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과 영감
글을 쓴다는 말은, 나의 경우, 필을 들기 전에 많은 시간 한 주제에 몰입해왔음을 의미한다. 백지위에 글쓰기를 시작하는 일은 그 다음의 과정이다. 백지위에 나타나는 글들은 들길 산책에서나 잠자리에서 오래전부터 이미 머릿속으로 부단히 드나들던 주제나 형상과 관련된 것들이고, 심지어 때로는 화장실에 앉아서도 마음을 지배하는 것은 그 주제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따라서 필을 든다고 함은 그런 긴 집중의 시간이 흐르고 난 후의 일이었다.
그런 점에서도 지금의 글쓰기 방법인 노트북의 자판 두드리는 일 역시 펜과 종이로 글쓰는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자판 두드리기 글작업 역시 한 주제에 대한 긴 집중의 다음 과정이라는 뜻이다. 이를테면, 모니터 화면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글자들의 행렬과 마주한다는 것은 그 이 전에 ,다른 일에는 너무 무심하여 심지어 비 정상인으로 보일만큼 밤낮으로, 그것들과 관련된 주제에만 몰두해왔다는 뜻이다.
모니터 위에 소리 없이 나타나는 어떤 한 구절, 이를테면, '한 폭의 그림은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나에게 온다'는 누군가의 통찰이나, 또는 아래와 같은 긴 회상의 흐름 등은 그러한 긴 집중의 산물이다. 산책길 위에서 불현듯 뇌리에 떠올라 흐르는 이야기들을 자판 두드리기로 두드려 화면에 붙들어 놓은 것이다:...............어둠이 내리는 늦은 저녁 한 소년이 아버지의 호주머니를 뒤져 빼낸 담배와 어머니 몰래 쌀독에서 퍼낸 쌀 봉지를 들고 도둑고양이 발걸음으로 집을 빠져 나가 동네 한 모퉁이에 있는 동네건달들의 초가 아지트로 들어간다.
소년은 노름판이 벌이지는 그 어두컴컴한 아지트의 골방 한쪽 구석으로 기어들어가 그들의 우두머리인 시력이 제로에 가까운 명구아재 곁에 앉는다. 그 골방으로 빛이 들어오는 봉창 곁에 앉은 명구아재는 화투짝을 눈에 바싹 대고 노름에 열중하면서도 연신 소년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전날 동네 타작마당에서 벌어진 두 건달 맞수간의 한판 주먹대결에서 누가 어떻게 이겼는지를 알려주기 위함이다. 아니면, 동네 신작로의 겨울 눈길 위를 달리는 미군용 트럭위로 표범처럼 뛰어올라 군수품과 양담배 상자들을 달리는 트럭 밖으로 내던지고 뛰어내리는 이 골방 건달들의 아슬아슬한 ‘도꼬다이’ 무용담을 들려주고 싶어서이다. 그 아재는 어느 날은 동네 앞산의 공동묘지 이야기를 소년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자정을 알리는 괘종소리를 들을 때마다 학교 기숙사를 빠져나와 깊은 밤 그 공동묘지를 방황하다 새벽이 되면 다시 기숙사로 돌아오는 한 소년에 관한 이야기기가 그것이었다. 소년이 집에서 몰래 가지고 나온 그 담배와 찐쌀봉지는 그 이야기 값이었던 것이다.........
나는 렘브란트의 그림들을 대할 때, '화면에서 점점 자라 그 안의 다른 모든 부분을 사로잡아 버리는 어슴푸레한 그림자'를 느낄 때마다 언뜻 그 초가 골방의 봉창 곁의 명구아재 얼굴을 연상했다. 유소년기이래 마음 속 한 편에 살아 남아있는 그의 얼굴은 담배연기 자욱한 그 골방의 봉창으로 스며드는 저녁 빛과 그림자로 선명했었다. 그리고 위에서 인용한 문단과 관련하여 말해 둘 것이 하나 있다. 이 글이 머릿속에서 구체적인 문장으로 완성된 뒤 그대로 백지위에 옮겨진 것이 아니라, 원래의 그 영감은 손의 도움아래 부단한 변화를 거듭한 후에야 비로소 그렇게 글 묶음 되었다는 점이다. 글 작업은 결코 꿈만 꾸는 일이 아닌 것이다. 머릿속의 상상과 열망이 부단히 움직이는 손길을 따라 이 화면위에 문자로 구체화되어 옮겨진 것이다.
