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산문

창동인블루 세븐 3

jhkmsn 2019. 4. 21. 13:12

어떤 그림이 아름다운가?

1.

아름다운 그림과 그렇지못한 그림과는 어떻게 다른가?

어떤 그림이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가?

무엇이 자신의 미의식에 변화를 일어나게 하는가?

과거에는 아름다웠던 것들이 지금은 그 아름다움을 잃었거나 잃어가고있는 현상은 어찌하여 그런가?

​인문이 스스로에게 던진 얼마 전의 그런 물음들은 그 뒤를 따르며 다음 것들도 수시로 그의 산책길에 꼬리를 물고 잇는다:

예술과 아름다움은 어떤 관계인가?

시각예술은 얼마나 아름다워야 하는가?

이 물음은 회화나 조각인 기본적으로 아름다움을 전제로 한 물음이 아닌가?

아니, 아름다움이란 어떤 상태를 두고 한 말인가?

소위, 황금분활이란 개념과 미의식은 어떤 관계인가? 등등.

미술 비평가인 허버트 리드에 의하면, "미감이란 것은 역사의 흐름대로 대단히 불확실할 뿐 아니라 번번이 아주 이해할수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아주 변동이 심한 현상'이었다. 그리고 "진정한 예술연구가라면 자신이 어떠한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든 간에 시대도 다르고 인종도 다른 사람들의 미감 표현을 예술의 영역으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리드는 개인적으로 피력한 바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원시예술이나 고전예술에나 고딕예술에나, 똑 같이 흥미를 가져야 한다며, 시대에 따라 다른 미감을 표현하는 방식의 우열을 평가하기보다는 모든 시대에 걸쳐 진짜와 가짜를 식별하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게 리드의 견해였다.

리드의 이 견해는 필자로 하여금 피카소나 모질리아니와 같은 어떤 현대미술가들이 우연히 만난 원시미술로부터 특별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는 작품을 떠 올리게 하였다. 모질리아니의 경우, 그의 회화'카리아티드 여상주'는 아프리카 공고의 루바 부족이 제사용으로 만든 한 목각으로 부터 받은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라고 하였다. 피카소의 경우, 그의 표현주의적 선 드로잉 한 점, '두상'과 아프리카 레가 부족이 의식을 위해 사용했던 인물상과는 구조적 유사성이 분명하였다. 원시세계에서 제사를 위한 의식의 보조 도구가 현대의 문명사회에서 돌연히 예술품으로 둔갑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예술에 관한 한, 인문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말을 자주 들먹였다. 어딘가에서 읽었을 그 표현이 그의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이다. 그 말에는 예술은 말 그대로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한다는 판단에 입각하여 예술의 형식과 내용을 구분하는 성향이 강하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 표현은 현실의 충실한 모사나 모방이라는 기본 전제를 근거로 한 자연주의 (시각)예술관을 거부하고, 뭔가를 만들어내는 주체자의 억누를 수 없는 개인의 주관적 의식을 전제로 한 말이라는 것이다. 영국의 소설가 섬머세트 몸이 후기 인상파화가 고객을 모델로 하여 지었다고 한 소설, '달과 6펜스'은 이 예술론에 대해 피력한 글임을 잘 알 수 있다.

부연하자면, '예술지상주의'를 뜻하는 이 '구호'는 역사적으로 낭만주의에서 유래했고 자유를 위한 한 투쟁의 수단을 대변하였다. 그것은 낭만주의적 예술이론이자 어느 정도의 결산이기도 하다. 원래는 다만 고전주의적 예술규범에 대한 반발이었던 것이 더 나아가 모든 외적 제약에 대한 저항으로, 모든 비예술적이고 도덕적이며 지적인 가치에서의 해방, 특히 공리적 목표에 대한 무관심을 뜻하는 의미로 넓혀진 것이었다.

예술지상주의와 관련해서 (시각)예술을 창조하는 주체인 화가가 조각가를 두고 생각해보면, 그들 역시 이 주의에 순응하는 자세인 것이다. 즉, 공리적 목표에 무관심한 채 오직 예술성 만을 추구하는 자세로 그들이 사용하는 원료나 재료와 같은 객관적 현실의 것들을 색채나 붓 또는 조각칼 등 도구와 같은 예술적 매체를 이용해 지금까지는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주조한다는 것이다. 인문은 이 말이 쉽게 이해되었었다. 예술행위에 있어서 동일한 대상이나 내용이 다양한 방식으로 관찰되고 표현될 수 있다는 그런 주체자의 주관성이 중요한 요소인데. 자연주의 예술관은 이 점을 간과하고있다는 보편적인 사고에 그는 공감하였던 것이다. 우리 삶의 의미를 스스로 느끼며 체험하고 이를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어떤 예술양식은 모방이나 재현보다도 더욱 더 진실된 것으로 느껴진 것이다. 한 마디로, 자연에 대한 모방의 차원을 넘어 주체가 객체를 어떻게 추상하는가라는 데에 순순예술의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시야를 좀 더 넓혀 바라볼 때, 현대세계에는 다양한 예술양식이 존재하며, 예술 행위자와 그 객체 사이에는 다양한 거리가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쯤에서 인문의 개인적인 예술관으로 되돌아가 그의 의식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보자.'예술을 위한 예술'에 대한 그의 선호의식은, 예술은 현실과 얽히고 설키면서 진행되는 삶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켜준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예술은 그에게 일종의 구원이었다는 말로 들리는데, 그런 표현의 이면에는 실제적인 삶이 견디게 힘들어 현실을 도피하려는 그의 개인적인 사고가 깔려있기도 하였다. 하여간 그에게 예술행위는 ( 개인적으로 자신의 '그림읽기' 등 문학적 글쓰기를 포함하여 ) 피하고 싶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의 수단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그런 현실의 극복이기도 하였다.

