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산문

플라멩코 바일라오라c4-2

jhkmsn 2019. 9. 1. 06:41

2.

인우가 회상하는 포틀란드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밑 7월의 교외 동산이 블랙베리의 향기로 가득한 도시였다. 그에게 포틀란드는 아가멤논과 오이디푸스의 영웅들 이야기들이 연극으로 펼쳐진 옛 그리스의 야외극장을, 그리고 '희망의 속삭임'(whispering hope)의 듀엣 화음이 잔디계단쪽에서 울려나오는 연세대학교의 노천강단을 연상케 하는, 붉은 벽돌의 반원형 파이오니어 광장이 도심의 한 가운데에 굳건히 자리잡고있는 도시였다. 고전적 기품이 돋보이는 하얀 대리석 건물의 중앙도서관이, 티없이 푸픈 하늘 아래의 넒고 긴 윌라미트 강을 가로지르는 검은 스틸 부릿지 칠교위로 서행하는 도시형 기차가 도심과 교외를 그림처럼 이어주는 도시! 포틀란드는 인우에게는 세월이 많이 흘러도 옛 그래도 마음에 남아 있다.

인우의 심안에는 엘레나도 옛 그대로다. 밤의 공연 무대위에서 숨죽인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는 자신감과 열정이 넘처나는 젊은 플라멩코 댄서로 남아 있었다. 플라멩코 춤과 기타선율에 처음 그의 혼을 빼았았던 것은 그녀의 춤 무대였다. 그에게는, 플라에코에 매혹되어있었던 그에게는,그녀의 춤이 곧 플라멩코춤이였다. 후반의 나이에 그녀를 통해 감지된 그 이국적인 플라멩코는 그의 마음에 넓고 깊게 스며들면서 그의 의식세계를 변화시켰다. 언젠가부터 인우를 아는 사람들은 그에 대해 말할 때 플라멩코를 먼저 연상하였다. 화가들 사이에는 그가 마산의 창동을 사랑하고 그림을 사랑하는 '창동인블루'의 작가로 여기지지만, 그를 자주 만나는 지인들에게는 그는 뒤늦은 나이에 엘레나의 춤에 홀린 자로 여겨졌다. 그의 말과 글에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플라멩코와 미국의 댄서 엘레나가 뒤섞여 있었다.

그는 말이나 글로서 한국의 판소리와 집시민족의 전통적인 소리인 플라멩코 노래를 , 그리고 살풀이춤과 플라멩코 춤을 비교적으로 해설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플라멩코나 판소리는 소외받거나 사회적으로 억압당하는 소수민족이나 집단의 시회적 저항이나 체념의식의 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옛 안달루시아 지방의 집시족의 끊임없는 피해망상과 전라도 지역를 중심으로 한 하층민 낭인들의 사회적 소외의식은 거의 동질의 것이었다. 삶의 고통, 억압, 그리고 가난의 불운에서 벗어날 길이 그들에게는 주어지지않는다는 의식아래 비롯된 체념과 애통이 그 두 전통적 표현양식의 바탕을 이루고 있다. 그 둘 다 특정 집단의 전통의식에서 형성된 것이긴 하지만 속성상 그것은 그 한계성을 넘어 보편적인 사람들의 공통된 체험을 정서를 소리나 몸짓으로 반영하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점차 특정의 문화권을 넘어 다양한 관객들을 매혹하는 공연행위로 확대된 것이다.

집시족 소리꾼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것이 플라멩코 칸테(노래)이듯, 판소리 역시 악보에 의하서가 아니라 구두로 전승 되었던 것이다. 둘 다 처음 입으로 전해지고 놀이마당에서 청중들과 자연스레 호흡을 함께 나누며 지속적으로 발전되어온 표현주의적 예술형태인 것이다. 두 사이에 한가지 차이점으로는, 판소리는 독자적으로 형성된 춤의 형식을 갖지않았고, 플라멩코의 경우, 독자적으로 형성된 춤(baile)이 점차적으로 소리보다 그 영향력이 더 커졌다. 어쨋거나, 플라멩코와 판소리 둘 다 새벽의 동터오름처럼 인간적 애통과 체념의식이 그렇게 억누를 수 없는 소리나 춤으로 승화되어 표현된 것이다.

물론 인우에게는 판소리보다 플라멩코가 지배적이다. 그는 어느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플라멩코는 그 소리와 춤이 저 하늘이 아니라 이땅으로 향하고 있어 좋습니다. 그 소리를 틀으면, 그리고 그 춤을 보면 어떤 바다가, 은비늘 반짝임의 작은 바다가 눈 앞에 아른거립니다. 특히 춤과 기타선율에 빠져들면 조지훈의 '승무'가 연상되고, 이그나시아 산체스의 죽음을 애도한 로르카의 싯귀를 낭송하고 싶어집니다. 무엇보다 아침이슬을 춤추던 엘레나에게 지금 당장 편지를 쓰고 싶어집니다. 그녀의 독무가, 그 가물거리는 눈부신 춤이 어떤 때는 내게는, 새벽바다의 검푸른 잔물결이 되고, 어떤 때는 저녁 하늘의 노을빛 사라짐이 됩니다. 혼을 뒤흔드는 그녀의 춤에서 나는 플라렝코 춤의 본질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는 정적인 살풀이춤과 역동적인 플라멩코의 춤을, 강물의 두 흐름으로 비유하며 대비시키기도 하였다. 이를 테면, 살풀이 춤이 고요한 강물의 굽이치는 흐름이라면 , 풀라멩코 춤은 웅장한 폭포의 형상이나 드세게 범람하는 강물이라는 것이다. 이 비교는 자신의 감성적인 주관을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드러낸 해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쨋거나 그의 말에는, 살풀이춤이나 플라멩코 춤 둘 다 벗어날 길이 없는 인간적 고뇌의 탐미적 표현이라는 의미가 담겨 잇었다. 대비적으로, 하나는 치마폭에 숨겨진 탐미적인 유선형 물결의 육체의 선으로 나타나고, 다른 하나는 그 고뇌가 어떤 정제된 구도아래 영감의 불꽃으로 피어난다는 것이었다. 모르긴 해도 그의 이런 몽롱한 언어에 그 자리에 동석한 이들는 속으로 '이 친구, 혼자 열에 들뜨 떠드는 가보다' 하였으리라. 아뭏튼 플라멩코는 그에게는 그러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어느 새 그는 지역의 이 곳 저곳이 공적 모임에서 플라멩코 해설가로 소개되었고 그 때마다 그를 드문 경력의 소유자로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었다. 요컨대, 인문에게 단순히 이국적한 춤과 소리이상이었다. 그것은 , 말하자면 문학적 향기가 진한 표현주의적 예술로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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