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교당의 선물
1.
창동의 예인 고당 김대환은 나이 80에 이르렀지만 지금도 그는 평소 오전 한 차례 붓과 씨름하는 일에 몰입하는 집중의 시간을 갖는다. 그 시간엔 그의 마음은 순수 그 자체이다. 혼자만의 붓 작업 시간엔 다른 세속의 일에 무심하다는 의미이다. 나이를 벗어난 그의 동안과 좋은 건강을 놓고, 혹자는 그가 자신이 그린 그림 속의 기생들과 어울리며 노래 불러 그렇다고 하는 이들도 있고, 혹자는 그가 매일 오전에 홀로 맞이하는 그 집중의 순간들로 인해서 그럴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교당 선생하면 떠오르는 것이 그의 미인도이다. 홍안의 얼굴에 맑고 기운 찬 교당의 얼굴은 평생을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살아온 탓이리라. '그가 그려 내는 미인도는 곱고 단아한 여인의 모습이 정갈한 한복과 잘 어우러져, 전통적인 아름다운 한국 여인상이 재현적으로 담겨 있는 그림이다. 그를 좋아하는 어떤 이들은 '이 시대에 진정한 한국 전통의 미인상을 찾기 위해서는 교당의 미인도를 보아야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그림 그리기와 관련하여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60여 년에 걸친 내 화폭 위의 여정은 결국 미의 추구로 귀결된다. 화가의 눈으로 보는 세상엔 아름답지 않는 대상이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동물, 인물, 세상만사 심지어 세월이 묻어나는 주름진 노인의 이마에서 어린아이의 두 볼에 이르기까지 그럴 것이다. 하물며 고운 미인의 자태는 달리 말해 무엇하겠는가?'
학야는 창동의 이 예인과 함께 술자리에 앉으면 머리가 가벼워지고 기분이 좋아졌다. 티 없이 깨끗한 이를 드러내고 웃는 얼굴과 상대에 대한 배려의 심성 탓일 것이다. 더욱이 그와 정자봉님과 더불어 나눈 창동 만남은 의미 있는 저항의 시간이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자신도 모르게 몸에 스며들기 시작한 개인적인 삶의 덧없음에 대한 저항이 그것이었던 것이다. 그를 만나면 언제나 내 의식의 흐름에 물결이 인다. 창동에서 장자봉과 함께 술잔을 들면 삶의 출렁임을 느낀다.
그와는 10년 이상이나 두터운 우정을 나누는 사이이다. 한 번은 미국 여행 중인 학야에게 교당이 한지그림 한 점을 우송해 준 적이 있었다. 먼 땅에서 여행경비에라도 보태라는 뜻으로 보내준 기생춤 그림이었다. 학야는 그 그림을 현지의 화방에서 표구한 즉시 그 도시의 유명한 플라멩코 댄서에게 선물하였다. 그때 학야의 마음은 온통 플라멩코와 그녀에게로 쏠리고 있었던 때였다.
그 그림 선물로 인해 학야는 그 댄서로부터 귀한 이방인 손님으로 대접받게 되었고, 그 이래 학야가 스페인의 플라멩코 춤에 (몸이 아니라 눈과 마음으로) 죽 몰입하게 된 운명적인 계기가 되었다. 학야는 그때 포틀란드의 도심에 머물고 있었던 여행자였고, 30대의 그녀에게 그는 낯선 동양인이었다. 그 플라멩코 무희는 그 선물에 얼마나 기뻐하던지!
그 한 달쯤 후 그 그림 한 점이 내게 가져다준 그 희한한 인연의 플라멩코 공연이 펼쳐지던 날, 낯선 땅의 도심의 극장 무대 위에서 김민기의 노래 '아침이슬'이 플라멩코 기타 곡으로 편곡되어 스페인어 노래로 불리게 되었고, 학야 자신도 그곳 미국인 관객들 앞에서 그 노래를 한국어로 부르게 되는,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감동을 맛보게 되었다. 아래는 그 공연 다음 날 학야가 LA의 한 교포 친구에게 보낸 그 순간의 들뜬 마음을 담은 편지이다.
'아래'
S형!
.......
