 '마산항'의 왼쪽 하단에 전개된 그 갯벌에 살던 게들이다.

그 갯벌엔 두 눈을 곧추 세운 날씬한 꽃게들이 큰 돌밭 아래 반쯤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한 번은 하와이에 사는 그의 사촌 인우가 잠깐 귀국하여 마산에 들렸을 때

학야와 사촌은 이 도시의 구 도심에 위치한 남성동 파출소 앞에서 만났다.

남성동 파출소라는 이름은 이 지역 출신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찾을 수 있는

마산의 도심의 상징이다. 이 파출소는 1960년대  마산의 315의거를 노래한

김춘수의 시 '베고니아 꽃잎만큼이나 선연한'을 통해 전국적으로도 잘 알려진

명소이기도 하다. 타 지역에서 온 이와 전화로 만날 장소를 정할 때

이곳 노인네들의 머리에 쉽게 떠오르는 곳이다. 20대의 젊은이들 사이엔

불종거리의 코아 앞이 그런 만남의 공간인 것처럼.

 

두 사촌들은 그 파출소와 마주 보고 선 제일은행 쪽으로 길을 건너

지난 날 오행당 약국이었던 정동극장 건물 앞을 지나 창동 네거리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잊지 않고 있는 평안 안과를 지나, 문신 미술관의

옛터인  베비 골프장으로 향하는 문신길로 들어설 것인지, 아니면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고려당과  상업은행 앞 네온의 불빛 창동거리를 걸을 것인지를

선택하기 위해서였다.

 

학야는 토요일 오후면 혼자 이 창동거리를 걸었었다. 글 쓰는 일의

부질없음에 마음이 시달리다 보면 창동네거리의 젊은 인파에 휩쓸리고

싶어졌던 것이다. 젊은 인파의 리듬을 타고 걷다 보면 삐걱거리는

'정신적 기계'가 다시 활력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멋진 서구적

도회풍의 폴로 건물로 바뀐 구 희다방 앞의 확자한 차량 소음,

창동거리로 들어서는 젊은이들의 즐거운 방자한 몸짓, 학원사 앞 거리화가들의

초상화 그리기. 아니면 그 서점 맞은편 화장품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빠른 리듬의

춤곡 등이 침체의 늪에 빠져들고 있는 그의 의식을 깨워 주었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오래전 이 상가거리는 상당 기간 학야의 경제적 삶을 뒷받침

주던 곳이기도 하다. 학야는 이 도심거리의 금은방, 책방, 식당 등의 아들딸들의

과외 선생이었다. 그들이 대학에 들어가기 전 그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었다.

당시에는 과외수업이 금지되었던 터라 학생들 집을 밤도둑처럼 드나들며

생계비를 벌었었다.

 

한 번은 학야가 창동거리를 산책하던 중 남성동 파출소가 눈에 들어왔을 때,

그 이름이 마음 한구석에 칼날처럼 찌르는 통증을 일으켰었다.

지난 1960년 3월 15일 마산의 의거를 전후하여 하늘같았던 아버지가 민중의

돌팔매질의 표적이 되어 그것이 학야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기 탓이었다. 당시에 이 지역의 야당 정치인으로 살아오시던 40대의

아버지께서 역사적 흐름을 감지하지 못한 채 민중의 반대편에 서는 길을

선택했었던 것이다. 신문 한편에 올라 있는 불명예스러운 아버지의 이름은

그 이래 김춘수의 시 '베고니아 꽃잎만큼이나 선연한'의 한 구절이 청년기의

학야를 끊임없어 부끄럽게 했었다.

 

창동거리에 들어서면 어시장 등대, 북마산 가구거리 그리고 남성동 파출소라는

 이름들이 그의 내밀한 개인적 삶의 흔적들까지 되살려 노년기의 그를 몽롱한,

일종의 취기에 빠져들게 하였다. 발걸음을 타고 의식 속으로 밀려오는 어떤 이미지나

 소리, 이를테면 넓은 갯벌의 무수한 밀게들의 집게발 군무,  작별의 고하는 전화속의

아득한  목소리, 요양원 병실 창밖의 한겨울 싸락눈 내림과 4월의 벚꽃 휘날림

그리고 김춘수의 어떤 시 구절 등이 그것들이다.

 

남성동 파출소의 위 창동네거리에서 발걸음을 잠깐 머문 두 사촌들은

인운의 눈길로 방향을 정한 후 곧장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닌 게 아니라 학야의 마음에도 그쪽 불종네거리 어딘가 쯤에서

저녁 겸 술도 나누고 싶어 하던 참이었다. 얼핏 생각에 불종거리의

양과점 코아의 뒷길가의 고려초밥집이 좋겠구나 싶었으나 이내 마음을

바꾸어 창동의 옛 금광당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주점인 만초로 들어서기

함이었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아우와 회포를 나누기엔 이 만초가 더 좋을 것

같아서였다.

