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산문

r창블인5-3-6

jhkmsn 2017. 1. 29. 19:45

                   6.


문신, 김종영, 르네상스적 예술가, 창원, 예술비평가, 대칭,시메트리,

불 균형과 비대칭 asymmetry


북 카페 <시와 자작나무>에서 윤용화백이 '김종영과 문신, 두 조각가의

예술세계'를 아래와 같은 취지로  발표하였다:


           '아래'                 

지역 출신의 걸풀한 조각가 두분의 작품에 대하여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게 본인은 화가이지 조각가가 아니다. 예술가에 대해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예술 비평가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 자리는

두 분 예술가에 대해 한 화가가 평소에 가진 주관적인 느낌의 표현임을 미리

밝힌다. 먼저 두 분은 이 고장인 창원출신 조각가이지만, 실제로 한 분은

서울에서 교수로, 다른 한 분은 프랑스의 파리에서 창작활동에 전념한

국제적인 조각가로 (특히 유럽지역에) 더 잘 알려진 인물이다.

대별하여 보건대, 전자는 선비적 품성의 사색적 예술가인 반면,

후자는 빼어난 장인의 손을 가진 조각가이다. 그리고 두분의 조각품에서

서로 대비적인 점으로는, 전자의 작품에서는 asymmetry(불균형, 비대칭)를

통한 동태성이,후자에서는, 잘 알려진 바대로, symmetry(균형)이 특징적이다.


이 두 조각가의 경우, 한 분은 '포시옹의 손의 예찬' 이전의 예술가인 반면,

자 문신은 그 '손의 예찬'시대의 장인이다. 전자가 문인화가풍의 김정희를

연상케 하는 조각가로 '사유의 존재'라면, 후자는 화업에 대한 자부심 강한 장인,

즉, 조각가나 화가에게는 특별한 사유하는 손이 있다는 말에 합당한 장인으로

느껴왔었다.

전자는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또는 '존재의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적 사색자로서의 예술가였다면, 후자는 윤화백의 주관에 의하면

전형적인 르네상스적 장인의 삶을 살았던, 이를테면, 쉼없는 탐구의 손을

가졌던 인물이다. 김종영에게서 세한도를 그린 추사 김정희의

선비적 기질이 연상된 반면, 문신에게서는 오로지 손으로 탐구의 손으로

자신의 길을 개척한 장인의 삶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두 예술가는 사회적 통념과 인습에 그런대로 잘 어울린 삶을

영위한 예술가들이었다. 술이나 약물이 주는 탈이성적 비약으로서가 아니라

이성적 판단과 절제력으로 자신들의 예술세계를 가꾸었던 조각가들이었다.

문신은 파리에서 긴 시간 활동한 문신은 몽마르트르의 보헤미안과는

다른 사회적 삶을 살았던 예술인이었다.

김종영 조각가는 한국의 선비적 정신을 곧게 지켜온 조각가라는 점에서

1950년대의 그리니치 빌리지의 히피족 들과는 다른 예인이었다.

오늘 날 창동을 마음의 고향으로 삼아 순탄하게 살아가고있는 화가들,

이를테면, 박춘성, 윤종학, 박순흔, 조현계, 이용수 등 화가들은,

그리고 저 윤용도 기존의 사회적 질서속에서 합리적인 삶을 누리는

화가들이다. 이 지역화가들이 술을 좋아한 분들이긴하나 그들의 창작열은

알코올의 도움과는 거리가 멀다.

지난 날 보헤미언 예술가들에게 동경의 시선을 보내며,

'도취할 수 있는 자 만이 참된 생의 불꽃을 본다는 구절을 사랑한

인문과 같은 창동의 사색가( 저 자리에 앉아 계신 분이  바로 그 분입니다)

에게는 그런 점에서 사회적으로 조화를 잘 이루며 살아 온 두 예술가의

삶은 그에게 새로운 물음이 되었을 것이다. 두 분 예술가가는 그가 사색해 온

예술가형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문은 아래와 같은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스스로 답하였으리라 여겨진다:

"두분 예술가는 손의 촉감을 넘어 목수나 용접공의 도구까지

다루어야하는 조각가이었기에, 어쩌면 스스로 몽롱한 안개빛 몽상을

경계했으리라. 그들의 예술은 무엇보다도 몸의 강인함과 흐트러짐 없는

마음가짐이 주는 선물이라고 여겼으리라.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의 손은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하였으리라. 취한 눈으로 어떻게 망치질을, 톱질을

하면서 돌이나 나무 심지어 청동과 씨름할 수 있었겠는가?