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자신의 예술행위, 이를 테면 글쓰기는 것은 자신을 옥죄는 현실의 극복이었다. 처음 그의 마음에 그런 문학적 창작에 대한 열망이 차오를 즈음 릴케의 조그마한 책,'젊은 시인에게 준 글'(Brief An Einen Jungen Dichter)이 우연히 눈에 띄어 읽으면서 그 속에서 아래의 이런 글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당신에게 쓰라고 명령하는 근거를 탐구하십시요. 그 근거가 당신의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있는가를 음미하십시요. 만약 당신에게 시를 쓰는 것이 거부된다면 ,당신은 마땅히 죽지않을 수 없는가를 고백하십시요.틱히 당신은 밤의 가장 조용한 시간에 ,나는 쓰지않고는 배겨날 수 없는가 하고,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요.....

그런 열망의 혼돈속에서 좌왕우왕하던 중 시작된 그의 무모한 글쓰기는 엉뚱하게도 표현주의 화가 루오의 한 마디- '예술은 열렬한 고백이다.'-가 그로 하여금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주었고 그 때이래 자신에게는 예술행위로 믿어진 문학적 창작의 길로, 억누를 수 없는 욕망으로, 그리고 여전히 두려움을 안은 채, 한 걸음 한 걸음 들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주 오래 전부터 마음에 들어와 담겨있었던 너무나도 평범한 한 마디,- '내게는 늘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바다가 있다.'-가 그 순간 그 시작의 첫 문장이 되었던 것이다. 그 바다는 수시로 마음에서 눈앞으로 피어올라 반짝이며 아른거렸던 것이다. 이건 아주 전의 일이었다.

 

2.

​"어떤 그림들이 처음에 마음에 들었습니까?"

어느 날 오후 시간에 창동의 향숲 까페에서 인문, 제갈편집장 그리고 마술사 조군이 한가하게 함께 자리를 하고있을 때 그 마술사가 인문에게 그렇게 말을 던졌다.

" 처음 어떤 그림이 마음에 들었는가, 이런 의미의 물음이라면, 글쎄, 그건, 마술사 선생에게나 내게나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 같은데...... 아름다움을 보는 눈은 특별히 개인적이고, 상황에 따라 가변적이라서. 그렇지만 원래 인문학적 사고에 익은 내게는 그 시작은, 보편적인 말이겠지만, 그리스적 이상주의의 그림에서 비롯되었다네. 뭔가 황금분할이라든지 비례라든지 하는 그런 말들을 생각하며. 그리고 또 자연에 대한 근사한 모방이나 충실한 재현에 바탕을 둔 그런 그림이 아름답다 느껴졌었던 게지."

인문은 그렇게 답하고는 은근히 곁의 친구 제갈에게 눈길을 보냈다. 제갈은 '왜, 나를 쳐다 봐. 나더라 좋은 답을 좀 해보라 이런 의미이지." 라고 한마디 하며 웃고는 그 뒤를 이었다.

"뭐 어려울 게 뭐 있어. 인문이 전에 한창 좋아했던 그림이 있었잖는가, 한 때 내게 카시오페의 마티스 풍의 누드 그림들에 대해 열을 올리며 칭찬하지 않았던가."

이에 인문이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그땐 그랬었지. 왜냐하면 당시엔 내가 마티스의 그림을 좋아했었고, 그녀의 반추상의 인물화 그림들이 마티스의 작품들을 연상케하였으니까. 그녀의 밝은 색그림들은 보기에 단순한 색면과 간결하고 부드러운 곡선으로 되어있어, 그림을 그릴 때의 노고의 흔적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않았어요. 뭐랄까, 그녀의 뛰어난 붓놀림에 감탄했었거든. 아닌게 아니라, 마티스의 그림 '분홍의 누드'가 그렇거든. 명암이나 볼륨감도 없는데다, 따스하고 고요한 평면성이 마티스의 그 누드화의 특징인데. 그녀의 그림에서 그런 탐미적인 분위기가 느껴젔었던게지."

"인문님, 좀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키다리 마술사가 끼어들어며 인문의 말을 가로채서는 지난 날, 남들 눈에 흥미롭게 비쳤던 인문과 카시오페 간의 묘한 관계를 어제 일처럼 기억해내는 것이었다. 여기서 '묘한'이라는 표현은 남의 눈에 좀은 특이하게 보였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둘 다 서로 가정을 가진 데에다 중년들 훌쩍 넘은 사람들이이서 창동이라는 이 좁은 도시공간에서 눈에 띠게 자주 짝을 이루어 등장하였으니까. 키다리 마술사는 조금 뜸을 들이고는 인문을 바라보며 추궁하듯 그 뒤를 이었다.