 

인우와 학야는 마산의 구강에서 소년기를 거의 함께 보낸 친 4촌 사이이다.

동생 역시 학야처럼 마산의 어시장의 갯내나 옛 창동거리의 번성한 불빛에

익숙한 세대이다. 둘은 홀의 스탠드 안에 놓인 전축 위에 걸린 꽃게 그림 하나에

잠시 시선을 고정시키는 것이었다.

 

'어, 형, 저 꽃게 기억나, 형네 집 앞 갯벌의 굴밭 돌 밑에 있던 그놈들이잖아.'

 

'나는 꽃게의 그 집게발보다 네 엄마의 옥타브 목소리가 더 겁났었지.

갯벌에서 게 잡느라 네 옷과 얼굴이 온통 뻘범벅이 되었던 그날 말이잖아.

그놈들 얼마나 민첩하던지.'

 

'저 몸매 날씬한 것 한 번 봐. 영판 그 굴밭 꽃게 그대로인 걸!'

 

'최운이라는 이곳 출신 화가의 그림이야.

내가 마산에 그냥 찐득하게 정붙이고 살았으면 저분하고도 직접 만났을 테인데. '

 

 

두 사촌들보다 먼저 와 스탠드 자리에서 음악 cd를 챙기던 경남도립미술관의

L학예가가 둘 쪽으로 불쑥 한마디 던지게 되면서부터 최운의 꽃게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지기 시작하였다:

'저 화가의 꽃게들은 마산의 갯벌의 무사공자들입니다.

물정에 어둡고 실속이 없는 놈들이지요.'

'꽃게들이 아니라 그 꽃게의 화가가 그렇지'

 

최운의 실속 없음을 잘 아는 주점 주인도 그렇게 한마디 거들었고,

학야는 귀에 들리는 그들의 말에 사촌을 향해 미소를 던졌다.

 

학야는 안주로 된장찌개를, 그리고 사촌은 사촌 형을 위해 매실주를 주문하였다.

둘은 청년기 때 다른 사촌들보다 친하게 지냈다. 어머니가 끓여 주는 바지락이

든 해물된장을 아李?좋아했었던 것을 학야는 알고 있었고, 아우는 하와이로

이민 떠나기 전에 위장 약한 형과 더불어 매실주를 자주 나누었던 것이다.

마산에서 태어나 바다의 게를 주로 그린 최운 화가의 풍경화 곁에 걸려 있는

이 꽃게 그림은 동생에게는 문신의 '마산항'의 갯벌을 연상하기에 충분하였다.

그곳 굴밭의 바위 밑에 몸을 숨긴 꽃게의 하얀 집게발은 날카로웠고 몸은

여간 날렵하지 않았음을 그는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2.

 

마산 지역의 화가들 중 비재현적 회화예술을 추구한 이를 들라면 우선 문신과

함안예술관장인 윤병석, 그리고 지난해 작고한 변상봉 교수 등을 꼽을 수 있다.

문신과 마찬가지로 후자의 두 작가들도 20세기 서구회화의 모더니즘에 관심을

보이며 '실제' 모습을 환영적으로 묘사하는 일에서 탈피하려는 회화적 탐색을 

도한 적이 있었던 화가들이다. 이 장에서는 문신의 경우만 언급하고 다른

화가는 뒷장에서 따로 좀 더 구체적으로 사색을 것이다.

 

문신의 회화와 관련하여, 그는 58년도의 작품인 '벽돌집'이나 59년도의 '봄비'

등에서 그런 추상화 경향을 이미 드러내고 있다. 61년도 이래 지속적으로

그의 유화작품들에서 그런 탈재현적 경향이 심화되면서 이 경향은

그의 비재현적 3차원의 작품세계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작가 자신의 아래의 회고의 글을 통해 그런 점을 유추할 수 있다.

 

'한 조각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나는 많은 데생을 한다. 그것들은 단지

선과 선들로 연결된 원, 타원, 또는 반원만으로 구성된 것이다.

종이 위에 전개된 이 원과 원들을 하나의 구체적인 양괴로로 만들기 위해,

단단한 재료, 흑단 혹은 쇠나무의 한 덩어리를 직접 깎기 시작했다.

이 양괴들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의 포름이 되기를 바란다.

이것들에 대해 여하한 구상적 현실의 재현도 바라지 않는다.

