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산문

플라멩코 바일라오라c5-1

jhkmsn 2019. 9. 2. 09:32

플라멩코와 바다

1.

인우에게 하루는 플라멩코 소리꾼 마리나 에레디아(​Marina Heredia)의 소리가  불현듯 그라나다의 알바이신 언덕을 심안으로 불러일으킨다. 그가 7여년 전 어느 날 해질 무렵그 알바이신 언덕으로 향하던 중 건너 산쪽에서 들리는 플라멩코 소리꾼의 탄식의 목소리, 그 의미는 알 수 없으나 이어졋다 끊어졋다 그리고 높았다 낮아졌다 하며 흐느 끼듯 들리던 그 쉰 목소리 를 연상케 한다: 저 노래소리? 무슨 소리가 저리도 애절할까? 탄식의 소리 같기도 하고. 서편제의 진양조 가락이나 ,구음 시나위를 연상케 해. 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 쪽 집시의 동굴 마을로 발길을 옮겼던 적이 있었다.

​마리나 에레디아의 소리를 다시 한번 더 듣고싶어,

이번에는 그녀의 솔레아

형식의 소리를 꼭 듣고싶어.

그는 유튜브의 동영상 화면을 한번 더 되돌린다.

마리아 에레디아의 소리가 펼쳐지는 동영상은 마치 렘브란트의 그림처럼 눈 앞에서 물결치며 흐른다.

흑백 화면의 바탕에 움직이는 그녀의 얼굴, 햐얀 드레스, 긴 팔 , 온 몸의 힘을 목에 집중시켜 소리를 토해낼 때의 얼굴 표정, 그리고 그녀의 소리를 이끄는 기타리스트의 손가락과 기타의 둥근 몸통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기타반주자의 얼굴은 어둠에 묻혀 거의 보이지않는다. 탄식을 유도하는 선율의 하얀 명주실을 토해내는 네댓개의 기타선이 빛 가운데로 나타났다 다시 어둠속으로 뭍히곤 할 뿐이다. 노래 소리와 기타반주는 그렇게 빛과 그림자의 화면에서 번져 나온다. 움직이는 동선은 어둠에 눌려 희미하게 드러나 보인다.

대부분의 전통적인 플라멩코 소리꾼들에게서는 거의 느낄수 없는, 마리나 엘레디아 목소리의 달콤한 음색에 문은 자신도 모르게 홀린다.

그녀의 플라멩코 소리는 거치나 달콤하다. 그 소리에 슈베르트 곡의 고운 멜로디 같은 게 담겨 있을리 없음에도 그 거친 소리는 매혹적이다. 고전음악에 귀가 익숙한 문에게 그녀의 목소리에는 플라멩코의 음색과 리듬(콤파스)외에

잘 조절된 멜로디가 감지되는 듯하였던 것이다.

​그녀의 목소리의 경우는 플라멩코 특유의 단순한 외침의 흐름과는

좀 다르다. 그 소리는 인문의 귀에는 막연하나마 ​흑인 재즈 가수

마리안 엔더슨의 깊은 울림의 성가나 또는 판소리의 서편제소리에

더 가깝게 여겨진다. 그 소리의 애절함이 세련된 기교로 표현되는

판소리의,이른바, 서편제 특유의 음색을 떠올리게 한다.

​무엇보다 마리나 에레디아의 소리엔 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그 마약성의 음색과 리듬이.... 미루어 짐작컨대, 저 소리라면,

삶의 뼈저림이나 절절한 외로움과 절망을 맛본 자의 귀와 마음을

홀리고도 남을 것이다. 저 소리라면 ,어느 누구와도 함게 나눌 수

없는 개인적인 슬픔을, 때로는 불행한 이웃에 대한 한없는 연민으로

잠 못드는 모든 이의 마음속으로 파고들 것이다.

