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산문

미인도화가 교당 9

jhkmsn 2014. 9. 30. 09:15

            3.회상의 개울  

 

1. 어둠과 섬광

 

대개 숲은 이성적 사고를 , 대신에 바다는 감성과 동경을 키운다.

교당은 바다에 친숙하다. 그는 이성적 사색이나 서구적 논리에

보다 직관에 친숙하다. 그가 사춘기를 보낸 곳이나  그 후 평생을

살아온 곳도 해안이다. 그는 소년기를 회상할 때  대분시의 바다와

그 곳에서 함께 놀던 동무,'깜치'를 자신도 모르게 떠올린다. 

자신의 아득한 날의 소년기 회상의 글을 보면, 그는 그 때의 바다를

의식적으로 떠올리는 게 아니라, 눈만 감으면 그 바다가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

 

해방되던 해 청년 김대환이 일본에서 귀환동포로 귀국하여 마산에

정착한 지 얼마않아 한쪽 눈을 잃게 되었을때 그 당황스러움이

어떠했을까? 그리고 의료 시설이 더 좋다는 일본으로  밀입국까지

하였으나 그 실명은 돌이킬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의 그

절망감은? 그러한 상태에서 청년 김대환은 일본인 동양화가

목교당을 만나 그에게서 먹과 붓을 다루며 사군자 치는 법을

배우면서 그 절망감을 이겨내기 시작했다면서, 그후 20여년이

지난  1969년에 마산 창동에서 미인도화가로서의 첫 개인전이

열리게 되었다면서, 지금도 그 절망의 순간에 목교당을 만난 것이

자신의 삶의 진로에서 보이지않는 전환점이었다고  회상하였다

 

필자는 그 때 뜻밖에도 자신의 경우를 연상했었다. 22살의 청년기에

폐결핵으로 몇 년간을 요양원에 묻혀, 언제쯤 회복되리라는 희망도

없이 병실 침대에 그냥 누어 매일 매일을 보내던 시절에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을 읽고 읽었던 때를 떠올렸다. 나의 경우, 그 절망의

늪에서 그 '마의 산'을을 몇 번이나 읽어가며 ,내가 살아 세상에 다시

 나가면 ,그때는 글쓰는 사람이 되어야지 하였었다.그런 막연한 소망이

그후 30여년이 지나 쓴 자전적 산문의 글, '구강의 마다'의 발간으로

이어질 줄은 그 전에는 생상도 못했었던 일이다.

 

 우리들에겐 살아가는 동안 삶의 진로에 미치는 획기적인 사건들을

만나게 되지만  그 순간에는 그것을 잘 느끼지못하고 지나기 마련이다.

어떤 사건이 자신에게 삶의 전환점이 되었음을 깨닫게되는 것은

그 후 많은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다. 그것은 교당에게도, 나에게도

그러했었다.  삶의 어느 순간에 일어나는 어떤 절망과 어떤 셤광, 

그  둘 사이에는 끊어지지않은 어떤 연길 고리로 이어져 있었음을 

깨닫게되는 되는 것은 그 이후 아득히 지난 다음의 어느 시점인

것이니....

 

 

 

1.어둠과 섬광

 

해방되던 1945년까지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살아 온 김 김동준과

부인 박상금은 딸 넷 다음에 어렵사리 다섯째이자 막내로 얻은

아들 대환이 세살쩍부터 특별한 손재주를 보이는 게 신통하였다. 

말도 채 배우지못한 세살박이 아들녀석의 놀이라는 게

안방이건 청마루이건 손에 든 필기도구로 벽이란 벽을 온통 

그림낙서로 채우는 것이었다. 누나의 도화지 그림들을 흉내내는

낙서놀이가 다른 놀이보다 더 어린 아이의 마음을 더 사로잡았던 것이다.