그것들은 단지 자연스러운 형태들이다. 그것은 그들 자체의 현실을

가진 형태들이다.'

 

현대회화에 있어서 재현의 의미의 격감과 관련한 몇몇 요인들 중 특히

중요한 점으로 작품이란 결국 하나의 물체에 불과하다는 착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작품이란 미적인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아름답고 흥미있게

색채와 형태를 결합시킨 물체로서, 작품의 묘사적 기능이나 이미지를 만드는

기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사색이 그것이다. 미국의 잭슨 폴록의 작품이

그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그의 그림을 보면서 그림 속의 그 섬세하고 신비로운

색채의 뒤엉킴 속으로 빨려드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그 속에는 우리들이 알 수 없는

어떤 대상의 이미지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때문일 것이다.

 

좀 더 우리들 곁 가까이에 있는 그런 추상경향의 그림을 하나 예로 들어 보자.

현재 창동의 주점 성미의 벽에 붙어 있는 현재호의 묵화가 그런 경우이다.

얼른 보기에 그 평면은 술 취한 붓의 자유로운 유희가 그대로 담겨 있는

그림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눈을 닦고 한 번 더 직시해 보면 그 속엔

작가의 머릿속에 든 인물의 이미지가 질서 있게 숨겨져 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최운의 그림세계는 구상적이고 묘사적이다.

자신에게 친숙한 바다풍경이나 꽃게와 같은 대상과 대화하듯 그린다.

무엇보다 작품의 주제를 강조하기 위해 배경을 생략하는 기법을 취한다.

이러한 구도는 한국화의 원근법을 연상시킨다. 화면의 하단부에 배치된 소재는

근경에 해당되고 상단부에 배치된 소재는 원경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그림은 대부분 화가의 일필휘지의 필력이 돋보이는 소묘들이다.

 

최운은 탈사실주의적 추세에 무심했었다. 그의 예술은 자신의 삶을

지배해 왔었던 환경, 즉 마산의 바다와 갯벌 그리고 그 속의 게 새우

그리고 섬과 선박 등 주제의 한가운데 있는 대상을 집중적으로 선택하여

이를 리얼하게 묘사하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타고난 재능에 정성까지

더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요컨대 이 화가에게 중요한 것은 탐구적 지성보다

손의 장인적 필력이었던 것이다.

 

최운의 '바다'를 보면 그것은 조선 후기의 진경산수화가 겸제의 '회화식 지도'나

그 시대의 문인화가 강세황의 '영통동구'의 풍경을 얼핏 연상케 한다.

그 그림은 최운이 지금 문신 미술관 자리의 언덕 어딘가에 서서 멀리 앞쪽으로

던진 시선에 포착된 바다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마산항은 40년 후대에 문신이 잡은

그림 '잔설'의 전경과 그 골격이 거의 비슷하다. 앞바다와 그 너머 배경 언덕에 잔설이

깔린 이른 봄의 마산항 풍경이다. 두 그림 다 옛 추산동 언덕에 서서 멀리 내려다보이는

 전경을 그대로 포착한 것이다.

 

'그 풍경은 사실적이면서도 작가의 내면이 주관적으로 표현된 점에서

그렇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한때 창동의 보헤미언 예술인들의 쉼터였던 주점 고모령에서 최운이 취흥 중에

동석한 젊은 화가들에게 보여 준 종이 위에 일필휘지했었던 후담에서

이를 유추할 수 있다.

 

   

                        3.

 

최운의 게 작품 중에는 시대상의 무거운 주제를 표현하는 것들이 있다.

'행진'과 '419' 제목의 그림들이 그것이다. 그 그림들은 마산에서 315의거가

일어났었던 1960년의 현장에 있었던 이라면 그 게 그림들의 제목만으로도

첫눈에 그 현장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학야에게 그 그림들은 더더욱

리얼하고 직설적이다. 맨 화면 위 행진하는 게들만이 그려져 있으나 그곳이

창동의 입구인 불종거리나 남성동 파출소에서 시청에 이르는 길 사이라는 것을

잘 안다. 행진하는 게들 중에 흰 배를 드러내고 누워 있는 게 한 마리는 나의 급우

김용실을 상징적으로 표햔하고있고, 그 앞쪽의 다리가 큰 게 한 마리는

315 의거기념사업회의 회장이었던 김종배를 금방 연상케 한다. 둘 다 그 역사의

현장에 있었던 인물들이다. 학야도 그 데모현장의 무리들 틈에 끼어 있었다. 아니,

당시의 고등학교에 다닌 남녀학생들이라면 모두 그 현장에 있었다.

