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산문

창동인블루 세븐 4

jhkmsn 2019. 4. 21. 13:15

어떤 열망

1.

덧없는 글의 매혹에 빠진 우리들의 친구, 인문이 '창동인 블루' 6집을 또다시 세상 밖으로 내던졌다. 이번 시리즈의 주제 역시 창동을 무대로 한 지역화가들의 그림에 대한 자유로운 '그림읽기'가 중요한 요소란다.

그는 왜 창동을 벗어나지 못하고 연연하는 갈까?

그곳 창동에는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많은 희노애락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조심스레 짐작해 보지만 소시민으로서는 그곳은 그저 한물 간 도시의 외로운 한구석일 뿐인데 말이다.

필경, 그는 창동에 대한 애착 때문에 그 고물 항아리를 끌어안은 채 '덧없는 글의 매혹'의 굴레 안에서 맴돌며 미완의 '창동인블루' 시리즈를 유작으로 남길 것만 같은 예감은 나의 지나친 예단일까?

마치 슈베르트가 남긴 의문의 '미완성교향곡'처럼 말이다.

위의 짧은 인용문은 지난 달 <창동24갤러리>에서 인물사진전을 연 아웃사이더 포토그래퍼 제갈선광이 그들의 동기회보지에 실은 , 인문의 근작 <창동인블루6>에 대한 서평이다. 누가 보아도 인문에게 던진 이 물음을 그 인문 자신도 스스로에게 던져보았다. 친구의 말 마따나 어찌하여 '나는 창동을 벗어나지 못하고 맴도는 것일까' 라고.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이 물음이 그에게 떠 올린 것은 앙드레 지의 단편 '돌아온 탕자' 속의 한 토막 이야기 였다. 이 소설은, 지드가 신약서의 한 구절 인 '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자신의 상상력으로 다시 꾸미고 제목도 그대로 단 채 쓴 것이다. 인문에게 떠오른 부분은 그 이야기 중 뒷 부분 어딘가 쯤에 집으로 돌아 온 탕자가 자신의 동생과 한 밤에 나누는 이런 대화였다

.........

.........

동생: 형은 어디에서 무엇을 보았나요?

탕자: ...........나는 오랫동안 숱한 넓은 땅을 헤매고 다녔다.

동생: 황야인가요?

탕자: 황야만은 아니었다.

동생: 형은 거기서 무엇을 찾고 있었나요?

탕자: 어려운 질문이구나. 솔직히 나 자신도 모르겠어.

...........

...........

동생: 형의 어깨 넘어 뒤쪽 저 벽장위를 한번 돌아보세요.

탕자: 저건 야생석류가 아니냐. 껍질이 벌어져 속이 다 보이는구나.

동생; 저 야생 돌석류는 말인데요. 쓰기는 하지만, 그 석류는 생각만 해도 우리의 목마름을 금방 달래주잖아요.

탕자: 아, 그렇다면, 이제 너의 물음에 답할 수 있겠다. 황야에서 내가 찾고있었던 것은 바로 그 목마름이었다!

그 밤이 다 샐 무렵 탕자는 낯선 땅의 새로운 대기에 대한 목마름으로 아버지지 몰래 집을 떠나는 자신의 동생을 배웅하며 한마디 던진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너의 그 목마름을 어쩌겠느냐. 나는 비록 헐벗음과 허기에 못이겨 아버지 집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너는 이 형처럼 되지 않기를!

동생: 형, 안녕!

형: 잘 가!

뭐, 대강 이런 내용의 짦은 글귀인데, 어찌하여 친구의 그 한마디 물음에 그 탕자이야기의 한 구절이 떠오르게 되었는지 인문 자신도 알 수는 없다. 하여간 인문에게 처음엔 단순히 한 공간으로서의 지역 이름인 '창동'이 점차 형체가 사라진 추상적 개념으로까지 확대되면서 그 비실체성의 창동의 개념속에 그런 물음과 답마저 녹아들었던 것 같다.

그가 쓴 ' 창동인블루'는 그 이름 그대로의 창동이 제목아래 엮어진 산문으로 그림평이나 철학적 사유 등의 개인적 사색이 소설 구도의 산문이나 일기나 서싱 이 메일 등 여러 형식의 글 속에 녹아 있다. 전체적으로 매우 개인적인 사유의 글로서, 창동이라는 한 좁은 공간을 하나의 축으로 삼고 그 주변을 맴돌며 사색한 예술적 물음들의 글인 것이다. 그리고 그 절반이 몽상적인 이야기로서 현실속의 사실적 요소와 어울리며 꾸며져 있기에 fact-fiction이기도 한 것이다.

