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산문
필자의 개인적인 사색이 단어와 문장이 되어 책으로 출간될 때마다 속으로 이게 마지막 책이겠거니 했었다, 다음 글로 쓸거리를 좀은 남겨둘 걸 하면서. 그 책 안에 더 이상 쓸 게 없을 만큼 마음을 다 털어놓기 탓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그 빈 마음은 조금씩 다시 쓸거리로 채워졌었다. 나의 경우 글은 빈 백지위에 예상치 못한 한 줄의 문장이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나의 손이 그 마술사이다. 손길 따라 글은 그 백지위에서 스스로 자라 하나의 문단이 되고, 이어 더 큰 산문이 되고, 급기야는 큰 주제의 틀을 이루는 산문이 된다. 나의 글은 그렇게 자라, 시적 산문이 되었다. 소설체의 글이 아닌, 시의 틀을 벗어난, 단순한 긴 독백의 글이 되었다.나는 집짓는 것보다, 글 한줄 엮는 게 더 좋아. 고기 낚는 것도 좋지만, 풍경을 잡는 것도 좋지만, 그 보다는 단어들을 꿰어 문장을 만드는 게 더 좋아.
- 불 좀 빌릴까요?
- 네? 아, 여기.
- 어디까지 가시는지요?
- 샌디애고 까지요
- 무슨 비즈니스로?
- 아니, 그냥 달리고 싶어서요. 난 이 그레이하운드의 엔진음이 좋거든요.
부드럽게 흔들릴 때의 그 웅- 하는 화음이 말입니다.
- 와, 그 곳까지는 여기 시애틀에서 근 23시간의 거리인데. 그렇게나 오래도록......
손은 사유하는 존재이고, 글은 그 손이 도우면 스스로 자란다. 글은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다. 가슴으로 쓰는 것도 아니다. 머리와 가슴은 글의 영감을 잉태할 뿐 글 그 자체를 낳지는 않는다. 글은 손이 낳는다. 그 손의 도움아래 스스로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머리와 가슴은 서로 눈짓해가며, 애니 딜라드의 다음과 같은 충고로 손의 흥을 돋우다:
'다 털고, 다 쏟아 부어라.
나중에 쓸 책의 좋은 재료라 여겨져 아껴두지 말라.
다음에 쓸 자료로 남겨두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면,
그것은 지금 그것을 다 소모하라는 신호이다.
나중에는 다른 무엇이, 더 좋은 무엇이, 새롭게 네 머릿속을 채워 줄 것이다.
마찬가지로 네가 배운 것을
네 마음속에 숨겨두고 싶은 충동 역시 부끄러운 일이고 파괴적인 것이다.
마음껏 흔쾌히 털어내지 않은 그 어떤 것도 너의 것이 되지 않는다.
너의 금고를 열고 다 비워라.
'예술작업에는 시적 직관이 작용한다고 말한 마리땡에 의하면, 그 직관은 대상으로서의 어떤사물과 이를 응시하는 예술가 사이에 이루어지는 깊은 교감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직관은 이성도, 그렇다고 감성도 아닌, 두 요소간의 어떤 창조적 상호작용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한 주제에 대한 도취적 집중 가운데 순간적으로 얻어지는 영감의 불꽃? 이를 테면 한 가지 주제 이외엔 그 어떤 것에도 무관심해 질 수 있는 머리의 그 이상한 순수의 상태에서? 나이 50 가까이 이르러 가진 나의 첫 산문집, '구강의 바다'는 그렇게 만들어졌었다.
그것을 필두로 이 삼 년에 한 번 꼴로 나의 글은 계속 책으로 이어졌다. '마술피리', '여행 그리고 깊은 노래', '창동 인 불루', 그리고 '플라멩코 이야기' 가 그런 책이었다. 나의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 글을 스스로는 시적 산문으로 여긴다. 시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고백의 산문이기 때문이다. 시가 지닌 운율적 형식과 무관한, 소설의 구성이나 극적 요소도 없는, 그저 긴 흐름의 자유로운 모노로그이기에 그렇다. 때로는 띄어 보내지 못한 어떤 개인적인, 너무나 개인적인 사연의 문체이기도 하고, 때로는 길거나 짧은 혼자만의 노랫말 같은 것이다. 아래의 예문에서처럼:
지난 몇 년간 창동은
내겐 세 주붕이 모여 술잔 나누는 정자이었습니다.
