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산문

플라멩코이야기 2-8

jhkmsn 2014. 8. 3. 08:17

               붉은 해안

                   3.​

인문이 자신이 소년일 때에는 그럴 수도 잇었겠지만,어른이 된

다음에도 여전히 그 바다를 바둑이와 닮았다거나, 더 나아가

황당하게도 ,그 바다가 세월따라  나이먹어 가는 존재로 여기게

된 것은 그가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현실 밖의 그런 상상을

마치 현실처럼 받아들이고 잇었던 게 아닌가 여겨질 수 있다.

?

그림에 친숙하기 훨씬 전 그림이라면 ​사실주의적 풍경화가

주된 부분이이었지만 화가들의 그림세계에 자주 눈이 가는 동안

상상이 그림속 현실로 되어가는 화풍이나, 데푸로마숑 혹은

초현실주의적 이미지들이 자주 그의 시선을 빼았곤 했었다.

사걀이나 브라크 아니면 그와 술자리에서 자주 만나는 현재호

화가의 그림들에게서 전혀 비현실적인 얼굴들 풍경들, 심지어

그림의 대상이 자연색이 아니라 화가 멋대로 선택한 색채로

입혀지는 것에 점점 친숙해지기 시작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그리하여  그 바다가 소년기에서 청년기를 지난 후 지금은

더 나이 든  바다일 것이라는....

그래서 그런지 언젠가부터 인문에게 그 바다가  붉은 해안이 되어

눈에 아른거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연색의 바다가 아니라,

렘브란트의 그림에서처럼 빛과 그림자가 대비적으로 교차하는

바다로 떠오르면서 , 그 위로 몽상에서는 환한 빛의 밀물이 그리고

상념으로는 잿빛 그림자의 쓸물이 교차한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근자에 이르러 그 바다는 해거름의 검붉은 노을빛 가득한

노쇠한 해안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 사라진 바다에는 바둑이와 노는 일처럼 소년에게 친숙한 놀이들,

이를테면 밀물 때의 넒은 갯벌 구멍 속의 쏙잡기, 굴밭 돌 틈에

자리를 잡고 사는 ,집게발이 민첩하고 날카롭기 꽃게들과 눈씨름 하기, 

한 여름 장마철 마다 먼 들판에서 개울을 타고 내려와 바닷가의 얕은

물위에 놈을 옆으로 눞힌 채 파닥거리며 노는 붕어좇아다니기 등등이

그것이다.

쏙잡이만큼 그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강하게 하는 놀이도

흔하지 않다. 그것은 소년에게는 일종의 사냥이었다.

예컨대, 구멍속의 예민한 쏙을 바깥으로 꼬여내는 일이나

그 앞다리를 잡고 몸통을 그 구멍에서 쏙 배내는 일은 여간

민첩하지않으면 성공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갯벌이

언제까가지 텅 빈 상태로 남아 있지 않는다. 어느 틈에 밀물이

소리없이 다가와 갯벌을 바다로 변화시킨다. 쏙 잡는 일에

몰두하다  순식간에 자신이 앉은 갯벌이 바다로 변하는 것에 놀라

허둥지둥 갯가로 나오기도 하였다.

그 때 그 바다는 그렇게 소년이나 바둑이를 닮아 있었다. 바다에

가득한 찔피 군락지는 그 속에 온갖 물고기들의 놀이터로 ,이른바

바다의 수목원이었다. 그 바다는 그렇게  소년들 곁에서는 세상 물정

모르는 소년 그대로 였었다. 그리고 그 빛깔은 살아움직이는 바다의 

싱싱함 그대로 이었고.

 

 ​

  ?