창동이라는 곳은 비유적으로 그에게는 부모의 품과 같은 존재였다. 그 곳이 현실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그의 긴 삶에서 그를 위기나 불안으로부터 벗어나게 한 안식처였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그 곳에 있지않았다면 지금의 그가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곳은 그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의미로서의 글쓰기의 행운을 누리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 곳이 아니었다면 그가 그 행운을 누릴 수 있었을까 자주 반문해본다. 모르긴해도 그에게 글쓰기는, 실현될 수 없는 동경의 신기루로만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깊은 노년기에 들어 선 그는 그 곳이 어느덧 그의 삶의 일부가 되기었다고 말하였다. 그가 입에 자주 올렸던, 창동에서 삶의 빚을 갚고 싶다고 한 말 속에는, 먼저 그 곳에서 그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지키며 여기서 삶을 다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즉,그 곳에서 글쓰기, 덦없는 글쓰기의 매혹에 변함없이 빠져들다 어느 순간 아침이슬 처럼 홀련히 사라지고 싶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글씀이란 그에게는 특별한 은총으로서 그것은 빛과 그림자의 화학적 조화의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이루는 핵심적 요소는 빛과 그림자의 대비였고, 화가 고야도 그러하였듯이. 평면의 화폭이 검은 색과 흰색의 대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 고야나 마네의 그림들의 특징이라고 어느 책에서 읽었는라고 말한 적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산문 작가 장 그러니에를 입에 자주 올렸었는데, 그 작가의 이런 표현ㅇ르 인용하기도 하였다:

빛이 현실의 표현이라면 ,

그림자는 오직 빛이 있으므로 존재하고

빛 또한 그림자에 의해서 만이 그 가치를 지닌다.

마치 액자에 둘러 싸인 하나의 그림같이.

인문에의 삶에서는 빛으로서 은비늘 반짝이는 유소년기의 아침 바다가 있었고, 그림자로서 청년기의 한 시기에 그가 기약없이 긴 시간 투병자로 은거했던 요양병원의 검은 색 희말리아 시다 숲이 있었다. 전자는 눈앞에 아른거리며 미래쪽으로 길을 열어주는 동경의 불꽃이었고, 후자는 이와는 대조적으로 무겁고 어두운 그러나 때로는 감미로운 첼로 선율이었다. 그의 회상에 의하면, 자신의 심안에 살아있는 그 둘은 곧 글씀의 샘물이 흘러나오는 수원이었다. 그의 글쓰기를 유도해준 것들, 이를테면, 먼 바다쪽, 화가들의 손, 플라멩코의 유혹, 시베리아의 숲 등이 하나같이 그의 삶에서 지울 수 없는 그 아득한 과거의 샘터에서 비롯되고 있었던 것이다.

"진정한 글은 환하게 밝은 한낮의 담소가 아니라 어둠과 침묵의 아이이다", 라고 한 마르셀 프로스트의 이 표현은 후자의 그 검은 히말리아 시다의 숲이 왜 그에게 감미로운 바흐의 헌율처럼 흐르는가를 일깨워주었다. 아마도 그 검은 숲이 그에게 없었다면 어둠속에 홀로 있을 때 시작되는 글씀은 그의 내면에서 그저 비실체의 동경으로만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인문은 자신의 아들에게는, 탕자가 미지의 삶애 대한 목마름으을 가진 동생에게 하였듯이, 아버지의 집이 있는 창동을 벗어나 먼 미지의 땅으로 떠나라고 적극적으로 권고했었다. '너는 아버지가 지키는 이 곳을 잊고 먼 땅에서 자유의 공기를 마시며 너의 삶을 살아라. 그리고 돌아오지 말라'고. 삶의 안식처가 주는 운명적인 의무의 굴레가 먼 훗날 그의 삶에 어떤 영감의 불빛이 될수도 있을지라도 말이다.

 

 

2.

0월 0일 어느 해

제갈 편집장에게!

친구의 그 물음- 무엇이 인문으로 하여금 창동에 집착케 하는가?-가 내안의 여러 상념들을 불러 일으키네. 내가 올 여름초 천주산에 젊은 대금주자와 함께 산 정상 아래에 있는 두 분 할머니 묘소를 향해 오늘이 이 손자가 이 곳에 올라 올리는 마지막 성묘임을 알리는 작별의 의식을 행한 일이 있었네. 묘소 곁 해묵은 떡깔나무 아래에 두 분 어머니, 아버지도 머물고 계시고, 제작년에는 할마버지 또한 이곳 진달래 군락지에 함께 계시게 되었네. 떡갈나무가 그들을 지켜주는 이 고요한 언덕을, 내 마음의 집을 이제는 떠나야 할 때가 되었기에 그렇게 작별의 의식을 올렸던 것일세. 한 50년전쯤 우리들이 고교 1년 때였던가 국어 교과서에 실린 <페이터의 산문>에 이런 글이 있었지 않은가:

사람은 나뭇잎과 같은 것,

가을 바람에 낡은 잎을 뿌리면

봄은 다시 새로운 잎으로 숲을 덮는다.