김종영의 조각.

김종영은 주로 돌이나 나무같은 단단한 재료를 주로 다룬 조각가이다.

브른즈 같이 다른 사람(기술자)의 작품을 제작하기보다 돌이나 나무를 직접

깎거나 쪼아 가면서 완성하는 ​작품을 선호하였는데 , 이는 작품의 제작과정

자체를 중요시 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돌이나 나무를 다듬어 가는 것은

자아수련의 방편ㅇ로 , 작품 제작의 목적이 '완성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과정'에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붓글씨를 쓰거나 사군자를 치면서

자신의 인격을 수양한 선비같은 조각가였다.그는 돌이나 나무를

쪼게거나 다듬는 과정을 통해서 인격을 '조각'한 이를테면 선비형

조각가였다.

흔히 '不刻의 미'라는 표현으로 김종영의 미의식을 언급하는데,

이는 완성에 대한 ​작가의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김정희에 이어 김용준이 손재주와 기교에 대해 거부하였듯이,

지나치게 다듬어 완성된 표현은 인위적이고 장인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그가 추구한 조형세계는

순수예술세계이다. 목적론적인 것을 거부하고 순수한 미술셰계를

지향하였는데, 이 것의 궁극적인 목적은 참선처럼 자신을

다듬는 작업이었다.

그가 추상조각을 제작하엿기 때문에 그를 최초의 '모더니스트'

라고 평하기도 하지만, ...'불가의 미'나 '기교가 치졸하면

할수록 맛이 진진한 것'이라ㅏ는 주장은 기술적으로 다듬는 일에

관한 거부이며, 이는 '단순하고 소박할수록​,그리고  내용과 정신은

풍부할수록 좋은 것이라는'문인화가의 주장과 상통한다.​

不刻의 미, 손재주의 기교에 대한 거부의식.

지나치게 다듬어 완성된 표현은 인위적이고 장인적인 것이라​는 뜻.

자연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보다 간결하게 표현하는 추상양식이

그의 기질에 잘 맞아. '단순하고 소박할수록​, 내용과 정신은 풍부할수록'

이라는 문인화가의 기풍을 지니고 있었다.​


문신의 조각.

문신은 좌우대칭의 정제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기하학적 추상조각으로

유럽지역에서 크게 명성을 얻은 작가이며 한국현대미술의 지평을 넓힌

예술가이다. 국내외 평론가들은 그를 ‘좌우 균제미의 대가’ ‘작품 속에

우주원리를 담아내는 작가’라고 평했다. 추상조각이지만,

하늘을 날아오르는 나비, 박쥐모양이나 꽃, 새 등 자연의 대상을

연상시키는 그의 작품들은 간결하면서도 풍만한 선, 대칭과 균형,

곡선의 아름다음으로 독창적인 세계를 일궈냈다

문 신은 마산출신으로 도쿄의 일본예술학교에서 유학하였으며

귀국 후 10여 년간 화가로 활동하다 프랑스로 건너가 입체조각에

몰두하면서 조각가로 변신하여 유럽화단을 누볐다.

70년 유럽의 발카레스 해변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엄에서 흑단으로 제작한

대형조각<태양의 인간>으로 명성을 날렸고 73년 피카소 사후 추념조각을 제작해

찬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는 고향 마산을 잊지 못해 1980년 영구 귀국한 뒤

이 도시에  문신미술관을 건립하였다. 그의 유업에 따라 소장 미술품은

대부분 마산시에 기증되어 현재는 창원시립문신미술관으로 이어지고 있고

일부는 숙명여대에 기증되었다.
조작가 문신은 전 생애동안 “노예처럼 일하고 신처럼 창조한다.”는

치열한 예술관으로 독창적인 <문신조각>을 정립했다. 지난 95년에

74세를 일기로 작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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