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망과 혼돈
1.
인문이 어느 시점에선부터 자신이 여지껏 해오던 '그림읽기' 글작업에 대해 막막함과 방향상실감 같은 것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예술은 무엇인가, 미술과 아름다움의 상관관계는 어떤 것인가 등의 물음들이 그 글작업에 혼란을 불러일으키면서 부터였다., 전에는 아름답게 느껴지던 어떤 그림이나 조각이 시간이 흐른 어느 시점부터부 칙칙한 느낌이 아름다움을 대신하는 건 무엇 때문인가, 미의식은 지적 성장과 함께 예술적 안목이 깊어지면 어쩔 수 없이 변화하기 마련인가 등등의 물음들 역시 그런 혼란을 가중시키는데 한 몫을 했었다.
창동으로 귀향한 인문이 어느 시점에선가 우연히 시작하여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어가는 그의 '그림읽기'는 돌이켜보면 20대의 긴 투병생활과 깊은 연관이 있다. 그는 그 암울한 기간 중에 늘 함께 한 것은 문학서 읽기나 레코드판 음악듣기 등이었는데, 그 때 소일 삼아, 순전히 소일 삼아 가까이 한 화첩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집중력을 요하는, 글만 빼곡히 찬 문학책의 페이지보다 그림이 더 많이 담긴 페이지를 넘기는게 헐썬 더 쉬었다. 그림책은 침상에 비스듬히 누운채 페이지를 넘기며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 그의 마음에 오래로독 남은 것들 중에 하나로, 북구의 표현주의 화가 뭉크의 화첩이 있다. 인문의 마음을 사로 잡았던 것은 그림의 주제였고 화가 자신의 글이었다. 뭉크는 그에게는 그림그리기에 보다 언어적 표현에 더 익숙하였던 화가로 기억되고있다. 예컨대, 이런 표현이 그런 것이다:
" 만약 내게 불안과 질병이 없었다면, 나는 방향타가 없는 배와 같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인문 자신의 경우처럼, 뭉크는 폐를 앓았던 화가였던 점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가 또 한 사람의 화가로 이태리 태생의 파리파 화가 모질리아니를 좋아했는데, 화가 모질리아니 또한 젊은 나이로 요절한 폐결핵 환자였다. 어쨋건 뭉크와 관련해서는 그 때에는 지금에나 그의 그림들은 시각적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있는 그림들이 아닌가! 그림은 무엇보다 아름다워야한다는 창동의 화가 허청륭의 주장에 인문이 고개를 가로 저었던 것은 그가 결핵환자로 보낸 젊은 날의 특별한 체험이 뇌리에 남아있던 점도 하나의 요인이었다.
"당신은 이 냄새를 느낄 수 없는가요? 냄새라고요. 지금 내가 썩어가고있음을 당신은 알아차리지 못하는군요."
이 글은 뭉크와 그의 지인 한 사람이 뭉크의 그림 한 점을 앞에 놓고 나눈 대화의 한 토막이다. 인문에게는 이 글은 너무나 리얼한 표현이었다. 왜냐하면 투병중에 그는 객혈의 전조로 가슴에서 목구멍으로 올라오던 피고롬 냄새를 오랜 후에도 기억할 수 있었으므로 뭉크의 불안감에 남다르게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화가의 그림은 그가 청년기에 긴 시간 머물렀던 '마의 산'의 한 겨울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하여간 그의 그림읽기에는 그런 사연들이 바탕에 깔려있다.
근자에 이르러 인문의 마음에 부쩍이나 자주 떠오르며 자신의 '그림읽기' 글작업을 주저하게 하는 것들은, 다시 말하지만 이런 것들이다:
어떤 그림이 아름다운가, 아름다운 것과 그렇지못한 것 사이에는 어떤 기준이 있는가? 무엇이 자신의 미의식에 변화를 일어나게 하는가? 과거에는 아름다웠던 것들이 지금은 그 아름다움을 잃었거나 잃어가고있는 현상은 어찌하여 그런가? 어떤 아름다움은 왜 죽어가는 것일까?
그의 내부에서 그런 물음들이 뒤섞여 그의 사고의 질서를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지난 시대의 많은 화가들에게서 별견되는 배경의 화려함, 정확한 구도, 정제된 세부묘사를 부인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회화의 변함없는 아름다움의 요인으로 더 이상 유효하지 않는 것이다.