마리나 에레디아의 노래 소리에 빠져들던 중 인우의 심안에

떠오른 불행한 두 고아의 얼굴들! 아득히 지난 날 그 둘의 부모가 어린 그들을 남겨 둔 채 차례 차례 세상을 떠난 이래 고아원에서 지냈던 두 외사촌 동생인 수영과 숙이가 그들이었다.그들이 하루는 초로에 접어 든 나이에 인우의 집을 방문하였던 게 얼마전의 일이었다.그 둘이 집으로 들어설 때, 인우의 상상속의 모습과는 달리 의외의 밝고 안정된 표정이었기에 문은 속으로

더없이 놀랐던 적이 있었던 두 사람이었다.

​수영과 숙이, 두 형제의 얼굴들이

어찌 그렇게 맑을 수가 있을까?

삶에 찌든 흔적이 역역한 우리네 얼굴보다

그 둘의 표정이 더 맑고 선하였어.

소년기의 그 어둡고 두려웠을 삶을

저 둘은 어떻게 저렇게 잘 견디어 냈을까

아버지는 바다속으로 휩쓸려 흔적없이 사라져버렸고,

어머니는 젖먹이 동생을 품에 안은채 영양실조로

세상 떠나고...

형제 둘이 오직 그들끼리에만 의지한 채

먹고 잘 곳을 찾아 고아원에 들어가

소년기를 보낸 저들인데.

​그 두 아이의 아버지가 그 바다에 큰 풍랑이

일던 날 고기잡이 나갔다 끝내 돌아오지않았던 일을 인우는 기억한다.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가 갯가 초가집 마당의 양지에 힘없이 기대어

끊임없이 이어지는 기침속에서 그 둘의 동생을 품에 안고 함게

세상을 떠나던 일도 세월이 많이 지난 지금도 애틋한 마음으로

기억한다. 그둘의 어머니는 인우의 막내 이모였다.

남자 소리꾼 카마론은 그녀의 소리와는 좀 달라. 그의 소리는 그녀보다

더 야성적이고 어쩌면 원시적이기조차 해. 문이 그의 소리를 듣기위해서는

파코 데 루시아의 기타 반주가 있어야 했어. 그의 소리에는 멜로디적 음색이

전혀 느겨지지않았으니까. 그의 소리에 마음이 끌릴 때는 멜로디가 느껴지는

알레그리아스일 때였더, 그러던 인문이 이제 여행길 나서는 일이 없는,

그래서 플라멩코 소리에 묻혀 애득한 회상에만 잠기기를 자주하는 이 시점에

카마론의 그 야성적인 아우성이 새롭게 마음을 이끈다.

카라콜은 그 거친 목소리에 어떤 달콤함이 깃들어 있지만 카마론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렘에도 파코 데 루시아는 그의 목소리를 더 없이

소중히​ 여긴다. 소리지를때도 담배를 피웠던 생전의 카마론을 그는

플라멩코의 전설이라고 여겼다.​

문은 이제 카마론과 파코 데 루치아의의 공연을 화면위에 올려놓는다..

파고 데 루치아가 기타반주로 그 카마론의 소리를 이끈다.

의자에 안은 채 소리꾼은 손에서 담배를 내려놓고 소리를 토해낸다.

도대체 인우는 무엇으로 인해 스스로 불행감에 빠져들며

그렇게도 플라렝코의 깊은 노래에 매달리는 것인가?

예젖처럼 어디 낯선 곳으로 여행길이라도 떠나면 될텐데...

길을 나서면 먼 곳으로부터 어떤 설레이는 손짓이나 부름에 순응하며

가슴 설레임의 순군들을 맛보지않았던게ㅏ.

그런 그가 무력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저 깊은 노래만이 잠못 드는 그를 붙들어 준다.