인문이 시작한  글쓰기는  그 바다가 사라진 쪽으로의 길 나섬

이었다. 이따금씩 소리와 냄새를 동반하며 눈앞에  아른거리는

그 바다의 부분 부분들, 이를테면 새벽바다의 변화무쌍한 빛깔, 

수면위로 바람을 나고 쏟아지는 빗줄기, 밀물과 쓸물의 속삭임, 

먼 갯벌 끝자락의 하얀 물거품 띠등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하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그것이 향했음직한 남해, 서해, 동해의 해안쪽으로

 버스길을 따라 나들이를 한 후, 그리고 심지어 그 흐름의 방향과는

무관했을  먼 바다쪽으로까지 혼자 여행길을 나섰다 돌아 온 뒤부터의

일이었다. 그 방법아니고는 소년기의 그의 삶의 일부였던

그 바다를 귀와 눈으로, 더 가까이는, 냄새로  만나 마주할 수 없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고부터였었다. 

 

글쓰기의 시작은 처음엔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화가가 

야외에서 실제로 마주하는 대상으로서의 풍경을 손이 가는 대로

백지위에 데상하듯,  마음에 익은 그 바다를 백지위에 붙잡아 두는

일이기에 그러하였다. 붙들고 싶은  대상의 윤곽이 단어들의 배열을

통해 의미상으로 드러나 실체화되는 것이었다. 직선이나 곡선으로

형태를 이룸을 뜻하는 단어들, 두 선이 만나 이루는 직각이나 둔각을

의미하는 단어군들, 또는 굵은 선, 가는 선​,원이 되는 선들을 뜻하는

단어들의 배합으로 그 대상이 눈 앞에 점점 윤곽을 드러내었던 것이다.  

그 작업은 마치 화가가 마주하는 사물을 점, 선, 명암, 색채 등으로

묘사하는 것과  바를 바 없는 작업이었다. 아마 인문이 화가의 손을

가지고 있었다면  단어들의 배열이라는 글쓰기로보다 드로잉으로

직접 그 바다를 백지위에 바로 그려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선긋기나 형태에 명암넣기 또는 색채 입히기 등의 작업에 익은 손을

갖지못하였던 것이다. 화가라면 손쉬웠을 그 일보다  단어들을

묶어내거나 배열하는 일이 그에게는 헐씬 더 자연스러웠기에 그렇게

하엿던 것이다.

어쨋거나  단어들이 만들어내는 그 윤곽이 백지위에 실체화되는

신기하기도 하여 그 일로 소일하는 게 즐거웠었다. 심안에 나타나

아른거리는 그 바다를 단어들로 실제로 붙들어 나타내는게 만만치 않는

일임을 점점 실감하기 시작하였다. 집안 마당에서 마저도  재빠른

몸몰림과 장난기로 인해 엔간해서는 손에 붙들리지않는 바둑이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코 앞에서 조차 숨었다

나타나기도 하는 그런 변화무쌍한 놀이를 반복하는 그 바다를였기에

그러하였다. 

더우기 눈앞에 나타나나는 그 바다는 더 이상 자연색을 띠고 있지도

않았던 것이다. 조개잡이 아낙네들의 발 아래 작은 밀게들이  왕래하는

그 친숙한 갯벌의 자연색, 흐린날의 빗물 머금은 하늘, 그리고

아침햇살을 잔물결위로 담뿍 받은 아침나즐의 해수면 등 원래의

그  바다의 자연색이 아니라, 언젠가 서해안 나들이 중 해질 무렵에

바라보았던 노을빛 가득한 만리포 해안처럼 검붉은 색을 띠고

눈 앞에 아른거리는 것이었다.

 

그런 점은 아무래도 인문의 내면적 상태가 더 큰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즉, 시간이 흐를수록  그 사라진 바다를 희릿한 ​윤곽이 아닌

좀 더 뚜렷한 상태로 만나고싶은 욕구 때문이었다.

화가의 단순한 데상  수준에 머문, 이를 테면 발이 느린 단어들과

문장들로서는 그건 거의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생동하는 실체로

좀 더 가까이, 즉 소리로,냄새로 원래의 그 바다를 옛 그대로에 가까운

상태로​ 만나고 싶다는 그의 욕망이 점점 더 크지고 있었던 탓이다. 