요컨대, 그 실질적인 노역자는 나의 손이었던 것이다. 어떤 영감의 불꽃이나 울림들이 원고지(또는 화면)위의 단어와 문장으로 구체화되기 전에는 글이 아니다.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무의 상태나 마찬가지이다. 나는 지금에서야 그런 물리적인 현상인 글이 마음속의 꿈이나 상상이 아니라 실질적인 단어로 이루어짐을 깨닫는다. 하나의 문장이 곡괭이가 되어 스스로 글의 동굴을 파 들어간다는 어느 시인의 한 구절을 상기하면서, 손에 필을 들고 조각가처럼 문장들을 조각해낸다.
몇 개의 단어들로 이루어진 한 줄의 문장이 글의 동굴 안으로 나를 인도해 나간다. 그 한 줄의 글은 평탄한 길 위에서는 쉼 없이 내닫고, 험하지 않는 언덕은 소로를 따라 길을 새로 내어 나아가고, 그리고 바위투성이의 야산 잡목 숲에 갇혔을 때는 제 스스로 곡괭이가 되어 막힌 길을 뚫어 나를 인도하는 것이다. 글 쓰는 일은 꿈꾸는 일이 아니다. 마음에 든 열망을 손으로 돌에 형상화시키는 조각가처럼 두 손을 움직이는 노역자이다. 글 작업은 두 손을 이끄는 내면의 어떤 에너지, 단지 감성적 상상의 분출도, 어떤 결과를 짐작할 수 있는 이성적 예단도 아닌 내면의 다른 요소, 이를테면 창조적 직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인도인들의 속담에 성자는 신전을 떠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는 사회속의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산다는 뜻이다. 미의 탐험가도 그런 점에서 성자와 같다. 모든 예술은 본질적으로 한 인간의 개인적인 체험이며, 따라서 본래 탈속적인 것이다 이를테면, 화가나 혹은 시인이 방 한구석에 앉아 그들의 작업에 몰두하고 있을 때 그는 철저히 혼자이기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것은 그가 혼자 있으면서 몰두한 그런 작업을 통해서 이다. 글 작업은 혹시 조각 작업을 닮은 것은 아닐까? 대리석 원석을 깎아 마음에 둔 상이나 열망의 상징물을 물질적으로 표현해 내는 조각가의 그 순수한 몰입 같은 게 아닐까?
모르긴 해도 조각가는 항상 질 좋은 원석을 갖고 싶은 강한 열망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그런 원석을 찾아 아무도 가지 않는 미지의 길을 나서기도 하고 가슴에 안고 온 원석의 감촉과 눈에 선히 떠오르는 상과 씨름하느라 기진맥진하여 몇 날, 몇 밤을 앓고 누어지내기도 할 것이고...
그래 조각가처럼, 내게도 글 작업을 위한 상념의 원석이 필요하다.
그 상념의 덩어리들이 없이는 글을 만들 수 없다.
이 덩어리들은 먼 길 위의 고단한 낮과 환상의 밥들 속에 묻혀 있으며
나는 그 원석을 찾아 먼 여행길에 나선다.
내게 글 작업이란 곧 그 원석을 깎고 다듬어 내면의 상념을 형상화하는 일이다.
‘리듬과 각운이 없으면서도 충분히 음악적이며... 상념의 물결침에 걸 맞는 싯적 산문’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모네의 ‘베니스 풍경’이 알게 모르게 나의 글 작업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 화첩을 즐겨 펼쳐드는 나는 글 속에 자주 그림 이야기를 한다. 인상주의 그림들에 눈길이 자주 가던 지난 날 좋은 그림이란 어떤 그림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진 적이 있었다. 그 때 제일 먼저 머리에 떠 오른 그림이 모네의 그 그림들이었다. 내가 모색해왔던 ‘싯적 산문’의 개념이 모네의 그런 인상주의 그림들에게서 포착되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모네의 베니스 풍경을 자주 바라본다. 그 그림은 객관적인 대상을 그대로 담은 게 아니다. 화가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고자 한 그림도 아니다. 그 둘을 하나로 조화시킨 그림이다. 모네의 그 싯적 직관력에 끌려서이다.