 

창동은 학야가 한동안 다가서기를 주저하였던 때가 있었다.

거기엔 그의 개인적인, 너무나 개인적인 마음 아픔이 묻어 있기 때문이었다.

한때 불종거리에 나오면 불현듯 귀속이 윙윙거리는 증세가 있었다.

주말 창동입구의 인파의 물결에 휩싸이기라도 하면 그랬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그 윙윙거림은 평소에 학야의 마음 한구석에서

숨죽여 지내는 어떤 의식의 깨어남으로 인한 것이었다.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는,

315의 그 용암빛 행진과 함성, 그리고 김춘수의 시 '베고니아 꽃잎만큼이나'의

마지막 구절이 내 안에서 되살아 그러했을 것이다.

 

남성동 파출소에서 시청으로 가는 대로상에서

또는

남성동 파출소에서 북마산 파출소로 가는 대로상에서

이어졌다 끊어졌다 밀물 치던

그 아우성의 노도를....

너는 보았는가.... 그들의 앳된 얼굴 모습을....

뿌린 핏방울은

베고니아 꽃잎만큼이나 선연했던 것을.....

 

아득히 오래전 1960년 3월 15일 마산의 의거를 전후하여 학야는 하늘같았던

아버지가 노한 민중들의 분노와 돌팔매질의 표적이 되었던 상황에 젊은

고뇌를 맛보았고, 급우 김용실의 죽음에 슬퍼했었다. 그 후이래 그 시

'베고니아 꽃잎만큼이나'가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 들어와 있었다.

빚진 자의 몫은 어느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있거나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는 아들로서 사랑하는 당신의 선택을 변호하지 않는다.

거기에 어떤 명분을 달거나 변명하지도 않는다. 지금도 학야는 눈에 선한 당신의

마지막 삶의 자세를 속으로 늘 닮고 싶어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특별한

어떤 종교적 귀의의 몸짓 없이, 몸도, 마음도 평소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였던

아버지가 보기에 좋았던 것이다. 육체적 통증을 이겨내려는 명료한 의식 아래

초라하나 담담한 자세로 생을 마감하는 그 마지막 순간의 아버지가 용기있어

보였다.

 

유년기에는 그 작은 바다에서 아버지의 등에 붙어 물 위에 뜬  유영의 가슴 벅차오름을

맛보았고, 청년의 나이에 그 아버지의 어깨에 기대어 4년 이상을 그 폐결핵 병동에서

버티어 살아남았다. 지금 그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빚진 자의 측량할 수 없는

슬픔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무거워진 빚진 자의 몫이다. 그의 긴 투병 중에

아버지가 뒤에서 굳건한 버팀목이 되지 않았으면, 그 숲속 요양원의 키다리 춤쟁이나

귀먹은 곽씨처럼 그 역시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해졌음에 틀림없다. 그들보다 더 먼저

하산하였을 것이다. 그때 그런 하산은 살아남을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창동의 불종거리와 남성동네거리는 언젠가부터 내 삶의 중심축이 되었다.

여행자로 이 산 저 바다 건너 낯선 땅을 맴돌다가도 결국은 내심 그 안에서는

항상 한 모퉁이 자리에서 소리 없이 머물렀던 그 창동으로 되돌아왔었다.

그리고 혼자 마음으로 부르는 화가들의 골목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남성동 우체국 앞 골목이 그곳이다. 그 골목의 빛바랜 붉은 벽돌과 하얀 선이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는 남성동 성당 벽을 한 손으로 대보며 몽상의 산책을

혼자 누리는 것이다.

 

이 좁은 길은 유트릴로의 그림 속처럼

진한 잿빛일 때가 제일 회화적이지.

원근감이 깊어 더욱 그렇지.

최운이 살아 있다면 여기를 게들의 행진으로 채우라고 유혹할 건데.

현재호를 슬쩍 끌어들이면, 모르긴 해도 그는 이 벽을

좌판대를 앞에 둔 어시장 아낙들의 젖가슴으로 채우고 싶어 할 거야.

 

윗길 학문당 뒷벽의 그림사진으로는 부족해.

화가가 물감통을 들고 붓을 직접 휘둘러 그려야

제대로 되는 벽화가 되지.

오 헨리가 그림을 좀 아는 작가였다면,

그 술쟁이 화가로 하여금 마지막 잎새를

그렇게 그리게 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게 묘사나 재현이 아닌 참된 그림이었다면,

이야기속의 환자를 한층 더 감동시켰을 텐데.

그게 어디 그림이야,

사진이지.

그림은 화가의 손에 남기고

죽어 떠나는 존재적 이야기는

시인에게나 맡길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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