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산문

미인도화가 교당 7

jhkmsn 2014. 9. 30. 08:57

             2. 교당의 그림들

 

 

2. 도석인물화

 

a) 포대화상도

교당이 90년대 들어 자주 그려내는 포대화상은 자화상으로 그려진 것은

아닐까, 자신도 모르게? 그의 포대화상은 선한 얼굴에 이웃에 편안한

모습의 소박한 평범한 모습이다 그는 천성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는 사람이다. 그와 친교를 나누는 예인들을 만날

때는 그가 언제나 대접하는 편이다. 옛 화가 김명국이나 한시각이 그려낸

포대화상은 첫 인상에 높은 경지의 도인의 풍모를 보이는데 반해, 

교당의 인물은 걸인의 차림새에다 얼굴은  천진스럽기 그지없다. 얼굴

어느 곳에도 비범함의 분위기가 없다. 게다가 옛 화가들의 포대화상이

 핵심을 찌르는 간결한 필선의 단순한 어울림으로 표현되어있음에 비해

교당의 화면은 인물 묘사를 위한 붓질이 너무 많다. 자세한 묘사가 오히려

화격을 떨어뜨리고있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포대(布袋)란 후량(後梁)의 한 고승으로 늘 작대기에 포대, 즉 자루를 메고

다니면서 무엇이든 동냥한 것을 그 속에 담곤 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별명을

얻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 포대화상은 배가 나오고 대머리이며 때로는

호탕하게 웃고, 때로는 거칠면서도 선종에 명석하였던 인물로 미륵보살의

현신(現身)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는 10세기 초에 죽었다고 알려졌는데,

그가 죽은 지 얼마되지 않아서부터 벌써 그의 초상을 그리는 것이 양쯔강과

저장(浙江)지방에서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시각의 포대화상도가 현존 유품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하였다

이 그림에 묘사된 포대는 약간 비껴진 모습으로 짧은 수염이 나 있고 자루는

막대기에 붙잡아 매지 않고 직접 어깨에 메고 있다. 그리고 배는 튀어나와

있지 않고 허리띠로 묶어져 있다. 앞서 언급한 포대의 이미지, 이른바

둥글고 부드러운 얼굴에 뚱뚱하게 튀어나온 태고(太鼓)를 두드리며

너털웃음을 짓고 천하태평의 호인상을 지닌 포대상과는 차이가 있다.

한시각의 경우,윤곽선은 짙은 묵선으로 간결하게 처리하여 선종화 특유의

감필적(減筆的)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작품으로 이와 유사한 포대도

2점이 더 알려져 있다.

 

b)달마도

이 지역의  이 곳 저 곳 상점에는 그의 달마도도 눈에 띈다.

달마도엔 어떤 영험한 기운이 나온다고 여기는 세상 사람들이

달마도를 집이나 가게에 걸어놓고 싶어한다. 선승이나 이름난 화가들의 

달마도 작품에 탐을 낸다.퉁방울 눈, 주먹코, 툭 튀어나온 이마와 두광,

거친 마대옷 차림...그리고 선명한 안광.이런 인상착의의  달마상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우리들은 김명국을 통해 달마에 친숙하다. 9년동안 면벽으로

수행했다는 달마대사의 초인적인 집중력, 깨달음의 표정이 그러하리라

믿는다. 달마의 대부분의 그림은 눈동자가 한쪽으로 집중되어 있어

직관과 집중의 힘을 보여준다.교당의 경우엔 달마의 진지한 표정에 촛점을

맞춘 듯 하다.저 무서운 집중력은 어뗗게 가능했을까?

그토록 강한 집중력으로 정진할 있었던 심지는 대체 어떤 것이었을까?

김명국의 달마도를 보면 거침이 없고 군더더기가 없다. 본질이 아닌,

 바탕이 아닌 온갖 부차적인 것들은 모조리 떨구어 낸 순수한 형상들이었다.

몇줄의 짙고 옅은 먹선이 대상의 강력한 의지와 고매한 기상들을 어찌

저토록 선명하게 표현으로 승화될 수 있을까? 그런데 저 얼굴의 의지와

기상은 원래의 인물의 것인가 아니면, 화가의 창조적 상상에 의한 것인가?

교당의 경우, 그는 아마도 달마의 인내의 긴 수련과정에 그의 상상이

모아진 것 같았다. 간략한 필선들이 만들어낸 엄숙한 표정, 수행자 인상의

진지한 눈빛, 게다가 굳게 다문 입술에서 그렇게 느껴진다. 모르긴 해도,

화가로서의 그의 특별한 체험 내부에서 어떤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으로

숙성되어 나타난 결과물이리라.

 

0월 0일

수문형!

 

교당의 여러점의 달마도 중에 특별히 시선이 멈추는 그림이 있기에

한 참이나 바라보았습니다.수묵의 간결한 선과 점으로 그려진  

달마도로 눈빛의 집중력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현자의 정신적 집중과 깊이감을 맛보게하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그림의 상단부분에 쓴 제발자의  큰 글씨의 '인' 가

내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저건 어느 서예가의 글일까?

글씨와 그림이 제각기 독림적이었습니다.

그림은 그림대로 달마의 정신적인 특징이,글은 글대로 忍에 담긴

교훈적인 점이 서로 평행선을 긋고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서화의 어울림은 교류의 멋과 정취가 우선입니다. 이 달마도의 경우,

그림과 글은 판소리와 고수의 어울림을 가져야 제맛일 텐데,

눈에 띄게  서로 개별적이었습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이중주에서도 개성이 잘 드러나야하는 점도

중요하지만 제일의 강조점은 두 음색의 어울림에 있습니다.