그림낙서가 점차 더 익숙해지면서 어떤 낙서는  그의 누이들에 보기엔

곡선과 여러 점들로 이루어진 형태가 얼핏 제일 큰 누나의 얼굴을 

연상케 하기도 하였다.그런 특별한 놀이를 좋아했던 아린애가 자라 

소학교에 다니는소년이 되었을 때 그는 자연스럽게 미술과목을 

제일 좋아하였고, 소학교 4학년이 되던 해에는

<전일본어린이 크레파스 대회>에 출품하여 우수상에 입상하는 재능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가 17세 청년으로 귀국하여 마산에서 살게 된지 일년이 지난

1947년에 마산 창동의 마산 백화점(현 한일은행자리)에서 개최된

제1회 마산화가회전에 그의 그림을 출품함으로써 지역의 여러

화가들에게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기회도 얻었다.

다른 청년화가들, 이른바 문신,이림, 임호 등과 함께 그 전시회에

참여했었다. 마산화가회전에 그 나이에 출품한 것은 그의 유년기의 

특별한 재능이 그대로 살아 이어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때 그를  그 전시장으로 이끈 사람은  마산의 아마추어 화가였던

고 전상돌(마산미협의 박춘성화가의 자형)이었다.

그는 나이 어린 청년 김대환의 그림솜씨가 보통이 아님을 느껴

그의 지인 화가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가 그를 따라

그 전시회에 참여한 데에는, 아마도 낯선 화가들의 그림에 대한

그의 호기심에다, 그들보다 내가 못할 게 뭐 있겠는가, 라고  하는

젊은이 다운 우쭐함도 작용하였으리라. 마산미협 50년사(1988년 발행)의

한 페이지에 신통하게도 그때의 김대환 이름 한 줄이 기라성 같은

저명 화가들 사이에 기록되어 있었다.

 

다시 교당 김대환의의 소년기로 되돌아 가보자. 그는 지금 여든

중반에 이르기까지 삶의 대부분을 해안도시 마산에서 보내왔지만, 

소년기에 늘상 자신의 곁에 있었던 일본 대분항의 바다가

지금도 그의 눈에 선하고 ,청년기에 그의 마음에 화업의

길을열어 준 일본인 스승 교당이 가슴에 남아 살아 있다.

일어 표현이 지금도 자연스러운 그는 1929년 3월 3일 일본 구주

대분현 대분시에서 가족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한 막내이자

네째 외아들로 태어났었다. 그리고 일본 땅에서  일본인 소년들과

함께 자랐다. 그의 부친은, 한일 합방기였던 당시 조선인들

상당수가 그러했듯이, 고향땅에서보다  노임이 더 나은

일본으로 건너와  대분시에다 근거지를 마련한 조선인이었던 것이다.

 

  :선생님, 60후반?중반의 나이임에도  소년기의 일본땅의 그 대분 항구가 

눈에 생생합니까?

(*정리요) :머리속의 그 영상만은 늘 살아 움직인다니까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뚜렷해지지요.열 두세살 무렵이었던가.

장마가 걷힌 오랜만의 맑은 오후 나는 근처에 사는 친구  

깜치(깜둥이)와 함께 수영하러 집을 나섰다. 벱뿌만에 떠 있는

조그만 오이따항의 잔교를 빤스만 입은 벌거숭이로 달렸다.

집에서 800미터 정도에 있는 항구는 규모는 작자만 오사카를

오가는 세토나이카이항로 마지막 귀착항구로 비교적 큰 여객선이

왕래하고 있었습니다. 스미레환, 무라사끼환 등등 일급기선들이 말입니다.

그때가 1940년 여름으로 소위 대동아전쟁 초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조선(당시는 반도라고했다)에서는 징용으로 청장년들이 뒤를 이어

일본 각지로 끌려오고 있었다. 소위 내지 (內 地-일본열도)에

온 반도인들은 고향 친척으로부터 누구가 어디 어디의 무슨 공장으로

또는 어디 어디의 탄갱으로 하며 친척의 소식을 듣고  암거래 쌀이나

배급식품을 들고 찾아다니며 위로하는  연구자들이 분주하게 마음쓰는

고생의 시대였다.그러나 우리 어린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아무관계도

없는 일인양 철없이 덤비고들 있었다. 다만 그 무렵 항구를 출발하는

배가 있을때는 부라스밴드가 연주하는 이별의 왈츠 멜로디가

난무하는 테이프 토막에 섞여 한층 출항의 분위기를 고조시키던

그 때 그 장면들이 소년서절의 그리운 추엇 꿈속의 드라마 처럼

이따금 뇌리를 어지럽힐 따름이다.

