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헤레스(jerez)에서 서편제를 보다.
2.
한국의 판소리 명창들의 소리나 집시 소리꾼의 칸테 둘 다 ,사실은
인체의 고막을 울리는 소리의 결과물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음이라는
물질성이 시간 위에 쌓아올린 정치로운 탑이라는 것이다.
전라도 방언들이 마주칠 때마다 일어나는 그 독특한 토속맛이
없다면 판소리의 소리나 아니리가 제맛을 낼 수 없듯이,플라멩코의
소리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안달루시아 지방의 집시방언이라야,
그 소리의 가사(copla)가 제맛 그대로 전달될 수 있다고 하였다.
문은 그들의 언어를 느낄 수 있는 귀를 가지고 있지는 못하지만 ,
그 말에 충분히 공감하였다. 왜냐하면 판소리의 그 소리의 감칠맛은
전라도 토속말을 통해서라야 전달된다는 점은 우리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안달루시아의 이 작은 옛 도시 헤레스가 문에게 개인적으로
판소리의 고장 순창과 아울러 한국의 스페인의 두 시인- 판소리 시인
미당 서정주와 플라멩코의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를 동시에 떠올리게
하였다. 그 곳 순창은 서정주의 고향이다.
앞 장에서 시인 로르카가 집시들의 영혼의 외침인 '깊은 노래'를
두고 다음과 같이 표현한 구절을 우리는 이미 읽었었다:
'..... 굽이치는 그 멜로디의 물결은 그 시작이 꼭 바흐의 첼로곡과
흡사하다. 바흐의 끝없는 멜로디는 둥글다. ....그 멜로디는
수평선쪽으로 사라지며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들의 영혼이
도달할 수 없는 어떤 먼 끝점으로.'
만약 가르시아 로르카가 우리의 판소리를 들어보았다면, 이 소리에
무엇을 느꼈을까? 심청전의 경우를 상상해보건대, 모르긴해도,
절망의 끝에 이르러 희망과 따스한 포옹을 나누는 우리의 판소리를
두고, 온 힘을 다해서 빛이 가득한 동산에 오르는 소리라고 표현하지
않았을까? 문의 이런 상상은 플라멩코와는 달리, 판소리는
그 끝이 화해와 밝음으로 종결되기 때문이다. 아래의 한토막 싯귀는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플라멩코 소리꾼의 코플라(가사) 한 소절로서,
인간의 감성적인 어떤 한 순간을 표현한 플라멩코 코플라이다.
하늘엔 달무리,
내 사랑은 이 땅에서 사라지고.
전라도 순창이 고향인 서정주의 시는 , 비평가들에 의하면, 판소리
서설 특유의 레토릭과 중모리 진양조 엇모리 등 갖은 판소리 장단
과 전라도 방언 특유의 감칠 맛을 끌어들임으로써 , 친근한듯
하면서도 함부로 범접할 수없는 ,이끼 낀 시적 리듬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아래의 시 '선운사...'가 하나의 예일 것이다.
이 시 속에 육자배기 가락과 판소리의 금과옥조인 수리성( 목쉰
거친 소리)이 진하게 배어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선운사 고랑으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않았고
막걸리집 여자의 육자배게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소리마당-
그 속에서는 고통과 슬픔이 노래가 되어 리듬을 띠고 , 어떤 열정이
스스로 악기가 되어 장단을 쳐주는-을 뜨겁게 낀다. 그때
우리는 그저 인간을 뿐이다.모두 동등하다. 한국인, 모로코인,
아달루시아 인 사에 아무런 구별이 없고, 남녀노소의 한계도
없다. 그 마음의 소리마당에는 그저 가슴을 지닌 인간을 뿐이다
뼈저림과 비통함을 함게 나눌 수 있는.
삶을 직시해보면, 가장 가혹한 외로움이라도 만약 그 외로움이
소리나 몸짓을 통해 누군가에게로 표출될 수 있고,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실로 깊은 고독이 아닐 것이다. 함께
나누는 마음의 고통은 그것이 아무리 깊다하더라도, 우리의
판소리의 경우에서처럼, 극복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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