그 달마도의 그림과 글체에는 두 예인간의 부조화였습니다.

한 마디로 시적 정취의 부재였습니다.글자의 교훈적인 뜻만 의미를

담고있을뿐 시적 운율이 느껴지지않았습니다..

화면위의 리듬과 교뮤의 아름다움을 위해서서는

글과 그림사이의 강약, 고저 그리고 시작적인 크고 적음으로 하여

글은 그림을 배려하고 또한 그림은 글을 통해 더욱 향기가 짙어지고...

그랬어야 하는건데. 그런 점에서 忍자는 달마도를 살리지 못하고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창동의 양지집에 걸린 다른 달마도에서는 忍이 진하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좀 더 가까이 다가서 보니 그 글체는 교당 자신의 것이기에

한 참이나 머리를 갸웃거렸습니다. 그 자신도 일부러 그런 교훈적인 요소를

강조하기 위함인가? 저건 俗에 너무 가까운 붓놀림이야,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그는 자신이 예술성보다 자신의 달마도를 집에

걸어두고 싶어하는 고객(?)의 눈과 마음을 더 소중하게 여긴 탓이었습니다.

단골의 발길이 뜸해질 때에도, 주정뱅이 손님이 소주 한병 차고 앉아

일어날 줄 모르는 상황에 처하게 될 때,

또는 시비를 거는 불량 손님을 달래야하는 상황에서 그 주인에게

절실한 것은 인 그 한마디 였을 것이기에 교당은 그 주인에게 줄 달마도에

특별히 그 마음을 쓸어주고 싶어 그 글자를 진하게 써놓았을 것입니다.

한 참후에야 그 점을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또 연락하겠습니다.

 hy 

 

c) 500인 나한도

교당은 500인의 나한들을 제 각기 다른 개성의 얼굴로 그린 대작을

나이 80을 넘긴 나이에 창의적으로 그려내었다. 나한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달은 성자를 가르킨다고 하는데, 그의 나한도 인물들은

언뜻 보기에 아직 깨달음을 얻기 전의 얼굴인듯 저마다 다듬어지지않은

타고한 심성이 얼굴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그 나한도 앞에서 수호지의 

인물들이나 소설 임꺽정 속의 산채 두목들의 얼굴이 연상되기도 하고,

그의 달마도나 포대화상을 닮은 얼굴들도 있다. 심지어 교당 자신의

얼굴까지도.

 

그 500 나한도는 그의  80수기념전 개최장인 대우

 대우갤러리 홀안의 사방 벽에 두루마리 화선지 가로로 길게

이어져 전시되어 있었다. 화선지위의 500인 나한들은 저마다

다른 얼굴, 다른 표정로, 그리고 시선을 제각기 다른방향으로 향한

채 그려져 있었다. 80의 나이에 저렇게 다양한 상상의 얼굴들을

창의적으로 그려내다니!  팔순의 중반에 든 교당의 변함없는

회화적 창의력에 신기하지 조차하였다. 그 작품은 손재주 만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었다. 왕성한 상상력과 기존의 어떤 형식상의

틀에 매인 것도 아니엇다. 나한의 얼굴들을 그림놀이를 즐기는

어린 아이의 손으로 그려내었다. 서예가의 혼신의 노역으로 쓴

길고 긴 두루마리 서예작품을 전시장에서 더러 대하긴하였으나 

특별히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들은 만나지 못하였다. 그 노역의

글씨에 담긴 것은 예술적 상상이 아니라, 깊은 종교적 신심이었던

것이었고, 그것은 상상을 낳는 예술성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어쨋거나 수묵의 달필로 인물 하나하나를 특징적으로 그려낸 그 500인

나한도는 한 화가가  온 마음을 화선지위에 쏟은  몰입과 상상의 산물이다.

그 그림을 대하면 평소의 그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 눈 앞에 그려진다.

그림을 그리기 전 먼저 뜻을 세우고, 전체적인 구도를 잡고

화면에 배치될 인물들 개개인의 표정을 머리속으로 떠올리고...

그런 몰입과 상상의 순간의 그의 얼굴은 진중하기 이를 데 없다.

그리고 그 인물들은 그 순간 그의 머리에 떠오른 수많은 인연의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목교당의 얼굴, 아버지의 얼굴, 그가

625전쟁중 그가 보급대 요원으로 봉사하면서 목격한 민간인

희생자들, 등등...

 불교에서는 누구나 불성이 있기 때문에 부처, 보살, '나한'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각자라는 점에서는 같다고 한다.

좀더 들어보니,중국불교의 나한신앙에서 나한이란 석가모니의 수기에

따라 미륵이 올 때까지 이 땅에 남아 불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이롭게하는

역할을 하는 불제자들이다. 나한은 하늘을 날아다니기도 하며 자유로이

변신이 가능하고 비를 부르기도 하고 수명을 연장할 수 있는 위력을

지니고 있다. 불 보살과는 달리 대부분 이 땅에 존재했던 수행승에서

출발하여 깨달음을 이룬 분들이므로 일반 중생에게 친근한 이미지로

인식되면서 일찍부터  많은이들의 예배 대상이 되어왔다. 고려시대의

나한신앙은 국가의 환난患難을 물리치기 위한 거국적인 소원이 많았던 반면,

조선시대로 들어서면 나한신앙이란 다름 아닌 부처님을 숭상하는 신앙이 될

 것이다. 일반 사찰에 가면 나한전에는 병든 남녀노소들을 어루만져 주는

좌상이 있다. 이것은 중생들의 아픔을 치유해 준다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빈두로 존자는 병을 고쳐주는 존귀한 자잉ㄴ데, 존자라는 말에서 존자는

존귀한 사람이란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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