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박춘성화가의 개인전 후 어느 평일에 인문이 박춘성과 윤용화백과 창동의
홍화집에서 만났다. 이날엔 두 화가와 격의없은 사이인 정숙 화가도 함께
자리하였다. 지난 1960년대를 전후하여 마산의 창동지역에서 작품활동한
화가들, 이를테면 이림, 최영림, 양달석 등과 친밀한 인연이 있었던 박춘성을
통해 그 화가들의 그림세계를 좀더 가깝게 맛보고 싶어한 자리였다.
창동의 홍화집은 몇해전까지만 해도 경남대의 고정자봉교수와 고허청륭
등이 자주 드나들며 술과 정담을 나누었던 음식점으로 홀에 들어서면
입구의 오른쪽 벽에 걸린 마티스의 '푸른 누드'가 주객들의 눈길을 끌기도
한다.
최영림에 대하여.
윤용:
나는 이 집에 올때마다 정자봉교수가 떠올라요. 그 분의
손은 남달리 두텁고 따뜻해서 그 분의 옆 자리에 앉은 여성은
추운 겨울 따뜻한 난로가에 앉은 기분이 든다고들 했습니다.
인문:
그의 두터운 손을 그리운 마음으로 기억하는 분들이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먼저 그 분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수필같은 사정적 산문적 언어들이 귀를
통해 회상하되고 그리고 이어 두 눈에는 옆자리에서 술잔을 함께 나누는
여성의 손을 잡고있는 그의 두터운 손과 노랫말이 빼곡히 들어찬 그의 작은
노래수첩이 떠오르기 마련이지요.
박춘성:
두 분의 주고받은 대화가 어찌 주제와는 상관없는 방향으로 향하는 것
같은 데여. 정작가, 아니 그런가요?
정숙:
그러게 말입니다. 그렇지만, 세분 중에서 손이 제일 두툼한 박춘성 화백이
제 옆자리에 계시니 저로서는 문제될 것 게 없는 데요. 게다가, ?
윤용:
최영림의 삶과 그림세계라는 본 주제에 들어가기 전에 약간의 준비작업이
필요하기에 조금 익살을 피웠습니다. 그래도 정작가는 박화백의 손이
가까이 있는데에 오히려 좋은 느낌을 가지는 눈치인 듯 한데요. 인문도
동의하는 눈치인데요..
인문:
그럼요. 사실 전에는 최영림의 ,좀 에로틱하고 해학적인 그림들을
통해 막연하나마 그런 그림의 연장선상에서 화가를 생각했거든요.
어려움을 겪지않은 유쾌한 분으로 막연히 느끼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싱겁기조차 한 분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예상을 크게
벗어나는 화가이더군요.
박춘성:
인문이 나의 그림에서 그 분의 그림을 연상했다면 그럴 만도 했을 것입니다.
대학에서 그 분의 가리침을 받았으니까요. 평양태생의 그 분은 실향민으로
그림을 통해서나마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느끼고 싶어했던 것 같아요.
윤용:
아니 ,뭘 그렇게 완곡하게 말해요. 그냥 두 분다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머리속에서 지워지지않고 맴도는 아득한 시절의 고향의 정취를,
그 속의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그림으로나마 이웃의 귀에 대고
소곤거리고싶어 안달이 난 분들이라고 말하면 될 걸 가지고.
인문:
화가 최영림이 오래전부터 제게 친숙한 화가로 여겨진 데에는
'사루마다' 라는 일본 말이 최영림의 이름을 이따금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 일본 말은 '속옷 하의'를 의미하는데 ,그 말은 아득한 날 나의 소년기때
동네 타작마당에서 들었던 동네의 한 노처녀와 관련된 단어입니다.
그래서 그 말은 생각 날 때 마다 웃음짓게 합니다.
정숙:
아니, 인문님 그 사루마다는 노 처녀의 것이었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인문:
그런 셈이지요.한 여름 어둑 어둑한 저녁에 타작마당 곁 포도밭에서 나오던
그 노처녀가 마침 저녁 마실나서는 동네 한 할멈을 보고 깜짝 놀라 달아나자,
이를 이상하게 여긴 그 할멈이 그녀가 나온 포도밭 안을 한번 들여다 보니
햐얀 뭔가가 눈에 띄길래 뭔가 싶어 다가가 집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바로 그 '사루마다' 더랍니다. 할멈이 얼른 그걸 주어 방금 사라진
그 쳐녀 뒤에 대고 그 '사루마다'를 흔들며 이것은 입고 가여지 했었답니다.
'그때이래 사루마다는 입고 가야지' 하는 우스게가 동네 아낙네들 사이에
나돌았답니다. 아득한 옛날의 구수한 이야기이지요. 전 지금도 최영림의
작품 중 포도밭인가, 보리밭인가 하는 제목의 아래의 그림을 보면
'사루마다'가 저절로 떠올라 씩 웃습니다. 이런 심상을 한가하게 그린
이 화가는 삶이 참 행복했던 분이었던가봐 하면서 말입니다. 실상은
싱거운 분과는 거리가 먼 진지한 분이었을을 알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그 분에 비해 박화백은 상대적으로 이웃의 눈치를 좀 살피는
분인가 봅니다. 그림마다 여인네들의 큰 젖가슴은 다 드러내놓게
하면서도 정작 온 몸이 햇빛아래 그대로 드러나는 누드는 그리기를
주저하거든요. 세분은 아마 영국의 수필가, 찰스 램에 대해 들어보셨겠지요.
문득 최영림과 이 수필가의 삶이 그 궤를 같이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이 수필가의 작품' 돼지구이론'의 따스한 유머와
그의 숙명적인 비극의 삶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수필가입니다.
저는 그 분의 글(번역문) 참 좋았습니다. 그의 원문은
지금도 너무 어려워 손에 들기가 무섭고요.
박춘성:
찰스 램의 '돼지구이 이야기', 참 구수하네요.
윤용.
난 그 그 '사루마다' 이야기가 모처럼 술맛 돋우는데요.
.그 참 허허, 싱겁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