" 제가 오래 전에 창동 상가회에서 아르바이트하며 여러 화가 선생님들 뵐 때 인문님 잔심부름도 이따금 했잖아요. 그 땐 헤어 스타일을 자주 바꾸며 우리 앞에 나타나던 카시오페 님도 저는 잘 기억하고 있거든요. 지금 그분이 계시지 않으니 그냥 털어놓아도 별일 없겠지요, 뭐. 그 땐 인문님은 뵐 때마다 카시오페님 하고 함께 계셨잖아요. 그림전에서나 '시와 자작나무' 카페에서 특히 두분이 함께 계신 게 자주 눈에 띄었잖았습니까?"

"그땐 그랬었지. 그런데, 둘이 자주 어울린 것과 그녀의 그림이 좋았다는 것과는 무슨 상관인데?".

인문이 갑자기 조금 상기된 표정으로 이 말에 응대했다.

"마술사 선생의 말이 맟구먼, 그녀가 매혹적이었으니 그림은 그저 도매금으로 좋았던거지. 인문, 뭘 그렇게 변명이 길어요."

제갈은 단도직입적으로 그렇게 직설을 내질렀다.

인문은 순간적으로 지난 10여년 전 이 곳에서 만나던 카시오페가 환한 미소로 눈 앞에서 신기루처럼 아른거리는 것이었다. 음악적 리듬을 띤 그녀의 빠른 템포의 목소리마져 들리는 듯 했었다. 그리고는 속으로 그녀도 이제 60 중반쯤에 이르렀겟지, 하였다.

얼마 전 세 지인들이 창동에서 그렇게 한담을 즐겼던 일이 있었는데. 이를 이 자리에서 필자가 새삼스레 꺼내는 건, 어떤 그림이 아름다운가 라는 물음 자체는 그림을 보는 눈은 너무나 개인적이고 감성적이어서, 더우기 가을하늘처럼 변하기 쉬워 ,이에 대해 객관성을 띤 어떤 논리적 대답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하고 싶어서이다. 인문의 눈에는 여러 화가들의 그림들이 세월의 흐름을 따라 주기성을 띠고 마음에 들었다 들지않았다한 경우도 있었다. 창동의 전설이 되어가고 있는 현재호의 비현실성의 그림들이 그러했었다. 또 창동의 윤종학의 그림은 긴 시간 그 색감이나 형태가 마음에 와 닿지 않더니 어느 시점부터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의 경우는 물론, 화가의 그림이 변하였기에 그러했을 것이다. 신기하게도 화가들은 나이가 깊어지면서 그림이 그 아름다움을 더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일어난다는 게, 인문의 생각이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없는 윤병석 화가의 그림은 그의 만년의 그림들이 인문의 눈에는 그 색감에 있어서, 두더러지게 아름답게 다가왔었던 것이다.

한가지 비유로, 음악을 듣는 귀가 사람에 따라 일반적으로 제마다 다르고 듣고 싶으 음악 역시 심리상태에 따라 듣고 싶은 곡이 달라지는 것과 유사할 것이다. 인문의 귀와 관련해서는 그의 귀는 엘비시 프레슬리의 팝송에도, 우리나라의 가곡 중 비목에도 친숙하지만, 베토벤과 슈베르트에 더 오래 더 자주 귀가 열려 잇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브흐의 바로크 음악에 쏠리기 시작하면서 베토벤은 너무 규격에 짜여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바흐곡의 경우, 처음엔 첼로나 바이올린 곳이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기타솔로로 된 바흐곡으로 기울어졌었다. 그뿐 아니다. 그는 노년기 들면서 우연히 듣게 된 플라멩코의 깊은 소리에 점점 더 빠져들어 지금은 자주 그 소리를 유트브를 통해 가까이 한다. 참, 매혹적이야 라고 혼자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듣는 플라멩코의 그 깊은 노래는 실은 창자의 애통(lament)의 소리인 것이다. 판소리의 경우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플라멩코의 경우, 창자의 그 극복할 수 없는 지극한 슬픔의 소리가 듣는 귀에는 한없는 아름다움의 소리가 되는 것이다.

다시 그림으로 돌아가보자. 솔직히 그녀의 그림은 보통 사람들의 눈에도 세련되고 아름답게 보였었지만, 그림을 좀 아는 이라면 그녀의 그림 앞에서는 마티스적 분위기를 쉽게 떠올렸을 것이다. 인문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그림 앞에서는 이성적인 눈이 흐려졌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아니, 그녀의 그림에 담긴 눈에 쉽게 감지되는 마티스적 분위기가 인문에게는 흠이 아니라 오히려 세련됨으로 여겨졌었으니까. 목소리에 리듬과 감미로운 멜로디가 담긴 그녀의 말소리가 그녀의 그림에 스며있다는 느낌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림의 아름다움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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