                                

 

교당에게는 20세의 나이에 미래의 삶의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한 순간이 있었다. 빛의 상실이 주는 깊고 두려운 어둠 그리고  뒤이은

새로운 한 줄기 섬광의 명멸! 그렇지만 깊히 들여다보면 그 섬광은,

닥친 절망적인 짙은 어둠 뒤에 찾아 온 내면의 그 불빛 번쩍임은,

스스로의 의지로 밝힌 것이었다. 그 결정적인 순간은, 오랜 후 아련한

마음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잠깐 반짝이며 사라지는 들판의 반딧불

같은 것이겠지만, 그 청년의 곁에서 그를 지켜본 관찰자의 시선이라면,

한 순간의  깊은 절망감,  견딜 수 없는 슬픔의 방황에 이어 일어난 특별한 

체험의 과정으로 보일 것이다.김대환은 그 나이에 마산에서 한쪽 눈을

치명적으로 다치게 되고,  그 다친 눈을 고치기 위해 의료기술이 좋다는 

일본으로 밀항을 감행하였으나  그 실명은 거기서도 치유할 수 없는

상처로 진단받은 시점에 찾아 간 일본인 서화가 목교당과의 만남으로

이어진 과정이 그것이다. 

 그 섬광은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다른  숱한 체험적 요소들의 퇴적

속에  빛을 잃지않은 광원으로 묻혀있던 중 어느 시점에  홀련히

그 퇴적층을 뚫고 새어나와 그 광채를 다시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나이 41세에 가진  첫  개인전이 그것이었다.  청년기의 그 잃음의

상처와 얻음의 반짝임의 그 행운이후  무려 20년만의 일이었다. 극장의

영화 광고판 그림작업에서 벗어나 그가 늘 마음으로 원하던 자유로운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엇다. 1969년 10월 창동의 한성다방에서

가진 그의 첫 전시회가  곧 그 길의 첫 결실이었다.

 이제 그는 자유로운 화가의 손으로 미인도를 그리고 영모화 등을

그려내었다.그맇지만  교당의 그 길은 고갱의 의지적인 전환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고갱이 직업 은행가에서 전혀 새로운 삶인 화가의 길을

선택한 것은 현실에서 꿈으로서의 의지적 결행으로서 치명적인  선택이었다.

꿈의 길로 나선 댓가는 현실적인 안정된 삶의 상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반해 교당의 경우는 누에고치속의 번데가 껍질을 벋고 나비로 태어나는

순리적인 탈바꿈 같은 것이었다. 그가 무려 20년 이상을 간판 그리기로 얻은

생활의 안정감이 전업화가로 나섰다고 해서 그의 현실적인 삶이 흔들린 것이

아니었다. 화가로서의  낙관이 찍힌 그의 미인도나 달마그림이 간판그리기 일

대신  생활의 믿바침이 되었다는 뜻이다. 간판 그리기로 살아 온 그 기간이

단순한 밥벌이의 방편을 넘어 일종의 긴 수련기이었을 것이다. 그 기간 내내

그 길은  붓과 물감을 든 손의 단련을 위한 길이기도 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교당을 보면 우리들에게 친숙한 몽마르트 시절의 로트렉이 연상된다.그가

남긴 일련의 명화들은  하나 같이 그가 연극이나 캉캉 공연의 홍보물로 그려진

그 여주인공의 모습들인 것이다.