나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던 것 같소. 어제 그 아이레 플라멩코 공연에 나의 가족 친척 누구 한 사람이라도 왔었다면, 적잖이 감동받았을 거요. 미국 전역이 911 뉴욕의 테러사건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던 터라 이 공연은 걱정 속에 가까스로 개최되었소. 우려 속에서나마 이곳 브로드웨이의 소극장 홀이 관객으로 꽉 차게 되었고, 공연 내내 춤과 기타 연주에 보내는 객석의 박수와 갈채가 끊이지 않았다오.
이 무대는 플라멩코 춤과 한국의 한 노래 '아침이슬'의 만남이 특별히 부각되어 있어 내게 더욱 소중한 체험이 되었던 것이오. 이 곡이 집시의 노래 플라멩코 춤으로 펼쳐지기 전 내가 이 곡을 미국인 관객들에게 우리말로 노래까지 부르게 되었으리라고는 아마 상상도 못할 것이요. 내가 얼마나 가슴이 떨렸던지 무대에 오르기 한 시간 전에 미리 준비해 두었던 독한 럼주에 펩시콜라를 섞어 무대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며 마셔 댔지 뭡니까!
포틀란드 트리분지에 난 아래의 기사를 동봉하니 LA 한국일보사 O 기자에게 이 내용을 한국어 신문에 기사로 좀 써 달라고 부탁해 주면 좋겠소. 그 기자는 나와도 아는 처지이니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요. 한국에서 이 아이레 공연이 개최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그렇게 부탁드리는 것이요. 공연무대에서 내가 관객들 앞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으로 소개되어 더더욱 나를 취하게 했다오.
내 부탁 가볍게 여기지 말기를!
학야.
2.
교당을 따라나선 거제 나들이! 이 섬이라면 학야에게는 그곳 여차의 노을빛 앞바다가 제일이었다. 망치리 마을의 화가 김복남의 화실에서 소나무 사이로 내려다보이는 시푸른 해안풍경도 그만이다. 이날 바다는 조는 듯 잔잔하고 해안길 위에 현저히 눈에 띄는 것은 비를 잔뜩 머금은 잿빛 하늘이었다.
한 모퉁이를 돌아설 때쯤의 바닷길에서는 창동의 한 술벗인 변상봉의 채색화, ‘어느 포구의 풍경’이 연상되었고, 멀리 바다 한복판쯤의 거가대교가 아득히 눈에 들어올 때에는 미국인 보헤미언 화가 휘슬러의 인상주의적 그림 Old batterSea 야경의 육중한 런던교가 번갈아 눈앞에 나타났었다. 이날은 교당에게서 먹과 붓으로 매화 치기를 배운 김병규가 오직 그를 위해 온 하루의 시간을 준비했었다.
그곳 포로수용소 유적지 관람도 셋의 거제 나들이 일정에 포함되어 있었다. 서예가 국정의 고풍스런 댁과 바다 위에 세워진 미완성의 웅장한 거가대교를 지나고부터 시야가 더욱 흐릿해진 빗길인데 교당이 그곳 포로수용소 유적지를 고집스럽게 찾아 나서려 할 때 학야는 조금은 뜨악했었다. 교당이 6.25 전쟁사에도 그렇게 관심이 많았던가. 오늘 월요일인데 혹시 그곳 전시관 문이 닫혀 있으면 어쩌지.
게다가 그는 달성 서씨 가문의 재실이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며 장목을 지나고부터는 낯선 마을이 나타날 때마다 차를 멈추게 하고는 야산의 지형을 살피며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한참이나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여기도 아닌 것 같아. 한 모퉁이 더 돌아야 나올 것인가? 아니야 그곳이 틀림없어. 아래 저만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이니 그곳이 맞는데. 이상하다. 이곳이 그곳인데. 그는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리기까지 하였다.
교당이 그 가문의 재실에 무슨 일로 그렇게 관심이 많을까? 그곳에 교당만이 아는 무슨 역사적 흔적이 숨겨져 있는 것인가? 더욱이 평소 화사한 익살의 표현과는 달리 이날의 소곤거림은 쓸쓸함이 진하게 배인 회상이었다. 거제도는 교당에게 젊은 한 시절 리얼한 밥벌이삶의 현장이었다니!