강변 언덕은 아니더라도,
소나무 그늘 아래가 아니더라도
그 자리는 사는 맛이 향긋해지는 놀이터였습니다.
한 분의 말은 수필의 흐름 같고,
다른 분의 경우,
그의 소곤거리는 창동 야사가 얼마나 운율적이었던지!
게다가 저는 남다른 귀를 지니고 있거든요.
섬머세트 몸의 경구 한 마디에,
창동 골목의 희한한 기생집 일화에,
나의 두 귀는 언제나 쫑긋해졌으니까요.
지금은 제겐 그 한분 교당이 더더욱 소중합니다.
다른 한 분을 지난 해 잃었거든요.
셋이서 술잔 나누던 그 정자에 더 이상 나올 수 없게 되었거든요.
시적 산문이란, 말 그대로 운율 맛을 띤 산문의 글이다. 보들레르의 '빠리의 우울'이나 서정주의 '신부'의 글을 닮고 싶어하여 나의 글은 그렇게 불리기를 좋아한다. 글에 뭔가 의미도 담겨야 하겠지만 그 글 자체만으로도 미적 울림을 띠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담겨 있어 그럴 것이다. 나는 낭송되는 코란에 그 의미를 알지 못하면서도, 매료된 적이 있었다. 모차르트의 '피가의 결혼'의,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어느 아리아는 목소리의 그 영적 울림으로 나를 압도한 적이 있었다. 아직도 그 아리아의 의미는 모른다. 그렇지만 그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감동적이다.
내가 그런 문체를 지닌 데에는 막연하나마 그럴 만한 두 가지 요인이 작용한 것 같다. 개인적인 이야기의 글쓰기에 앞서 10년 이상이나 몰두해 왔었던 정치학 관련 논문들 집필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서구 예술가들의 보헤미안적인 내면을 여행가의 시선으로 분석한 예술서, 카페 소사이어티( Cafe Society)를 혼신을 다해 번역한 그 긴 순수한 노역이 그것일 것이다.
전자가 내게 글쓰기에 사고의 논리성을 견지케 하였다면, 후자의 번역 작업은 그 후 시작된 본격적인 나의 글쓰기에 싯적 운율이 녹아들게 하였던 것 같다. 어느 바람 드센 런던의 한 노점에서 내 시선을 붙든 그 책은 내 속에 어떤 억누를 수 없는 동경이 싯적 리듬을 일으키고 있음을 깨닫게 하였던 것이다.
만약 그 후자의 책과 만나지 못했다면, 나의 삶과 글은 지금과는 다를 것임에 틀림없다. 그 책에는 아래와 같은 구절들이 끊임없이 내 마음을 흔들었던 것이다.'승려가 가정생활과는 관련을 맺지 않듯, 예술가는 사회에 무심하다. 이것은 분명한 일이다.
'나는 자유로운 나의 글 속에 운율이 담겨지기를 바란다. 한걸음 더 다가가 시적 음악성이 살아있기를 바란다. 최근에서야 나는 느낀다, 한 편의 시는 단어들의 묶음이다. 그렇지만 시는 단어라는 물질성을 뛰어 넘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의 마음을 사로 잡는 것은 그 언어적 물질성이 아니라 그 시인의 율동하는 영혼이다. 마치 반고호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 앞에서 화포위의 거친 븟질과 무질서한 물감 흔적의 그 물질성 대신 화가의 영혼의 소용돌이처럼.
우리가 시를 대할 때, 마음에 포착되는 것은 그 언어의 구체적 '물질성' 너머 그 시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적 무엇의 파장인 것이다. 예컨대, 보들레르의 시 한 구절에 마음의 귀를 모으면 ,그 땐 그 언어의 물질성은 사라지고 남은 빈자리에는 그 시인의 푸른 빛 영혼 이 감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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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곧 싸늘한 어둠속에 잠기리.
잘 가라 ,
너무나 짧은 여름.
발랄한 별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