좋아하는 화가의 아틀리에 들어선 미술애호가 중 어떤 이는 가장 완성된 그림을 밑그림이거나 주제의 핵심요소를 위한 배경쯤으로 생각한다. 인문도 그런 적이 종종 있었다. 그가 즐겨 방문했었던 창동화가들- 이를 테면, 현재호, 남정현, 허청륭-의 아틀리에의 그림들 앞에서 그런 느낌을 받긴 했지만 화가들에게 직접 자신의 궁금증을 말하지는 않았었다. 창동 외곽의 해안가에 살았던 추상화가 진기철의 집을 그가 바다바람도 쐴 겸 들리곤 했었는 데 그 때마다 그는 그의 작업실의 그림들 앞에서 특히 그러했었다.
사실을 나타내는 그림들보다 데프로메숑된 그림들을 훨씬 더 좋아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는 그림에 대해 꼬장꼬장하게 가리는 편이었다. 그는 저급하고 음울한 현실을 그린 회화에는 눈길을 오래 두지않았다. 그가 풍경화를 택한다면, 터너의 그림처럼 조난선을 뒤흔드는 성난 대양의 그림이나, 코네의 지중해의 바다그림들 처럼 푸른 빛 가득한 눈부신 바다의 그림이었다. 그는 긴 시간 그런 인상주의 화가 모네에 심취했었다.
인물화에 관해서도 사실주의적 묘사에 돋보이는 초상화를 사진같다는 느낌 때문에 좋아하지 않았다. 대신 빛과 그림자의 선명한 대비로 주제의 표현주의적 요소가 강한 초상화를 좋아하였다. 렘브란트의 그림이 탁월한 사실성을 바탕으에 두면서도 대상에 대한 묘사는 생략한채 빛과 그림자를 주제로 그린 초상화들을 그는 오래동안 마음에 들어 했었다. 이런 것들은 본질적으로 전통적인 미적 회화의 요구조건이 아니던가? 회화란 " 가시적인 대상들의 완벽한 모방으로 그 목적은 시선을 현혹시키는 것"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던 것처럼, 그건 단지 완벽한 모방을 연상케 하는 '트롱프 뢰이유' , 즉 환영추구를 찬미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인문이 예술적 탐미성이 더 깊어짐에 따라 회화의 아름다움에 관해서 그의 시선이 그렇게 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대한 사례를 좀 더 이어가보면 이렇다:
그가 사실주의 그림에서 멀어지면서,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모네, 쇠라, 르노와르 등 비롯한 인상주의 화풍의 풍경화들을 마음에 들어했었고, 뒤이어 원근법이나 평면성을 극복하려한 드가, 세잔느 고갱쪽으로 눈길을 돌혔다. 고호의 그림들은 변함없이 그의 시선을 붙들었다. 원색의 색선들의 두더러진 물결침이나 과감한 데프로마숑이 현저한 그림이 지닌 회화성에 더하여 화가의 편지에 담긴 언어적 표현으로 인해서 였다. 뭉크의 그림처럼 표현성이 강한 코코쇼카, 에밀 놀데, 앙소르 등의 표현주의 그림들에게도 친숙해졌었다. 노울데의 서툰듯한 솜씨의 비재현적인 작품인 '촛불과 댄서들'은그 격정적인 표현성으로 눈길을 오래도록 붙든 그림이었다. 뒤를 이어 입체주의 화가인 파카소와 브라크가 눈에 들어왔었다. 피카소는 그의 입체주의성향의 작품으로 인해서라기보다 그의 청년기의 '청색시대' 작품들의 그 처연한 서정성으로 인해서 더 그에게 끌렸었다. 인문의 시리즈의 글 '그림읽기'의 제목이 '창동인 블루'( Chang Dong in Blue)로 된 것은 실은 그 피카소의 ' 청색시대'(The blue Period)'에 홀려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이어 그의 시선은 브랑쿠지의 추상의 조각품에 머물며 로댕의 사실주의적 작품들에게서 마음이 멀어지게 되었고, 칸딘스키의 순수추상을 넘어 급기야는 물감뿌리기의 회화인 미국의 뜨거운 추상표현주의도 마음에 와 닿기도 했었다. 그 뒤에 나타나 그를 회화의 숲에서 길을 잃게 하나 워홀의 그 상업적 팝 아트나 누구의? 만화 작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