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산문

창동인블루6-6-2

jhkmsn 2018. 5. 22. 09:03


                                  2.


인문은 전부터 평면의 그림 속의 빛과 색채 그리고 형태를  지속적인 관심으로 탐색하였고 인상주의자 모네, 후기 인상파 고흐, 야수파 성향의 마티스를 자신의 감성으로 통찰하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제와 오늘의 창동 화가들 - 이를테면,  김대환, 변상봉, 허청륭, 남정현, 윤복희,김경미- 등에 글쓰는 이로서 애정어린 관심을 보여왔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니 그는 그림속의 춤, 또는 바흐의 기타곡에 감성적으로 매료되기도 하고요. 탈재현 형식을  중요시 여기는 추상화가인 제가  인문의 이 회화적 단상의 글에 주목한 것은 솔직히 그와의 오랜 개인적 친분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그의 이른바 글그림을 특별한 주제로 삼아 여러분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인문은 화가 변상봉을 좋아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화가는 한 때 그에게 그저 그렇고 그런 화가였던 적이 있었답니다. 이를 테면, 묘사력이 뛰어난 누드화가로, 후배 화가들과 어울려 현장을 찾아 회화적 대상을 직접 관찰하는, 마음씨 너그러원 교수로만 여겼졌었던 적이 있었다고 인문은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화가에 대한 인문의 그런 선입견을 바꾸어놓은 것은 들로아크라의 이 말 한디로 인해서 였다고 인문이 말했습니다: 화가라면, 5층 건물에서 떨어지는 사람이 바닥에 닿기전에  그 떨어지는 이미지를 화폭에 포착할 수 있어야한다. 
이 대목의 글을 어느 책에서 처음 읽었을 때 인문은 창동의 변상봉 화가를 연상하였다고 했습니다. 변끊임없는 관찰과 습작이 아니고서는 어느 누구도 화가 다운 화가가 될 수 없다는 의미의 그 한마디는, 인문에게는, 곧 선적 묘사력이 탁월한 화가 변상봉을 두고 한 말이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현장'이라는 말에는 사실주의적 속성을 뛰어넘는 의미가 담겨 있다는 점도 그러하였던 것입니다. 그 점은 브랑쿠지의 조각품 < 나르는 새>와 만나고부터 <현장을 찾는 화가들>의 그 '현장'이라는 말이 사실은 대상의 관찰을 뛰어넘어 내면적인 지각체험을 시각화하는 작업과 연결되어있음을 뒤늦게 깨닫게되고부터였다고 했습니다. , 현장을 찾아 관찰하고 습작하는 일은, 단순히 리얼리티 개념의 묘사를 위해서가 아니라,개성적 시각화를 위한 지각체험을 위해서 임을 인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말에 의히면,부랑쿠지의 조각춤 <나르는
  >, 항상 똑 같은 이미지의 리일러티 개념의 새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하나의 점이나 반짝이는 작은 빛으로, 혹은 하늘을 휘감고 오르는 곡선으로 표현되어있다는 것이지요. 우아함과 속도감이 담긴 하나의 추상적 형상인 것이다. 그건 개인적 지각체험의 과정없이는 이를 수 없는 예술적 결과물이었던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화가의 손을 부러워해온 그는 자신이 붓을 손에 쥘 날이 오면 꼭 그림으로 남겨두고싶어  그가 그런 단상의 글그림을 메모해 둔 것은, 무엇보다  그가 언젠가 자신이 붓을 손에 쥘 날이 오면 그 메모를 바탕으르  직접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그랬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렇지 못을 경우, 혹시라도 어느 화가에게 그 메모를 보이면 좋은 그림이 생기지않을까 그런 생각도 막연하나마 했을 것 같습니아. 오늘 이 자리에 인문님이 와 계시니 나중 자유 토론시간에 그에게 직접 물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가지  첨언하자면, 그는  심안에 이따금 나타났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그런 형상들을 막연한 기대로 그렇게 글로 스케치하였다고 말했습니다. 감은 눈 앞에 아련히 흔들리는 그 형상들을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꼭 붙들어두고싶어 그렇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평소 그림을 좋아하여 창동의 여러 화가들-김대환, 현재호 남정현 하청륭 등-)  어울리며 그들에게 이른바 '에콜드 창동'그룹이라는 이름을 붙여주기도 하였습니다. 유틀릴로 샤갈 등 프랑스의 '에꼴드 파리'를 연상하면서 그렇게 이름지었다고 하더군요 .이들은 서정성이 진한 비 추상화 화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추상화가로서 제가 이 글그림을 처음 읽었을때 그의 이 글그림들은
  시대에 매우 뒤쳐진 그림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게는 묘사라던지 재현이라는 말이 좀은 거부감을 느끼는 화가이니끼요. 사진으로찍으면 될 대상을 그렇게 글로 묘사한 것을 보면 인문은 그림그리는 사람이 엔간히 부러웠난 싶기도 했습니다. 솔직히 추상화가라면 그런 글그림은 아예 생각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 추상화인가 하고 묻는다면,  그림그리는 손을 가시적인 것의 재현과 구상의 속박에서 해방시켜주고 싶어서라고 단순히 말하고 싶습니다. 그림이란 그저 상상력과 감수성으로 색채와 형태를 조화시키는 것이지, 자연속의 대상을 화면위에 재현하는 작업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인문의 경우를 생각해보니, 글로서는 그렇게 될 수 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추상의 것,이를 테면 선이나 색면이나 물간 자체의 흐름 등으로 이루어진 형태를 글로서 어떻게 묘사하거나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이제 그 페이퍼의 글을 읽는 것으로 그의 글그림을 감상해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부채꼴 바다, 오두막의 두목, 키다리 춤쟁이, 귀먹은 곽씨, 그리고 바둑이.그라나다의 새벽 등이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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