​요즈음 문은 집 서재에서 스페인 집시의 음악을 만나고 싶어 인테넷을

접속할 때 , 춤이나 다른 요소보다 오히려 칸테의 거친 소리를 선곡해

듣는다. 이제 그의 마음과 귀는 시각적인 춤 동작보다 그 흐느끼과 애통의

소리에 더 끌리고있다.​ ​

플라멩코라면 세상 사람들은 대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련의 색다른 이미지들을 연상한다:소용돌이치는 치마자락,

카스트네트를 치는 거무스름한 얼굴의 여인,

번개같이 빠른 손놀림의 기타연주자, 또는 이해할 수 없는

낯설고 격열한 노래를 노래를 부리는, 검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

현재의 이런 이미지들은 관객들을 의식한 상업적 필요에

부응한 표피적 치장물로서 그것은 원래의 본질적 요소와는

거리가 있다.

플라멩코는 원래 스페인의 남부 해안지역인 안달루시아 집시들의

동굴 거주지역, 쇠를 달구는 대장간에서, 산기슭의 허름한 집,

집시들의 선술집 등에서 생겨난 문화적으로 유례없는 극적인 표현

형태를 띠고있다. 도취적 노래와 춤으로 이루어진 이 플라멩코는

대부분의 거주민처럼 글을 배우지않은 어떤 천재에 의해 살아있는

불꽃으로 지켜지며 입에서 입을 통해 새대를 거치며 이어져 온

것이다.

이 플라멩코는 원래 칸테(노래)가 그 기본이이었다

리듬을 담아내는 손벽, 노래를 토해내는 거친 목소리, 고통, 질투,

욕망의 감정들이 가족이나 친구들 만이 모인 닫힌 공간에서

불꽃을 내며 밤새 타오른다.밀교집단의 어떤 의식과 이른바

그들의 후에르가(juerga) 파티가 벌어진 것이다. 그 의식에는

어떤 의도나, 프로그램, 혹은 현대적 개념으로서의 관객도 없다

얼핏 열기 가득한 종교집단의 집회같은 분위기를 ​떠올릴 수 있다.

Lau에게!

Hola!

오래동안 소식없어 궁금합니다. 내가 처음 포틀란드에서

처음 본 그대의 그 낯선 춤에 홀렸던 때가 벌써 십 사오년

전이군요. 춤이 플라멩코의 전부이었고, 칸테는 그저

있으나마나한 구성요소로 여겼습니다.

그때 Lau의 친구, 칸타오라(여자 소리꾼) Rubina의 칸테가

멜로디가 이상하다며 듣기가 여간 거북스럽지않다고 그대 곁에서

귀속말로 중얼거렸던 일이 지금 부끄러움으로 회상됩니다.

그리고 그대들이 한국 청년들의 노래, '아침이슬'에 강한

호기심으로 반기며 그대들의 Aire 플라멩코 공연 프로그램에

올리기로 했다며 내게 알려주었을 때 내 가슴이 얼마나 설레였던지!

그 노래를 혹시 그대의 플라멩코 춤으로 표현될 수는 없을까

싶어 그대에게 소개했을때 ,그대는 내가 영문으로 메모해 준 그

노랫말을 보며 한번 불러볼 수 없느냐고 즉석에게 요청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노래가 무대에서 당신의 춤으로가 아니라 Rubina의 칸테로

불러질 때 속으로 매우 실망했습니다. 나 뿐만 아니라 그날 관객으로

객석에 앚았던 한국 교민들 역시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녀의 거친 목소리가 토해내는 그 노래는 우리들의 귀에 익은

아름다운 아침이슬의 노래가 아니었기에 그랬습니다. 무미건조한

다른 노래 인 것처럼 들렷으니까요. 그때만 해도 내게는 당신이

춤추는 그 솔레아 춤이 플라멩코의 전부인것처럼 여겼엇기에

아침이슬이 칸테로 불려지는데 속으로 적잖이 실망했었던 것입니다.

내장을 파고드는 플라멩코 칸테의 참맛을 깨닫지 못하던

시절이었으니까요.그 때가 벌써 십 수년 전의 일입니다.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이 있기를!

adios,

인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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