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산문

플라멩코이야기 2-2

jhkmsn 2014. 7. 31. 09:45

2.​

칸테 혼도 ( 깊은 노래)는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집시들의 노래이다.

 이 지역의  집시족들은 사회적 하층민으로서의 물리적 핍박과

심리적 억압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숙명적인 고통의 삶을 이어왔었다.

칸테 혼도는  영혼과 가슴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가진 이 집시들의

탄식이었다.​ 흐느낌의 기도였다. 이 노래소리를 듣다보면 불현듯

우리의 남도 해안의 판소리가 생각난다. 이 둘은 그 생성에 있어서나 ,

소리꾼의 주름진 이마에 새겨진 깊은 고뇌의 표정과  수리성의 거친

목소리에서나​, 서로 동질의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칸테 혼도가 스페인 남도의 안달루시아 집시족의 입과 입을 통해 전해

내려온 그들의 민속음악인 것처럼, 판소리 역시 전라도 해안을 떠돌며

척박한 삶을 이어 온 유랑소리꾼들의 구전의 소리이다. 두 노래소리

다  가난의 고통이나 물리적 박해에 시달리는 자들의 체념의 한숨이고

달랠 길 없는 슬픔의 표현이었다. 플라멩코의 경우, 그 춤은

그런 몸짓이었다.

 

무엇보다 이 둘은 한 종족의 전통의식의 표현이지만 민족과 세대를

넘어 보편적인 세상의 공통된 체험이자 정서를 반영한 것이어서  어떤

특정의 문화권에만  한계지어질 수 없는 소리문화이다. 민족적 차원을

넘어 세상 어느 곳에서나 사람 사는 곳이라면,  그 노래소리들은

실존주의적 고통을 맛 본 사람들의 마음 속으로 파고들 것이다. 

플라멩코는( 그 노래소리보다 춤이 헐씬 더 )  이미 세계인의 마음과

귀에 친숙해지있다. 우리의 판소리는 비교적으로 그런 잠재력을 지닌

우리의 판소리는 현실적으로 아직 세계화되지는 못하고 있지만.

인문은 이따금 자신의 현재의 삶이 스페인이건, 남도 소리꾼이든

그들 소리꾼의 삶과 비유적으로 다르지않다는 느낌을 갖게되었다.

그들이 사회적 박해와 가난의 고통을 받은 자들이라면, 소수 이방인의

피해망상에 시달린 자들이라면, 그 자신은 심리적으로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생물학적 노쇠와 무기력증으로  존재 가치가 거의 소멸되었다

 강박관념이 그것이다. 그래서 삶이 덧없어 하루 하루 의미없이

지내는 게 지겹다는 뜻이다. 내면에서  끊임없이 샘솟던 지적 호기심,

미 추구의식 또는 마음에서 점점 메마르고....앙드레 지드의 글귀-

그대 눈에 비치는 것이 순간 순간 새롭기를!- 앞에서도, 때로는

 인간의 늙어감에 대한 노철학자 버트란트 렛셀의​ 충고-

자아의 벽이 조금씩 좁아지고 당신의 생명이 점점 우주의 생명으로

몰입하는 것이다.​-를 읽으면서도 그저 덤덤할 뿐이다. 

 

 오래전 불가피하게 집으로 데려와 키웠던  어린 조카의 얼굴이

지금도 문득 문득 연민과 자책으로 잠 못이루는 밤을 보내기도

하는 인문이다.  그 어린애의 불안한 눈빛, 질투,기죽음, 때로는 

자신과 시선을 마주하지않는 무심한 어른들을 향해 보내는

원망의 표정 등이 떠올라 지금의 인문의 삶 속으로 파고드는 것이다.

그 아이가 어떤 어른으로 되어있을까?

그에게 지금 삶이 어떠할까? 불행하지는 않아야 할텐데...

등등이 인문의 마음에 깊은 슬픔으로 젖어든다.

 

그리고 밤이면 인문의 눈 앞에 아득한 소년기의  바다가 또한 

아른거린다. 그 바다의 눈부신 은빛 잔물결은 소년의 눈에, 

새벽 ​ 오리떼의 날개짓 소리는 귀에​, 그리고 밀물때마다 해풍에

실려오는 갯내는 코에 익어 있었다.​ 동트기 전 집마당 아래 축담에

부딛치는 파도소리에 소년 인문은 잠을 깨고 반쯤 감긴 눈으로

여명의 바다와 마주했었다. 그 바다는 새벽마다 늘 새롭게

소년 곁으로 찾아왔었고, 소년은 그 때마다 가슴 벅참을

맛보았다. 그 바다는 계절마다 내게 선명히 구별되는

빛깔과 소리와 그리고 냄새로 내게로 왔었다. 소년은 그 중에

햇살을 담뿍 안은 겨울의 늦은 아침에 수면이 마당 높이까지

오른 그 부채꼴 바다의 은삧 잔물결을 제일 좋아했었다.​

한 여름 초저녁 청마루에 누워 뒹구는 소년은  마당 아래에서

들리는 해풍의 속삭임에 마루아래로 내려오지않고는 베겨낼 수가

없었다. 방축 아래에 그 잔잔한 수면위로  까만 얼굴과  까까머리를

내면 동네소년들이 장난치며 헤엄치는 소리마져 귀를 간지럽히기

때문이었다.​ 소년의 놀이친구였던 그 바다가  쓸물 따라 어딘가 먼

바다 쪽으로 홀련히 사라진 후 다시는 돌아오지않았다. 갯벌끝

자락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둑이처럼 소년을 향해 뒤돌아보던

그 바다는 결국 그렇게 수평선 너머로 가물거리며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에 더하여 새벽 바다위로 비상하던 청둥 오리떼,

참게를 두 발로 집적되다 혼이 난 바둑이,  쓸물 따라 하늘 위로 

솟아오르며 소년의 시선을 빼앗던 방패연들,겨울 새벽의 크리스마스 송가,

동네 아이들을 뒤에 몰고 다니던  수염이 흰 엿장수의 수레와 엿가락질도

 그 바다를 따라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눈 앞에서 유영하는 옛 잔영들의 잔물결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인문은 

일어나  불을 켜고 책을 펼친다.그리고 안톤 슈낙의 아래 한 구절-

"울음우는 아이들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를 읽는다.

'작은 새의 시체위에 초추의 양광이 내릴 때 가들은 대체로 우리를 슬프고

한다.... 달아나는 기차...., 바이올린의 G선,... .' 등을 눈으로 읽으며

이 글이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리고 톤 슈낙의

이 글 외, 오래전부터 익숙한 찰스램의 엘리아의 수필을, 때로는 워싱톤

어빙의 립반윙클을 떠올린다.

 

그렇게 고립감과 무력증에 빠져들던 인문은 컴푸터를 켜고는 

화면속의,  칸테 혼도를 부르는 카라꼴의 그 거친 호흡과  ​꾸밈없는

얼굴표정, 그리고  소리꾼의 친구 동료들이 모인 패쇄된 공간의

하얀 포도주 잔,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등으르 이어지는

플라멩코에 홀려들면서 자신도 모르게 그런 무력증을,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내면의 깊은 슬픔에서 잠시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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