나의 글에서 중요한 것은 모네의 그런 풍경화에서처럼 상상의 유도이고 전체적인 암시이지, 개별적인 대상이 아니었다. 이 산문을 쓰는 동안 알게 모르게 나는 피사로가 표현한 아래의 모네의 그림세계를 동경하였다:........모네가 흥미를 보인 것은 주로 운하의 물결 출렁임, 빛, 반사 등의 상호작용이었으며, 당연히 항구성의 베니스적 물안개였던 것 같다. 모네의 베니스 풍경에는 사람들이 기대함직한 풍부한 건축적 세목들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 중요성이 낮다. 이 그림에서는 각 지표의 중요 특색들을 거의 알아볼 수 가 없다.
모네는 베니스를 묘사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에게는 그 도시의 건축적 완성도는 다른 회화적 요소, 이를 테면 연무, 물표면 또는 하늘의 빛깔 등에 비해 덜 중요하다. 도저스 궁전 그림을 한번 생각해보라. 그 궁전의 파사드나 다른 부대 건축물들이 물 표면이나 하늘을 그린 것과 거의 같은 물감 색으로 채색되어있다. 그 결과, 화폭에 담긴 실체는 충실하게 묘사된 그 앞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에테르적으로, 절반은 실제적이고 절반은 비실제적이다.
내게 글 작업이란 머리와 마음, 그리고 또 하나의 인식기관으로서의 손에 의해 한 권의 싯적 산문, 보들레르의 이른 바 싯적 산문이 탄생되는 다소 느슨하고 긴 집필과정을 의미한다. 대체로 그 일은 어느 한 순간의 짧은 영감의 불꽃이 마음 한 모퉁이에서 일면서 시작되기 마련이다. 물론 그 영감은 무언가에 심안이 집중될 때 드물게 얻어지는 선물이다. 그리고 눈빛 반짝임의 통찰이 그 뒤를 잇는다. 그것은 호기심의 대상들이 메모지에 포착되는 순간 순간의 가슴 설렘을 의미한다.
그 다음 단계는 독립적인 인식기관으로서의 손이 이런 내면적인 의식의 소용돌이를 외부로 끌어내어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단어와 문자로 물질화시킨다. 이 마지막이고 실질적인 작업은 때로는 지루하고 때로는 두렵기도 한 그 끝을 기약할 수 없는 긴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 두려움은 마치 혼자서 미지의 건너편 강 뚝을 향해 헤엄쳐 가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긴 강의 한 복판, 겁이 난다고 돌아설 수 없고 나아가자니 아득하기만 한, 그런 강물의 한 복판에 있을 때의 기분이 아마도 그런 느낌일 것이다.
내가 왜 이런 과정의 길을 스스로 선택하는가? 나는 그 해답을 애니 딜라드의 그 책 「writing life」의 책 표지에서 우연히 찾게 되었다. 그 표지는 대양의 한 복판에서 고래 한마리가 수면위로 솟구치는 어느 화가의 그림이다.
아, 그렇지. 내게 글 작업이란 저런 숨쉬기 같은 것 일거야!
물속은 삶의 공간이지만,
숨쉬기를 위해서는 순간순간 저렇게 수면위로 뛰어오르는,
표지 그림속의 고래처럼.나의 지난 글의 주제들, 이를테면, 먼 바다 쪽으로, 그림읽기, 플라멩코의 춤 그리고 시베리아 숲 등과 관련하여 미리 한 마디 말해 둘 것이 있다. 그것들은 모두 동일한 근원지를 가지고 있다. 노년기 나이에 이르러 더욱 생생한 아득한 나의 유소년기의 집 앞 바다의 은비늘 반짝임과 X-마스 새벽송가 그리고 청년기의 긴 투병의 삶이 그것들이다. 그 이후의 다른 시기의 풍부한 체험들은, 그것들이 내 삶에서 아무리 중요한 것들이더라도, 모두 그 두 근원적 요소들과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