편집장이나 나나 둘다 나이가 벌써 나무 가지에 매달린 낡은 잎으로 되었으니 이제는 가을 바람이 점점 드세게 불어올 날에 대해 대비해야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작년 가을 어느 달인가의 회보지에 올린 나의 단상 <그라나다의 새벽>의 삽화로 친구가 찍은 사진 한 장, <플라멩코 춤>을 올린 적이 있었잖는가. 플라멩코를 춤추는 집시 할머니 한 분의 표정을 캡쳐한 친구의 그 사진 말일세. 내가 그 사진을 보고 그 집시춤에 십 수년간 매혹되었던 사람으로서 적잖이 놀랏었네. 플라멩코라 하면 거의 춤을 연상하고 플라멩코춤이라 하면 고혹적인 젊은 댄서를 연상하는 게 일반적인 일인데, 자네는 춤추는 할머니 댄서에 촛점을 맞추었으니! 범상하게 보이는 그 사진 한장이 플라멩코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거든. 그 볼품없는 늙은 댄서의 표정과 눈빛에 일종의 체념이 서려 잇었네. 그 표정은 외아들이나 남편을 잃어 절망한 여인의 슬픔 같은 것일세. 원래 그 춤은 그런 여인의 몸짓이거든. 하기야 나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 춤을 추는 한 이국의 젊은 여인을 처음 본 순간 아닌게 아니라 그 댄서에 홀려 긴 시간 그녀의 환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였던 내가 그런 말을 하다니! 돌이켜 보면, 내가 만약 젊은 나이에 그 춤에, 젊은 댄서에 빠져 들었다면, 내 삶이 어떻게 변해 갔을지, 솔직히 상상하기 힘드네.

다시 그 글 <그라나다의 새벽>으로 돌아가, 그 글속에 묘사된 그 어머니는 지금은 천주산의 그 떡갈나무아래에서 아버지와 함께 계시면서 해마다 피어나는 풀잎이 되였어요.이제는 천주산 정상 근처의 그 떡깔나무 언덕으로 더 이상 오르지는 못지만, 그 곳에 이르는 중간 통로인 달천계곡은 내 혼자 수시로 찾아가네. 그래야 마음이 가벼워지거든. 그 곳은 창동에서 버스로 한 시간 이내의 거리야. 특히 노모가 꿈에 나타나는 그 다음 날은 자신도 모르게 그 계곡을 찾게 되고. 건강히 지내게

다음에 또 연락하겠네.

인문

0월0일

친구l에게

오늘은 화가 루오의 이 한마디 보내고 싶어 노트북을 열었네:

'예술은 열렬한 고백이다."

화가의 이 한 머디로 인해 지금까지 내가 이어가고 있는 글씀이 그 첫 물꼬 터짐을 얻게 되었고, 그리고 이 한 마디로 인해 아득히 젊은 날 나의 비열한 배신의 행위가 인간적으로 지울 수 없는 분노와 상처가 되었을 사람에게 용서를 비는 이 마음을 찌르는 말이기도 하였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의 그 비열함을 더욱 더 용서할 수 없는 짓마음이 커지니, 50여년 전의 그 얼굴에 담긴 표정을 내 어찌 잊겠는가.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좀은 진지하고 진하게 되었네.

천주산에 계시는 그 아버지의 사회적 과오와 관련해서도 한 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네. 그 아버지는 내가 20대의 청년기를 지낼 때만 해도 나의 안식처였었네. 나의 결정적인 어려움은 아버지가 해결해주셨거든. 구체적인 사연들은 여기서 일일이 다 말할 수는 없네만, 내가 집안의 장손이었고, 나를 대신할 만한 정실의 남동생이 없었으니 아버지로서는 내가 마음에 들지않는 아들이라도 그럴 수 밖에 없는 형편이었네. 자네는 장남이 아니니 그런 입장에 대해 잘 느까지 못할 거야.