 

김대환이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지 몇 년 후  20살때 불행하게도

한쪽 눈의 실명,그 눈을 고치려는 일념아래 감행한 일본 밀항, 화가 목교당을

스스로 찾아가 그의 문하생으로  몇달간 본격적인 그림공부에 전념하게된 것

등 이른바 20세 전후의 그에게 일어난  치열한 삶의 궤적은 결과적으로 그를

운명적으로 화가길로 이끈 마음의 등불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 거기서 17세의 청년기 초기까지 살며 교육받았으므로

그 후 마산 사람으로 이 지역에서 살아오는 동안에도 그의 몸과 마음에는

  일본의 문화적 흔적이 적잖이 배어있었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 점은 화가로서의 그에게 어떤 점에서는 긍정적인 요소로도, 다른 점에서는

부정적으로 요소로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예컨대, 그의 그림에서는 왜색이

느껴진다는 세간의 비평이 그 부정적인 요소의 하나일 것이다. 그는 해방이

되면서  부모님 따라 일본을 떠나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귀환동포로서

마산에 삶의 터를 정한 부모님 곁에서  청년 김대환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홀로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그리기를 독습하면서 집안 살림을 도왔다.

그런 삶이 청년 김대환에게는 점점  일상의 일로 익어지고 있엇다.

그렇지만 그  삶을 송두리채 뒤흔던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어느날

간판점 일터의 동료들과 점심식사를 하던 중 사소한 언쟁이 불씨가 되어 

격렬하게 싸움질하는 두 동료를 말리다가 그만 친구 손에 들린 가위에 

왼쪽 눈을 다치게 되었고 치료시기를 놓쳐 그만 실명위기에 처하였던 것이

그것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그러한 불운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그 상황에서 무조건 밀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향했다.

일본의 선진 의술의 힘을 빌려야겠다는 절망적 몸부림에서엿다.

당시 밀항선은 내해의 고깃배에 불과한 쪽배인지라 밀항한다는 것은

쪽배로 바다와 12시간의 사투를 벌리는 일이었다.

그는 무산 영도에서 밀항선을 타고 그렇게 일본 좌세보 항에 밀입국해 

대분시에 살고있는 셋째 누나댁으로 찾아 갔었다.

당시 그의 나이 20세였던 1948년 무렵이었다.

 

 해방후 귀환동포로 부모님을 따라 귀국한 지 불과 4,5년 밖에 되지

않아서 였다.  혼자서 다시 그가 17년이나 살았던 대분항으로 숨어

넘어간 것이다. 고깃배 크기의 작은 기관선으로 현해탄을 건너는 데

무려 12일나 걸린 필사적인 밀항이었다. 마산의 평안안과에서도,

부산의 김상룡안과에서도 치유할 수 없는 상태로 진단받은 상황에서

청년기의 그런 만용을 감히 실행에 옮긴 것은 오로지 실명 상태의

 한족 눈을 고치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곳 일본의 의료

기술아래서도 그의 눈은 더 이상 고칠 수 없었다. 그는 결국 한족 눈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그 때 그런 절망의 마음을 이겨낸 것은 그가

80살의 일본인 서화가 목교당을 만나고서였다. 그의 문하생이 되어 

그림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그의 문하에서 그림 그리기를 배운 게 

1년이 채 되지않은 기간이었으나 그 일본인 목교당과의 만남은 그에겐

운명적인 것이었다.

 

그는 청년기에 ,육신의 눈은 한쪽 잃었지만, 대신 마음의 눈이 새롭게 

열리게 된 것이다. 예상치못한, 화가가 될 수 있다면 하는 염원이 처음으로

그 절망의 고통을 진정시켜줌을 느끼게 된 것이다.지금 팔 순 노인의

그 소년같은 천진스러운 성품이 유년기의 가정환경에 의해 형성되었을

것임을 그 때의 가족구성에 비추어 좀은 느낄 수 있지만,

이에 더하여 절망의 순간에 처음으로 만난 노화가 목교당의 가르침이

그의 뇌리에 전류처럼 흐름을 느꼈으리라는 점도 유추된다.

노 스승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며,어린아이의 때묻지않는 천진함이

곧 아름다움이라는 스승의 비유적 표현을 마음에 새겼을 것임에 틀림없다. 

지금도 붓을 잡고 바닥의 종이에 마음을 모으는 교당은  

그 스승을  통해 사군자의 기초 배울 때 붓과 먹을 어떻게

사용해야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기억하고있다:

묵이란 농담에 따라 빗나기도 하고 담백하기도 하며

사물에 따라 엷기도 하며 깊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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