그는 20대 초의 나이로 생계를 위해 절이나 재실의 단청 작업을 한 일이 있었고, 6.25 시절엔 거제 포로수용소 입구에서 미군의 초상화를 그리며 돈을 번 적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일들이 아득히 먼 과거의 일들이 된 지금에 오히려 더 선명히 회상되는 모양이었다. 그는 젊은 날의 먼 일들을 그리움을 담아 내 귀에 소곤거려 주었다. 평소에는 남에게 숨기고 싶은 것을 들려주기라도 하듯 그렇게 소곤거리는 것이었다. 학야는 그의 회상의 소곤거림을 따스하게 감싸 주고 싶어 아래의 말로 대답하였다.
화가의 손이 그 기능적 차원을 뛰어넘어
스스로 하나의 명수가 되기까지에는
험한 수련의 긴 과정을 거치는가 봅니다.
박수근 선생도
6.25 시절 서울에서 생계로 미군의 초상화를 그렸답니다.
그것도 많이요.
김홍도의 춘화를 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답니다.
대감댁 노부인이 머리는 한 짐 가득히 치장한 채
남편과 성적 희롱을 나누는 그림이었습니다.
속치마 사이로 할머니의 아래가 다 드러나 있었습니다.
대감의 표정이야 근엄하지요.
어떻게 김홍도가 저런 표현을 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당시 돈 많은 중인들이 저런 그림을 주문했던 모양입니다.
신기하기까지 하던데요.
교당은 생계를 위해 마산 창동 근처의 강남극장에서 영화 광고 그림 그리기를 했었다. 그때 그를 아끼던 문신 선생으로 '너는 그림은 안 그릴 작정이야, 그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화가가 될 수 있겠느냐?' 하는 핀잔을 받을 때마다 입었던 내면의 서러움의 상처도 안개 자욱한 이날의 그 나들이 길에서 내게 귀속말로 들려주었다.
지난날 학야는 포틀란드 여행 중에 교당과 서신 교환을 한 적이 있었다. 그가 교당에게 여행자로서의 들뜬 마음을 담은 아래 편지를 보냈고, 교당은 그의 채색화 '춤추는 기생' 한 점을 회신 속에 넣어 보냈다. 그리고 그 한 장의 채색화가 학야의 삶을 그렇게 플라멩코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게 했었던 것이 아닌가! 아마도 마크 트웨인의 톰 소여의 이야기나 존웨인이 등장하는 서부 영화에 익숙한 교당이었던지라 학야의 아래의 이 편지는 그에게 미국 땅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으리라.
교당에게! ....... 제가 지금 20대의 한 독일 여성 유학생과 10평 남짓한 한 소형 아파트에서 커튼보다 더 나을 것 없는 천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함께, 외형적으로 마치 비밀스런 남녀사이인 것처럼, 동거해 오고 있다면 이걸 믿으시겠습니까? 그것이 제게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독신자나 신혼부부를 위해 설계된 원룸 아파트 형태의 좁은 공간에서 그 발랄한 여대생과 칸막이 커튼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나누는 아슬아슬한 동거를 누리고 있습니다. 침대가 있는 저쪽 공간은 그녀의 것이고, 이쪽 공간, 다시 말해서, 벽장 안에 간이침대가 들어 있는 그 반쪽 공간은 내 몫의 방입니다. 출입구 쪽의 좁은 욕실 겸 화장실 그리고 부엌은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부엌 한곳에 놓인 전화도 공용입니다. 이곳에서 처음 며칠 동안은 가슴 두근거리며 두 귀를 쫑긋 세운 채 밤잠을 설쳤습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환갑을 바라보는 내가 20대의 젊은, 큰 키와 풍만한 몸매에 그리고 피부가 백옥 같은 이국 처녀와 칸막이 하나를 사이에 둔 채 일인용 아파트에서 단 하루나 이틀이 아니라 근 한 달이나 함께 살고 있는 이 기묘한 상황을! 아쉽게도 이 아슬아슬한 달콤함도 내일모레면 끝입니다. 그녀가 중남미로 장기 여행을 떠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 말로는 미국 생활도 이게 마지막이라더군요. 거기서 곧장 고향인 독일의 드레스덴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요. 여행 중엔 예측할 수 없는 일과 만나게 되나 봅니다. 그 동숙자가 새벽별처럼 사라졌을 때 그녀가 남긴 빈 공간으로 인해 나의 허전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그 아린 속을 털어놓아야 될 것 같아 교당에게만 이렇게 저의 속을 털어놓고 있으니 저의 이 비밀스런 일을 혼자만 간직해 주십시오. 그걸 집사람에게 들켰다간 영영 집에 못 돌아가게요? 학야
3.