하여간 그런 아버지께서 사회적으로 공분을 산 과오를 행하신 게 하나 있었다네. 지금 그 분의 아들로서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그 과오 역시 내 몫으로 안고 값아야 할 하나의 빚으로 여기게 되었네. 자네도 잘 알지만, 마산의 3.15 의거의 김용실 열사를 50년이나 잊고 지내다, 몇년전인가 그 열사를 추모하는 예술제를 3년이나 이어 갖게 된 일과 관련이 있다네. 김용실 열사가 우리들의 고교 동급생이지 친구였기에 내가 앞장서서 그 추모제를 주도한 것으로 되어있었지만 , 실은 고백하건대, 거기엔 나의 내면적인 빚값음이 더 큰 몫으로 작용하였다네.

아버지의 과오나 마산의 315 의거, 그리고 김용실 추모 공연제 등 이 모든 게 창동을 근거로 하여 일이난 일이었으니 그런 요인들 역시 심리적으로 나를 창동에 붙들어 놓은 요인들이었다네.

오늘은 좀 찐한 말을 좀 했네그려.

0월0일

친구에게!

이 지역의 향토사 연구가 박영주라는 이가 보여준 사진 한 장이 내 눈을 반짝거리게 하였다네. 1950년대 전후로 여겨지는 창동외곽의 구강 마을을 하늘에서 찍은 빛바랜 사진이었다네. 그 사진과 한 참이나 마주하는 나의 기억 속 한 모퉁이에 오래 동안 묻혀있던 낯익은 얼굴들과 동네 타작마당 등이 심안에 떠오르는 것이었다네. 조금 더 가까이 살펴보니 이번에는 길가의 한 넓은 상가건물이 시선을 붙들더군. 그 곳은 옛 할아버지의 집터였어요. 시선을 그대로 둔 채 한 참이나 눈을 깜빡이었더니 어느 새 눈앞에 집 담장의 찔레꽃 넝쿨과 무화가 나무 그리고 감나무가 있는 집 마당의 고추밭에서 한 복 바지 차림으로 일을 하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히 떠오르지 않는가!

그 사진은 단순한 과거의 실체를 담은 하나의 자료일 뿐이었다.네 어떤 특별한 감성을 지닌 사진가의 손에 의해서가 아니라 비행체의 자동 카메라에 포착된 단순한 지형도일뿐인 것이었어요. 그런 단순한 자료로서의 사진 한 장이 내게 그런 감성의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었네. 오늘 이 사진이 불러일으킨 구강마을의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창동과 나의 관계가 숙명적으로 어떠한 것인가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네.

마산의 도심 창동에 가까운 해안가에 산호동이라는 동네가 있다네. 그 동네는 옛날에는 구강이 불리웠는데. 그 마을에 김병조라는 이름을 가진 한 농부기 있었네. 그 분은 조선 말엽 언제쯤인가 충청도 진천의 의성김씨 집촌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남녀 두 동생과 함께 이 곳 마산으로 내려와 정착하였다네. 나의 어머니가 바느질 하시면서 그렇게 이야기해 주시더군. 이 지역에 전부터 정착한 윗대 혈족들이 살고 있었던가봐 그래서 인지, 그 분은 형이 죽자 스무살 이전 사실상 집안의 장손이 되어 직계 선조들의 유해도 함께 안고 오셨다고 했네. 마산 변두리 해안인 가포, 다구앞 바다의 수우섬, 그리고 반동 앞 산에 그 유해가 모셔져 있는 묘소들이 있어요. 그리고 해마다 그 일곱 여덟 군데의 묘소들을 돌보는 일이 나의 책무가 되었고.

하여간 나는 일찍부터 이 창동외곽의 그런 저런 사연의 중심에 들어와 숙명적인 책무를 안고 살고 있으니 오히려 더욱 안도의 느낌을 받았다네. 지금쯤 마산을 벗어난 곳에서 내가 해야할 일을 외면하고 살고 있다면, 아마도 마음을 옥죄는 어떤 죄스럼 같은 것에 시달리며 불면을 밤을 겪고 있을 것이네. 지금의 나이 인데도 해가 바뀔 때면 묘소관리 일로 내 마음은 온통 그 일에 쏠리므로 그런 묘소돌봄 일을 하지 못하게 되면 다음해를 편안한 마음으로 맞이하지 못하게 되거든.

어쩌다 보니 <창동인블루 6>에 대한 자네의 서평 한 마디에 내가 이렇게나 길 게 고백하듯 열거하게 되었네. 천주산은 너무 높아 이제는 더 이상 오르지 못하게 되었으나 해안가 마을인 반동의 야트막한 언덕길가에 있는 지금의 묘소들에 오르는 일은 마음과 몸에 생동감이 생기네. 자네는 그 글에서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을 언급했지만, 난 이 풀베는 도구들을 어깨에 메고 낮은 해안가의 능성위의 그 묘소들에 이르면서 그 작곡가의 보리수를 흥얼거리게 된다네.

이제 그만 줄이겠네.

또 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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