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해안
4.
인문은 마티스의 그림들 생각하며 자신의 글을 이어가 보았다.
그 바다의 형태도 색깔도 심상의 것과는 다르지만 그의 눈에는 그것도
괜찮구나 싶었다. 그렇게 그려진 대상이 앞 가까이에서는 그 이미지가
제대로 포착되지않고 멀리서 보아야만 비로소 흐릿한 윤곽으로
나타나던 그 바다가 이번에는 눈 앞에서도 , 또는 뒤로 멀찌감치 떨어져
보아도 선명히 눈에 포착되는 것이었다 . 다만 글의 그림으로 붙든
그 형태는 ,그 색깔이 심상의 것과는 객관적으로 현저히 다르다는 점이
문제였다. 자연의 것과는 다른 색체, 본질적인 요소로 단순화된 형태였다.
그 바다는 자연 상태의 그 대상과는 별개의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는 심상을 눈 앞에 현실화하려면 꼭닮게 그려야한다는 집착을
버려야한다는 마음으로 단어와 단어들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사실주의적 묘사를 넘어 모네, 마티스를 떠올리며 이어가던 글은
그림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점점 추상의 기법에 가까운 글이 되어감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엔 그 바다는 단어와 문장으로
새롭게 탄생된 회상, 열망의 집중된 표현인 글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림이 그림일뿐이듯, 글 역시 그림과는 또한 별개의 존재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글속의 주제적 대상은 글로 옮겨지기전의
어떤 심상의 것과는 별개의 인위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림이란
게 실체의 자연 대상과는 별개의 인위적 창조물이듯이....
싯적 산문이란, 말 그대로, 시적 운율의 산문이다.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이나 사정주의 시 '신부'의 글 형식을 닮고 싶어,
인무은 자신의 글이 그렇게 불리기를 좋아한다. 기본적으로
어떤 주제적 의미가 담긴 글이어야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글의
형식 자체에도 독자적인 미적 울림이 있어야한다는 것이었다.
글 속에 살아 흐르는 싯적 음악성, 빛과 그림자로 녹아들며
해체된 자연의 형태, 색선의 출렁임 또는 굳어진 색면의 용암!
소년의 바다가 어쨋거나 인문의 글쓰기로 이어지기까지
많은 시간, 가지 가지 많은 세상일들, 많은 사람의 얼굴, 마음,
페이소스 등이, 그 둘 사이엔 어떤 몽상의 시내가 흐르며 이어져
있었다. 때로는 넘쳐 범람하고, 때로는 메말라 바닥이 드러나는
깊이가 얕고 때로는 끊어지기도 하며 흐르는 몽상의 시내가.,
그의 글쓰기는 그러했엇다. 그리고 많은 사람의 글, 여행길 속의
도시, 낯선 얼굴, 노래와 춤이 그의 글의 요소를 이루엇다.
아래의 라이나 마리아 릴케의 글을 여행길 나설때마다, 글의 길
나설 때마다 마음의 베낭에 넣고 다녔던 것 같다.
'한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많은 도시,
많은 책,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리고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과 함께
덧없이 사라지는 여로의 밤을 회상할 수 있어야 한다.'
인문이 현실적으로 발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해안을 끼고 돌아다녔다.
마치 소년기의 사라진 그 바다를 찾아 헤매였던 것처럼. 그렇게 막연하게
나섰던 그 나들이를 시작점으로 그 후 점점 더 먼 바다쪽으로 나아가
여기 저기를 기웃거렸다. 태평양을 넘어 미국의 동부쪽으로, 거기서 또
대서양을 넘어 런던, 파리로 날라갔었고 심지어 바다와는 거리가 먼 독일의
동.서 베르린으로까지 넘어가 돌아다녔다.
장그레니가, 자신에게 '배고픔을 깨닫게 해준 곳'이라 회상한 그 런던이
인문에게는 그를 매혹시켜 근 2년여 기간동안 번역에 몰두케 한
'카페소사어티cafe society)'를 만난 땅으로 기억된다.누군가의 사색의
한토막-'보헤미언의 마음을 채우고있는 것은 단지 자신이 불행하다는
의식뿐 만 아니라 남들의 세속적 행복이라는 것 또한 비속하고 천박하다는
느낌이다'- 는 그 책 번역기간에 인문이 좋아하게 되었던 말이다. 헤밍웨이의
아래의 글은 그 책 속에 인용된 표현이다.
당신이 쓰는 일에 몰입하면 할수록 더 고독해진다.
시간은 흐르고, 그리운 옛 친구들은 죽거나 당신 곁을 떠난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지난 시절 커페에 함께 있었던 , 지금은
사라진 그리운 얼굴들을 마주한다..... 당신은 글을 써야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은 너무 짧다.......
장그러니가 '......우정들을 깨달았던 곳'으로 회상하였던 빠리는
인문에게는 시의 세계가 아름다운 것은 그 의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의 흐름에 담긴 리듬이나 그 단어들의 울림에 있는 것 같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준 곳이었다.
????인문이 빠리 여행중에 베를렌의 글귀들을 처음 대하게 되었을 때
(그 시인의 불어의 시가 아니라 영문 번역서 ) 그 뜻이 무엇일까를
찾는 허망한 노력을 했으나, 그 시인의 글은 이해도 되지않았을 뿐
아니라 좋은 글이라고 느껴지지도 않았다. 시에서 느껴야 할 것은
울림과 리듬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깨달음을 처음으로 느끼게 된 계기가 빠리에서 읽은
베를렌의 글귀로 인해서 일 것이다. 거칠면서도 들릴 듯 말듯한
목소리로 그 시인이 자신의 시를 낭송하는 동안 카페의 청중들은
온 몸이 떨리는 종교적 차원의 경건함을 느꼈다는 글을
인문은 빠리체류중에 읽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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