교당과 함께 나섰던 거제 나들이 길에 서예가 국정 선생이 학야에게 큰 글씨의 한자 박학 '博學' 한 점을 써 주었다. 화선지를 앞에 두고 뭘 쓸까 하시더니 학문을 넓히라는 뜻으로 그렇게 썼다고 했다. 동행자 김병규에게는 '예술을 사랑하다'의 예애 '藝愛'를 썼다. 국정이 두 사람을 향해 사의'寫意'로 할까 했으나 둘이 그 뜻을 얼른 알아차리지 못하자 '무슨 글자를 쓰면 좋을까요?' 하고 다시 물었다. 예애는 어떤지요 하고 학야는 깊은 생각 없이 대답하였다. 처음엔 '애예'라고 말하려다 어감이 '앞뒤 순서를 바꾼 예애'보다 못한 것 같아 그렇게 대답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寫意는 무슨 의미입니까?'
'뜻을 그리다.', 뭐 그런 뜻이지요. 완당 김정희의 문인화 '세한도'가 생각나 그렇게 쓸까 했었지요. 소나무가 있고 엉성하게 보이는 집이 한 채 있고 나무가 두 그루 보이는 그 문인화는 절말 완당의 걸작품입니다. 아시겠지만, 그 그림은 그림만이 아닙니다. 그림에 글씨에 그 글뜻, 그 셋이 합해서 삼위일체가 되어서 그렇습니다.
학야는 국정으로부터 얻은 뜻밖의 귀한 선물, 큰 글씨체 '박학' 한 점과 그의 서첩집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집에 돌아온 즉시 그분에게 몇 자 글을 서신으로 쓴다.
국정 선생님께!
선생님의 장목고옥이 눈에 선합니다.
집 마당의 노송 한 그루,
와상의 인물 조각처럼
팔베개하고 누워
아래쪽으로 시선을 던지는 곳에는
물안개 자욱한 장목포구가
잠자고 있었습니다.
국정과 교당, 두 분은
거실 바닥에 놓인 화선지를 사이에 두고
묵향의 우정을 나누고,
나그네는
뒤편에 앉아
몰래 훔쳐보는
두 예인의 옆모습에서 향기를 느꼈습니다.
교당의 일필로
세로로 긴 화선지 위에
포대 화상 한 점이 형태를 띠기 시작할 때
나그네는 무척이나 궁금했습니다.
너무 큰 여백으로 남은 화선지 윗부분이
무엇으로 채워질까 하고 말입니다.
속으로는 실망까지 했습니다.
교당이 태연히 낙관까지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일필이라고 해서 저렇게 제멋대로 균형을 잃어도 되는 건가
그 여백은 나중 국정의 서체가 담길 공간임을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예인들 간에는 그런 배려도 있었습니다.
서예가와 화가가 서로 나누는 묵향의 우정을
곁에서 지켜본 것이나,
둘 사이의 수화가
그렇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이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부끄러운 말이지만,
제게는 그날이 처음이었습니다.
지난 몇 년간 창동은 내겐
세 사람이 모여 술잔 나누던 일종의 정자이었습니다.
강변 언덕은 아니더라도
소나무 그늘 아래가 아니더라도
그 자리는 사는 맛이 향긋해지는 놀이터였습니다.
한 분은 그 표현이 수필의 흐름 같고,
다른 분은 그 끊이지 않는 창동 야사가 얼마나 운율적이었던지!
게다가 저는 남다른 귀를 지니고 있거든요.
섬머세트몸의 경구 한마디에,
창동 골목의 희한한 기생집 일화에,
나의 두 귀는 언제나 쫑긋해졌으니까요.
지금은 제겐 교당이 더더욱 소중한 분입니다.
그 다른 한 분을 잃었거든요.
셋이서 술잔 나누던 그 자리에 더 이상 나올 수 없게 되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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