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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동갤러리, 나상호, 추상화, 나이프 스크레칭, 팜프렛, 터너의 풍경화,
정자봉, 변상봉, 몽마르트르, 립렛, 유트릴로의 백색그림,휘슬러의 '야경',
부림동 지하상가
0월 0일
인문님!
요즘은 얼굴뵙기 힘드네요. 창동에 발길이 뜸하신가봐요.
별고없으시죠? 윤화백님도 여전하시고요?
오늘은 한가지 부탁할 일이 있어 특별히 이메일을 열었습니다.
인문님은 긴 전화를 싫어하는 데다 아직도 구식 휴대폰을 사용하시니
카카오톡도 안되고. 해서 이렇게 두서없이 이메일을 보냅니다.
제가 준비하고있는 그림 전시회에 관련된 부탁입니다. 그동안 틈틈이
작업해 두었던 15여점의 작품들로 다음 달 초 그림전시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창동 갤러리의 나상호 대표와 의논해두었고요,
전시그림을 위한 팜프렛은 경비도 아낄겸 낫장의 립렛으로 하기로
했습니다. 립렛제작은 나삼수 기획사에 맡기고 이미지 사진도
그곳 사무실에 이미 넘겼습니다.
첫 부탁으로, 이 개인전의 립렛에 올릴 글은 인문님이 써주셨으면
합니다.그리고 그날 오픈식에서 관객 앞에서 그림평까지 해주시면
더욱 고맙겠구요
이번 전시회에는 지난번의 경우처럼 백색 분위기의 도심풍경이
대다수이고요, 거기다 얼마전부터 처음으로 시도해 본 작품들을
추가했습니다. 캔버스에 손이 가는 대로 나이프로 스크레칭한 추상화가
그것들로 한 너댓점 정도는 될 것 같아요. 이 스크레칭 작업은 우연히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한동안 그림이 잘 되지않아 이젤 앞에 앉아서는
캔버스에 검청색 물감 만 가득해우고는 붓을 놓아버리곤 한 게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번은 붓을 던지버리고는 나이프를 움켜쥐고
끝으로 캔버스위를 마구 긁기 시작했습니다. 작업은 안되어 그림을 포기하고
싶은 싴정이었으니까요. 화가로서이 자신에 대한 절망감 같은 것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런데,정신없이 화면을 나이프로 긄어대던 중 무심히 화면을
보니 눈앞에 폭죽의 불꽃이 하늘을 수놓다 순식간에 사라지는 밤하늘의
이미지가 남지 않겠습니까?
'어! 이게 뭐야, 느낌이 괜찮은 데! 한 번 더 해볼까,
이번에는 어떤 이미지가 나타날지 궁금한데.'
이런 순간적인 생각이래 오로지 나이프로 긄어 낸 작품들이 너댓 점
되었고요. 모르긴 해도,인문님이 보시면, 터너의 사나운 바다 풍경이나
휘슬러의 야경이 연상되는 이미지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지를 전혀
생각지 않고 나이프로 그냥 긁어대기만 했는데, 전혀 뜻밖에 그런
이미지들을 연상케 하는 형태들이 나타나더군요. 저 자신도 예상치못한
결과물입니다. 하여간, 그림을 한번 봐주시기를!
혹시, 근자에 몽선생의 근황이 궁금해요.
지난 주부터 그와 갑자기 연락이 되지않습니다. 전화 연결도 되지않아요.
사실 이번 전시회 오픈식에 그의 기타 연주를 부탁하려고 몇번이나
전화를 보냈는데,처음 몇번은 제 전화를 받지않더니 그저께부터는 전화가
아예 꺼져 있어요. 얼마전까지 저녁 나즐이면 부림 지하상가에서 그를 볼 수
있었다던데. 최근에는 아예 나타나지 않는다더군요 . 저도 그곳에서
자주 술취한 채 기타를 만지작거리는 그를 만날 수 있었지만요.
인문님께 혹시 그와 연락 닿는다면, 저의 전시회날 기타연주를 좀
해주기를 바란다는 말씀 꼭 좀 전해주세요. 오픈식 당일 뿐 아니라,
가능하면, 일주일의 전시기간 중 한 두차례 더 해주면 더욱
고맙겠다구요
회신 주시기를!
J 드림.
0월0일
조은애 선생에게!
그림 그리기보다 술잔 들기를 더 좋아하는 분이 언제 그렇게 알뜰히
전시회준비는 한거요? 아니, 술에 젖은 허드레 말이 아니라
이렇게 정돈된 글을 보낼 때도 있다니! 하여간 전시회 소식 반갑습니다.
조선생의 백색 그림들의 분위기는 내 눈에 익지만, 새로 시도한 스크레칭화는
어떤 분위기인지 궁금합니다. 창동 나들이 할 때 나삼수선생의 사무실에 들려
이미지들을 한번 챙겨 볼께요. 아니면, 작품을 직접 볼겸 윤화백과 그곳
조선생의 화실에 한번 들리던지 하거나. 어쨋거나 작품들이 궁금합니다.
이번 조선생의 작품전 그림에 대한 글은, 나보다 윤용화백이 더 적임일 것
같습니다. 윤화백만큼 조선생을 화가로 칭찬하는 노인네가 어디 있습니까?
솔직히 말해, 술친구로 더 좋아하는 편이지만요. 그가 전에 정자봉 교수와
변상봉 화가 등 여러 지인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거나해진 목소리로
옆자리에 앉은 조선생을 그렇게 치켜 세운 적이 있지 않았소?
화가들의 그림평에 인색한 그가 조선생의 우수 짙은 백색 그림들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던지 이런 표현까지 다 하다니:
"몸마르뜨르에 유틀릴로가 있다면,
창동 골목엔 조은애가 있다고.
퇴락한 창동건물과 골몰길을 화폭에 시정 가득히
담아내는 화가의 손으로는 조은애가 으뜸이지.
그런 손은 아마 드물꺼야."
그런데, 몽씨가 한 동안 내게도 통 연락이 없었어요. 혹시 다른 데로
소리없이 사라진 것 아닐까? 조선생이 그의 근황을 모른다면
누가 더 잘 알겟어요. 자신에게 진심을 가지고 대하는 조선생을
그가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는 조선생이 잘 알잖습니까.
하여간 그가 J선생에게도 연락을 끊었다면, 그건 틀림없이 그가
이 곳에 없기 때문일게요.
나로서는 언제나 그의 전화를 기다리는 편이었어요. 그에게 전화를
거는 게 속으로 겁이 좀 났으니까요. 왜냐하면, 저녁이라도 사주고 싶어
내가 먼저 전화를 걸라치면 그날은 그에게 붙들려 새벽까지 귀가 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그의 기타소리가 듣고싶어도 항상 소극적으로
그의 전화를 기다리는 편이지요. 요즘은 그의 기타소리가 듣고싶어
내심 그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는데 감감 무소식이랍니다.
하여간 이겸 저겸 내일 모레쯤 조선생의 작업실이나 만초집에서
윤화백과 셋이서 만나는 게 좋겠소
인문
'추신'
우선 조성생이 직접 윤화백에게 전화로 그림평을 부탁하는 게
순서일 것 같소. 인쇄물은 낫장의 맆렛이란 말을 꼭 하는 게 좋아요.
글이 짧아야 할테니까. 그리고 몽씨에게 연락오면 내게도 꼭 좀
전화주시구요.
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