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후기인상주의, 표현주의, 루오, 은박지 그림, 피카소의 펜촉 그림, 보헤미안 예술가,
모질리아니, 로테렉, 그라나다, 세크라몬테, 알레그리아스춤, 비노 블랑코, 도스토에프스키,
시베리아의 빠리, 이르쿠스크, 바이칼 호수
인문은 마산 시외버스 터미날에서 윤화백과 헤어진 다음 집쪽으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의 석전동 집은 터미날로부터 걸어서 1시간
이내의 거리에 있어 그는 전에도 별일 없으면 혼자 한가히 걸어서 집에
가곤 했었다. 그는 혼자 경남은행 건물앞 대로를 지나 석전교에 이르러서는
오른쪽으로 돌아 넓은 개천을 따라 회성동 방향으로 걸었다. 두척계곡쪽에서
수출자유지역의 해안으로 흘러들어가는 이 개천은 근래에 이르러 오리들과
학 한 두어마리까지 날아들만큼 수로가 깨끗해지고, 개천 옆으로 걷기에
좋은 목조 데크길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이 날은 학 한 마리가 개울 가장자리에 꼼짝않고 서서 긴 목을 빼고 발 밑
수면을 응시하고 있기에 그는 바쁘지않은 걸음을 멈추고 난간에 두 손을
얹고는 학쪽으로 시선을 모았다. 학의 부리가 물밑 먹이를 언제쯤 낚아챌
것인지 지켜 볼 요량이었다.
학도, 인문도 그렇게 그 자리에서 한 참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늦은 오후
교통이 번잡한 대로와는 대조적으로 이 개천은 그렇게 한적한 풍경을
이루고있었다. 인문은, 시선은 그대로 둔 채 마음으로는, 어느 새 아까
버스속에서 윤화백과 둘이 나누던 대화를 떠올리며 혼자 중얼거림으로
둘 사이의 이야기의 그 다음을 이어가기 시작하였다.
이중섭화가는 어찌하여 그렇게나 세상 물정에 눈이 어두웠을까.
그림 판 돈, 좀 아껴 쓸 줄 알았다면 젊은 나이에 그렇게나
비참한 최후를 맞지는 않았을텐데. 호주머니에 돈이 들어오면
지인들과 술 마시며 탕진하기 일쑤였다니.
그 큰 덩치에, 철없는 아이도 아니고, 소주병 옆에 두고 그냥 방바닥에
엎드려 손바닥만 담배갑 은박지에 꽃게,아이들 그리고 마누라 얼굴이나
긁어그려넣고. 참 안됐어.
그런데 그가 일본에 유학중일 당시엔 일본 미술계엔 이미
서구의 모더니즘이 만연해있었음이 분명해. 그의 그림세계엔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또는 표현주의에 심취했었음을 짐작케하는 흔적이 그림
여기 저기서 나타나거든. 그의 유화들에게서 얼핏 루오의 어두운 색감이
느껴졌었고, 어떤 은지화에서는 피카소의 펜촉 드로잉이 연상되거든.
벗어날 길 없는 힘겨운 삶 속에서 차라리 그도 빠리의 보헤미안 예술가들-
로트렉이나 고호 특히 모질리아니 등-처럼 오로지 예술지상주의적
삶속으로 스스로 빠져들어 신화로 남게되고싶다는 그런 막연한 유혹을
받지는 않았을까...
한 자리에 꼼짝않고 서서 물밑을 노리던 학이 얼마 후 먹이사냥을 단념한듯
두어번 날개짓을 한 후 슬그머니 딴 곳으로 날아가 버렸지만 인문은 학이
서 있었던 개울쪽에 시선을 그대로 둔 채 서 있다. 마음속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념의 개울을 멈추게 하고 싶지 않아서 였다:
그건 그렇고,
내 삶에서 만난 또한 예기치 못한 일들은 또 어떻구.
50중반을 넘긴 나이에 먼 곳을 향한 열렬한 동경이 없었다면,
그리하여 낯선 땅에서의 예기치 못한 특별한 체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였다면, 지금까지의 내 삶은 얼마나 무미건조할까:
낯선 도시의 아늑한 까페,
하얀 머그 잔에 가득 담긴 검은 향기,
안개비 내리는 오후의 바깥 풍경.
플라멩코 댄서 로레나로부터 온 이메일의 ,가슴 뛰게 한 마지막 구절-
'모레 오후7시에 나의 스튜디오에서'.
그리고 그녀의 플라멩코 춤과 이 표현-
"바일라오라의 두 팔의 동작은 너무나 중요하다.
두 팔은 땅을 딛고 선 몸을 필사적으로 하늘 위로
솟아오르게 하는 새의 양날개와 같기 때문이다".
