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타선율의 바다, 사색의 힘, 보들레르의 낭만주의, 릴케, 세잔느,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
장 그르니에, 폴 고갱, 몽상의 배낭, 채색주의자 들라크로아
인문은 k화가에게 그 메일을 보내놓고는, '참! 엉뚱한 제안을 했구나,'
싶어 마음이 어수선하였다. 좀 부끄러워지기조차해서 혼자 말로
중얼거리기도 하였다: 이 나이에 무슨 그런 뚱딴지 같은 짓인가.
그녀에게 시를 낭송해달라고 하다니.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그 시 낭송을 들으면 마음이 좀 덜 허전할 것 같다느니. 그런 괜한 짓을
하다니......
하여간 인문은 그날 그 기타맨의 술취한 중얼거림을 생각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그 기타맨은 인문에게 자신이 세고비아를 엄청 좋아한다면서,
기타리스트의 거장 세고비아가 제 혼자 힘으로 기타의 대가가 되었기에
더없이 그가 마음의 스승이 되더라는 것이었다. 그 거장은 좋은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던 적이 없었다고도 하였다. 그는 처음 독학자로 시작하여
지금은 그런 기타의 거인이 되었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책에서 읽은 대로
그의 방식을 따라 기타를 늘 가슴에 꼭 껴안은 채 혼자 기타선율의
바다에 깊에 빠져든다고도 하였다.기타맨은 도서관에서 세고비아에 관해
알고싶어서 책들을 뒤져보았다는 것이다.
인문은 그 말은 사실이라기 보다 자신이 상상으로 한 말이거니 하며
'세고비아가 그런 분이었군' 하며 건성으로 대답해 주었던 적이 있었다.
기타맨은 자신을 가르켜, 손가락이 남들보다 긴 것이 유일하게 세고비아를
좀 닮은 점이라며 그래서 그는 밤낮으로 기타를 어깨에 메고 다닌다고도
했었다.그리고 혼자 악보를 곁에 두고 열심히 곡을 연습하면 어느 날 귀가
열리고 눈이 뜨이고 그리고 자신의 소리를 낼수 있을거라고도 하였다.
세고비아가 그렇게 하여 기타의 달인이 되었다고 하였다. 인문은 그 말
역시 혼자 상상으로 한 말이지, 사실은 아닐 것이라 여기면서도, 이 친구의
말에 은근히 감동되기도 하였었던 것이다. 보기와는 달리, 그가 그저 부단한
손가락 연습만으로 그런 티없이 맑은 선율의 개울을 만들어 낸게 아니라
그런 감성의 소리를 내기 위해서 많은 상상과 사색의 힘이 손가락에 스며
든 것이구나 싶어서였던 것이다:
그 참, 그 친구의 술 주정에 좀 더 관대해서야 했는데.
그가 기타칠 때 그의 손가락 놀림과 술취한 눈빛과 그러면서도
기타에 몸과 마음을 모을 때의 그 기타맨의 탈속적인 표정이나
몸짓을 공짜로 즐기기만 하면서도 그 댓가를 지불하는데는
인색하지 않았던가.
그런 이기심이 어디 있노. 원, 참!
그나 저나 K 화가에게 그런 시낭송까지 부탁을 다 하다니. .
그 화가는 평소 관대하고 소탈한 분이니 이 정도의 부탁이야
받아들이겠지, 그런 마음으로?
세상에, 누가 이를 좋게 보아 넘길까?
그런데 나,
이사람아!
나이 생각하여 이젠 그만 좀 해.
이런 편지쓰기가 어디 처음인가.
k 화가에게만 그랬다면야 그럴 수도 있지 뭐 하겠지만,
너 자신을 자세히 들어다 봐. 그런 사춘기적 행동이
어디 한 두번이었어야 말이지.
언제였던가 C화가에게도 처음 만나게 되었을 때도
메일을 보냈었지. 한번 만나고 싶다고 했었잖아. 안 그래?
그녀의 그림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며 화실도 볼겸
인터뷰를 하고 싶으니 시간을 좀 내어달라면서.
그런데 그때 내가 이메일로 그런 제의를 한 것은,
그녀의 그림에 이끌려서라기보다 ,솔직히,
무용수처럼 긴 팔과 자유분방한 몸짓, 그리고
달콤한 소곤거림의 목소리에 더 끌려서였던 게 아니었던가.
그건 주변의 알만한 화가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어.
얄팍한 미의식을 앞세워 화가들과 술자리에 어울릴 때
그림의 선이나 형태 또는 색채와의 조화 등을 떠벌리며
여러 화실을 기웃거리던 때를 잊지는 말아야지.
이사람아. 멀쩡한 마음으로 그런 유치한
부탁을 했디니.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고.
혹시 이게 치유하기 힘든
노년기의 무염치 증세는 아닐까?
인문은 그날 자신을 돌이켜 보며 스스로에 대한 그런 질책에 시달렸었다.
지난 날에는 그 기타맨의 나이 때쯤에는 인문은 먼 길 나서고 싶은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때도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마치 보헤미언이라도 된 듯
몽상의 배낭을 메고 고등학생이래 그가 늘 꿈꾸게하던 상상의 마적수가
자신을 피리소리로 자신을 부르고있다는 망상아래 남해안의 욕지 섬에 올라
먼 수평선을바라볼 때, 시애틀의 차가운 부두에서 떠돌이 악사의 재즈곡에
빨려들듯 귀를 기울일때에도 그는 스스를 보헤미안이라고 여겼었다.
앙드레 지드가 '지상의 양식'에서 먼 세상으로 나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던 그의 충고가 주던 그 강한 유혹이나 장 그르니어가 그를
도취케 하던 말- 불행과 행복을 알게 해 준 곳-
은 그를 가슴 뛰게 했었다. 50나이를 넘기고 잇던 그 나이에 그는
폴고갱이 40이 넘은 나이에 그림을 그리고 싶어 가족도 이웃도 버리고
먼 섬으로 홀련히 떠나버렸다는 이야기에 마음의 귀에 솔깃했었다:
그 참 그때만 해도 젊은 나이가 아니었잖은가?
그림평을 쓰고 싶다며 이웃화가들의 화실을 불쑥 기웃거리질않나.
그러더니 이제는 자신이 마치 그림분석가로 된 것처럼 떠벌리기까지
하고있으니.가관이야. 그리고 유치해!
"그림이란 화가의 자유로운 몽상이 구현된 물질적 존재물'이야"
"나는 음악을 즐기듯, 시를 즐기듯, 그렇게 그림을 즐긴다고
그리고 그림이나 조각은 물질이면서 정신이고."
누군가의 이런 사색의 말처럼, 돌이켜 보면 나의 삶 역시
'생애의 절반은 후회할 짓으로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후회하면서
살아온 것은 아닐까?
인문이 시인의 시선으로 지역작가들의 그림을 읽고 싶어하였다.
보들레르가 채색주의자 들라크로아에 대한 감동을 글로 표현했듯이,
시인 릴케가 화가 세잔느에 대한 경이감을 편지에서 자유로운 산문체로
표현했듯이, 그는 그런 시인의 시선으로 지역화가들의 그림 앞에 섰었다.
그림은 어떻게 느끼느냐에 있다고 한 보들레르의 낭만주의적 표현을그는 좋아였다. 그에게는 그림의 주제 파악이나 내용의 분석은
그 다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