그렇지만 그건 유아적이고 비현실적 욕망이었다.

그런 난감함 속에 인문은 한동안은 글작업할 때​ 인상파 화가 모네의

회화수법을 참고하였다. 자연을 감싼 미묘한  대기의 뉘앙스나 빛을 받고

 변화하는 풍경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한 모네가 생각났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그의 해돋이 그림을 떠 올렸다. 그의 작품 '인상 : 해돋이' 는

제목처럼 모네가  르아브르의 고향집에서 내려다본 항구를 보고

느낀 그대로 즉흥적인 인상을 그려낸 작품이다. 어둠속에서

해가 막 떠오르는 여명의 풍경을 담은 그림이다. 어두운 색을

 특히 사용하지 않고도 어둠을 표현한 것이 특징입니다. 태양빛에

따른 풍경 색감의 변화가 그 대상을 자연적 실체의 차원을 넘어 선

시각적 환상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문은, 모네가 그랬던 것처럼, 머리속에 아련히 떠올라 순간

순간 변화하는 물체의 이미지를, 선긋기나 구체적인 형태 그리기 대신

지리적인 대상에 대한 윤곽을 묘사하는 대신에  기옥속에 흔들리는

바다 이미지을 기대감으로 또는 시각적 상상으로 붙들어 나갔다. 

화가가 물감을 듬뿍 무친 브러시나 나이프로 캔버스에

재빠르게 그려내듯, 인문은 자신의 단어와 문장들을 백지 혹은

컴푸터의 화면위에 채워나가는 작업을 통해 자신이 바라는

방법으로 그 대상을 그려나갔다. 그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 실체에 냄새로 좀 더 가까이 다가 갈 수 잇다는 느낌이 들어

자신의 글이 그려내는 대상 앞에서 가슴 설레이까지 하였다.

이 방법에는 예상치 못한 새로운 문제점이 있었다. 좀 더 가까이,

이를테면 촉각적으로 다가서고 싶은 그 바다를 그리고싶어하면

할수록 그 대상은 더 멀리서만 마주할 수 밖에없다는 점이

그것이었다. 모네의 인상주의적인 접근으로는 기대가 충족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화가의 즙근방법으로는 마음속의 그​ 대상이 

코 앞에서는 그 윤곽조차 숨겨져 잡히지않고, 멀리서 바라보아야만

비로소 제대로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인문은 그 바다를,

바둑이 머리를 쓰다듬듯 촉각적으로 느끼고 싶어한 그 간절한 바램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 실망스러웠다.

이어 다음에는, 야수파적인 마티스의 손처럼, 그 대상의 형태를 

단순화시키고 색채를 원래의 것에서 벗어나 그 형태에 어울리게

칠해보았다. 일단 마티스의 원무를 떠올렸다.원근법이 사라진 평면화된

화면에 펼쳐진 《원무》는 율동감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춤추는 

다섯 인물이 하나로 어우러져 전체적으로 통일감을 잃지 않으며,

인물들의 위치를 악보의 음표처럼 조금씩 달리 하여 변화를 준

그림으로 춤과 음악이라는 본능적이고 순수한 행위의 아름다움을

준다.

 보편적으로 야수파의 특징으로는 인상주의의 빛에 의한

명암법을 거부하고 원색의 대담한 사용, 단순화한 형태, 자유로운

붓놀림을 통한 주관적 감정을 표현한 점이 그것이다. 마티스의《원무》

라는 작품에는 3가지 색으로 되어있다. 하늘을 칠할 파란색, 인물을

칠한 분홍색, 그리고 동산을 칠한 초록색이다. 그렇게 형태도 색깔도

주관적으로 단순화시켰다.​


 

'연작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플라멩코이야기 2-10  (0) 2014.08.03
플라멩코이야기2-9  (0) 2014.08.03
플라멩코이야기2-7  (0) 2014.08.02
플라멩코이야기2-6  (0) 2014.08.01
플라멩코이야기 2-5  (0) 2014.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