그의 심안은 어느새 먼 곳, 그라나다로 향한다. 이 도시의 집시마을인
세크라몬테의 라 로시오 플라멩코 플라멩코 따블로의 무리들 틈에서
비노 불랑코의 향기에. 춤꾼의 알레그레아스 춤에, 쉰 목소리의
소리꾼이 부르는 아득한 노래에, 그리고 기타반주자의 별빛 반짝임의
트레믈로 선율에 다시 취한다:
'아! 그런 도취감을 다시 맛볼 수 있다면!'
이어 그의 심안은 어느 새 시베리아 철도의 3등칸에 앉아있다.
밤낮으로 달리는 열차속에서,반은 두려움으로, 반은 호기심으로
열흘 이상이나 밤과 낮을 숨죽인 채 보낸다.
그는 지난 날 이웃 마실 나가듯 ,뭔가에 홀린 듯 모스코바 행 비행기에
올랐적이 있었다. 시베리아에 가고싶어서 였다. 청년기에 읽은
토스토에스프스키의 글을 몸으로 느끼고 싶어서 였고, 시베리아의
빠리라는 작은 도시 '이르쿠스크'에도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 도시는 봐이칼 호수에 가깝다는 말에 그 곳을 시베리아 여행의
목적지로 삼았던 것이다. 그는 기독교적 믿음이 돈독한 자신의 가족과
종교심이 없는 그가 어떻게 하면 서로 조화롭게 잘 지낼 수 있을까라는
해묵은 물음이 그에게 있었고,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을 혹시 그 호숫가에서
얻을 수 있지않을까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훌쩍
모스코바행 비행 티켓을 샀었던 것이다. 그 때 그 돌연한 여행을 부추긴 요인
중에는, 돌이켜 보면, 이런 한마디 글귀도 있었다:
'참된 기도의 의미를 깨닫는 길은 가을의 바이칼위에서 일뿐이다.'
그런데 그가 그 해묵은 물음의 중압감을 털칠 수 있었던 것은 시베리아 여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먼 여행에서 지친 심신으로 집에 돌아 와 우연히 펼쳐 든
밀린 쿤데라의 책<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에서 눈에 띈 아래의 한 줄의
글귀를 통해서가 아니었던가.
-나는 나의 무심앙과 그들( 나치에 대항한 레지스탕스 동지들)의 신앙이
묘하게도 비슷하다는 그런 이상하고 행복한 느낌을 맛보며
성당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무모하기조차 한 그런 여행은 50대 이후의 나의 삶을
풍성하게 만든 축복이었어! 그런 여행이 내게 준
충만감이 없었다면, 내 안은 다른 무엇으로 채워졌을까?
무엇보다 그로 인해 나의 글쓰기를 채워나갔던 풍성한
글재료들은 또 어떻구.
그런 먼 길 나섬을 청년도 아닌 내가 어떻게
그렇게 조심성도 없이, 마음의 준비도 없이 훌쩍 나서다니,
맨정신이 아니었던가봐.
무언가에 홀리지 않고서야 어찌 그런 즉흥적인 일탈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그건 아마 오래동안 가슴 깊숙한 곳에 숨을 죽이고 살아 온 헤밀린의
그 마적수의 손짓에 자신도 모르게 끌려 그렇게 되었던 것 아닌가.
그럴 수도 있었을거야. 그게 아니고서는 그걸 달리 설명할 길이 없으니.
그의 상념은 꼬리를 물고 이번에는 LA의 어린 손자에게로 향한다:
그 참! 그녀젓이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어 엄마에게 투정을
부린다니, 어디 이 녀석 투정 버릇을 고쳐줄 수 있는 묘책이
없을까? 걔가 이 곳 곁에 있다면 헤믈릿의 풍적수와 아이들 이야기를
반쯤 들려주면 귀가 솔깃하여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 시키는 대로 얼른
박차고 나올 수도 있을텐데.
아니면, 내가 그녀석 나이인 6살 적에 내 귀를 붇들던 동네 이야기꾼,
명구 아재처럼 알리바바 이야기로 이 '할비지'의 말을 잘 따르게
할 수 있을 텐데.....
그참, 어디 좋은 묘책을 찾아아겠는데.
*박춘성관련 4로 넘길 가능성?
이어 다시 그의 궁금증을 일으킨 지난 날의 창동의 화가들과 오늘 찾았던
부산시립미술관의 전시회쪽으로 마음이 향한다:
그나 저나 이중섭 선생이 마산에서 머문적도 있었다니는데
창동에서 그와 어울렸던 화가들은 누구였을까?
625 전란기엔 박래현도, 김기창도 최영림도 이 곳에서 피란 시절을
보냈다고 했었어.
창동의 백랑다방이나 신마산 외교구락부 카페에서
그들은 문신과 함께 어울렸다고 하니,그때의 창동미술에 대해
윤화백에게 한번 들어보아야겠어.
박춘성의 그림엔 지난 날의 최영림의 분위기가 연상되기도 해.
혹시 둘은 최영림이 마산에 머물며 작품활동을 했을 때
제자와 미술교사로 만난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