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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테 혼도! 그 깊은 노래를 를 듣다보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남도 해안의 판소리가 연상된다. 이 둘은 그 생성에 있어서나 , 소리꾼의 주름진 이마에 새겨진 깊은 고뇌의 표정과 수리성의 거친 목소리에서나, 서로 동질의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칸테 혼도가 스페인 남도의 안달루시아 집시족의 입과 입을 통해 전해 내려온 그들의 민속음악인 것처럼, 판소리 역시 전라도 해안을 떠돌며 척박한 삶을 이어 온 유랑소리꾼들의 구전의 소리이다. 두 노래소리 다 가난의 고통이나 물리적 박해에 시달리는 자들의 체념의 한숨이고 달랠 길 없는 슬픔의 표현이었다. 플라멩코의 경우, 춤은 그런 몸짓이었다.
무엇보다 이 둘은 한 종족의 전통의식의 표현이지만 민족과 세대를 넘어 보편적인 체험이자 정서를 반영한 것이어서 어떤 특정의 문화권에만 한계지어질 수 없는 소리문화로 자리잡게 되었다. 민족적 차원을 넘어 세상 어느 곳에서나 그 노래소리들은 실존주의적 고통을 맛 본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파고든다는 의미이다.
플라멩코는( 그 노래소리보다 춤이 헐씬 더 ) 이미 세계인의 마음과 귀에 친숙해지있지만 우리의 판소리의 경우, 그것은 아직은 세계화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잠재력을 지닌 우리 남도의 소리 문화이다.
인우는 이따금 그들 소리꾼의 삶과 자신의 현재의 삶이 비유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느낌을 갖게되었다. 그들 소리꾼들이 사회적으로 박해와 가난의 고통을 받은 자들이거나, 내면적으로 피해망상에 시달리는 소수 이방인들이라면, 인우의 경우, 자신이 개인적으로 생물학적 노쇠현상에 접어든 나이인데다, 내면적인 무기력증으로 인해 존재가치를 상실한 무의미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는 의식에 빠져들고 있어 그러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자신의 삶이 덧없게 느껴져 하루 하루 단조롭고 의미없이 지내는 게 지겨워지기까지 하여 이렇게 혼자 중얼거린다:
끊임없이 샘솟던 나의 지적 호기심이
지금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미 추구의식은 마음에서 점점 메마르고....
읽을 때마다 새롭던 앙드레 지드의 글귀
- 그대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 순간 새롭기를!-
도 그저 덤덤하고.
노철학자 버트란트 렛셀의 충고
- 자아의 벽이 조금씩 좁아지고 당신의 생명이
점점 우주의 생명으로
몰입하는 것이다.- 를 읽으면서도 그렇고.
전에는 이렇지는 않았는데....
인우는 전에 어떤 밤이면 눈 앞에 자신의 소년기의
바다가 나타나 아른거렸다.. 그 바다의 눈부신 은빛 잔물결은
소년의 눈에, 새벽 오리떼의 날개짓 소리는 귀에, 그리고
밀물때마다 해풍에 실려오는 갯내는 코에 익어 있었던 것들이었다. 동트기 전 집마당 축담과 부딪치는 파도의 부드러운 소리에 소년은 잠을 깨고, 반쯤 감긴 눈으로 여명의 바다와 마주했었다. 그 바다는 새벽마다 늘 새롭게 소년 곁으로 찾아왔었고, 소년은 그 때마다 가슴 벅차오름을 새롭게 맛보았다.
그 바다는 계절마다 소년에게 선명히 구별되는 빛깔과 소리와 그리고 냄새로 그에게로 왔었다. 소년은 그 중에 햇살을 담뿍 안은 겨울의 늦은 아침에 수면이 마당 높이까지 오른 그 부채꼴 바다의 은삧 잔물결을 제일 좋아했었다.한 여름 초저녁 청마루에 누워 뒹구는 소년은 마당 아래에서 들리는 해풍의 속삭임에 마루아래로 내려오지않고는 베겨낼 수가없었다. 방축 아래에 그 잔잔한 수면위로 까만 얼굴과 까까머리를 내면 동네의 또래들이 장난치며 헤엄치는 소리마져 귀를 간지럽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소년의 놀이친구였던 그 바다가 쓸물 따라 어딘가 먼
바다 쪽으로 홀련히 사라진 후 다시는 돌아오지않았다. 갯벌끝
자락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둑이처럼 소년을 향해 뒤돌아보던 그 바다는 결국 그렇게 수평선 너머로 가물거리며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에 더하여 새벽 바다위로 비상하던 청둥 오리떼,
참게를 두 발로 집적되다 혼이 난 바둑이, 쓸물 따라 하늘 위로
솟아오르며 소년의 시선을 빼앗던 방패연들, 겨울 새벽의
크리스마스 송가, 동네 아이들을 뒤에 몰고 다니던 수염이 흰
엿장수의 수레와 엿가락질도 그 바다를 따라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눈 앞에서 유영하는 옛 잔영들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인우는
일어나 불을 켜고 책을 펼친다.그리고 안톤 슈낙의 아래 한 구절-
울음우는 아이들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를 읽었었다.
'작은 새의 시체위에 초추의 양광.... 달아나는 기차....,
바이올린의 G선,... .' 등의 글귀는 언제나 아름다웠다.
인우가 그렇게 고립감과 무력증에 빠져들다가도 컴푸터 앞에서
화면속의, 칸테 혼도를 부르는 늙은 소리꾼 카라꼴의 그 거친 호흡과 꾸밈없는 얼굴표정, 그리고 소리꾼의 친구관객들이 그 소리에 손벽 장단을 맞추는 그 패쇄된 공간의 하얀 포도주 잔,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등으르 이어지는 플라멩코 의식에 홀려 들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런 무력증을,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내면의 슬픔을 까맣게 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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