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산문

과거의 우물 4

jhkmsn 2014. 9. 30. 19:09

                     글은 무엇으로 쓰는가

 

최근에서야 나는 시인 말라르메와 화가 드가가 나눈 다음의 대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네 머리 속에는 지금 기발한 아이디어로 가득 차 있으나 소네트( 14행시)를 쓸 수가 없어 고통스럽다.'라고 화가 드가는 말하였고, 그 시인은 '시는 아이디어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어로 만들어진다네.'라고 대답하였던 게 그것이다. 미국의 시인, 애니 딜라드의 산문집-The writing life-의 내용 속에 나오는 작가와 학생간의 물음과 대답도 이제는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다.

'나도 작가가 될 수 있을까요?''학생은 문장을 좋아하나요?( Do you like sentences?)

이에 앞서 그 작가가 한 화가와 나눈 아래의 물음과 대답도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은 어떻게 하여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까?''그림물감 냄새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머리로 구상만 한 작품은 아직 작품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고 철학자 베르그송이 말한 적이 있다. '글자'든, '그림물감'이든, 구체적인 물질적 상태로 표현되어야 비로소 작품이 된다는 말이었다. 그 철학자의 충고를 이해하고부터 나는 글쓰기에 관한 한 '손의 역할'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긴다. 내면의 영감을 물질적인 '단어'와 '문장'으로 구체화시키는 일은 손이 맡아하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글쓰기 작업에 관한 한, 손은 글쓰기 중에 단어들을 무수히 죽인다. 손은 무자비한 선택자이다. 시작점과 끝이 없는 황량한 글작업의 사막을 무턱대고 걸으며 머리와 마음에 담겨있는 단어들 중 그 순간의 글 작업에 요긴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단어들은 가차 없이 자른다. 오로지 직관의 채찍으로 문장의 대열을 이끈다.

 

글쓰기의 긴 여정에서 손은 머리의 이성에 맹종하지 않는다. 가슴의 감성에도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 내면의 어떤 뜨거운 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직관력과의 조화속에서 손이 앞에 서서 글의 대열을 이끈다.글쓰기에 몰입하고 있는 지금, 나의 손은 마음과 미묘한 갈등을 겪고 있다. 마음은 인상파 화가 카이에보트(Cailiebotte)의 풍경화에 쏠려있는 데, 손은 그 마음을 순순히 따르지 않는다. 손의 호기심은 다른 데로 향하고 있다. 백지위에 나타나는 단어와 문장은 머리가 아니라 손이 지금 좋아하는 단어들이다. 머리에 가득 담겨있는 다음의 물음들에 대해 손은 그저 무심하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왜 나의 관심을 불러일으킬까?이들과 그 이전의 고전주의적 화가들과는 어떤 점에서 다를까?어찌하여 이 화가들은 고전주의적 화가들의 시선 밖에 있었던,하잘 것 없는 사람이나 철교 또는 빈들의 야생화에 시선을 보내게 되었을까?그리고 모네와 르느와르 간의 차이점은?그런데 저 카이에보트의 철교 풍경은 과연 인상주의적이랄 수 있는가? 등등.....

 

나의 손은 지금 머리 속에 맴도는 물음들을 외면한다. 머리가 좋아하는 대로 행동하려 들지 않는다. ' 글은 무엇으로 쓰는가?' 라는 제목의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머리 속에 맴도는 위의 그런 질문들에 두 손은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글쓰기의 실제 행위자인 두 손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머리 속의 것들과는 전혀 다른 단어들로 문장을 만들어가고 있다. 손은 손가락에 감촉되는 단어로, 머리가 아니라 그들 손의 문장을 만들고 있다. 모차르트, 선율, 작곡가, 에드가 알란 포, 도스토에프스키 시베리아 등이 손끝에 와 닿는 단어들로 서로 이어지면서, 머리가 아니라 손이 좋아하는 문장이 되어가고 있다.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비물질의 영감과 직감은 마음과 머리에서 잉태되고, 손을 통해 눈에 보이는 물질성의 문장으로 출산된다. 머릿속으로 혜성처럼 나타나 사라지는 영감과 직감의 빛을 그것이 사라진 한참 만에 그것들을 포획하는 회상의 그물이 된다.

 

손이 갓 빚어 놓은 단어와 문장의 물질들은 그런 의미에서 머리에게는 과거의 존재인 것이다. 나의 경우는 그렇다. 나의 손은 이 순간 , 앞에서 말한 여러 단어들의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예술가들이나 작가들의 창작과 관련된 단어와 주제에 특별히 호기심을 갖고 있다. 한동안 머리와 마음속에 머물다 사라진 주제-대조적인 두 가지의 창작행태-에 손의 호기심이 지금 발동하고 있다. 예컨대, 모차르트나 애드가 알렌 포 등은 한번 끝낸 작품을 두번 다시 수정하지 않는 창작가인데 반해, 베토벤이나 T.S. 엘리옷, 혹은 화가들 중 뉴욕의 김보현 옹은 작품의 완성에 이르기까지 수정의 손길이 숱하게 이어진 예술가였다는 점에 두 손에게는 깊은 관심거리라는 뜻이다.

 

전에 바다에 대해 글을 쓰고 있을 때였다. 한 작은 바닷가의 들물 소리와 갯벌 냄새의 영감이 머릿속에 떠 오른 한 참 후, 두 손이 그것들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래서 손은 그 영감에 어울리는 단어들 중 제 맘에 드는 것들을 골라 한 줄의 문장을 엮어 내었다. 그랬더니 그 한 줄의 문장은 스스로 숨쉬기를 배우더니 손 앞에서 길잡이가 되어 글의 길을 열어주었던 경험이 있었다. 그 한 줄은 순탄한 평지에서는 쉴 틈 없이 내닫고 ,험하지 않는 언덕에서는 부드러운 땅위로 새 길을 열어 나아갔다. 이어 바위와 잡목 투성이의 높은 야산에 이르러서는 제 스스로 곡갱이가 되어 앞길을 열어나갔다. 손은 처음에는 그 길잡이 뒤를 따르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손이 그 한 줄의 글 뒤를 열심히 따르다가도 얼마 못가 숨을 헐떡이고 땅에 주저않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그 길잡이 글은 저만치 앞에서 내 손이 따라오기를 기다려 주기도 했다. 그렇게 하여 하나의 의미있는 문단으로까지 자라게 되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히 남아있다.

 

손은 머리와 마음에 얽매이지 않는다. 항상 제 길을 간다. 손은 머리와 마음이 잉태한 영감과 직감을 선별적으로 물리적인 단어와 문장으로 육화시킨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드는 문장으로 둔갑시킨다. 손끝에서 그렇게 태어난 한 줄의 문장은 백지나 모니터 위에서 유기체처럼 자란다. 한 줄의 문장이 스스로 꿈틀거리며 두 줄, 세 줄로 그리고 일정한 시점까지 스스로 하나의 문단으로 커 나간다.

 

페이지,

페이지,

영원성의 그 비어있는 공간,

너의 대담성으로,

확신으로,

너가 천천히 채워야 할 그 텅빔의 백지, 페이지.

너가 무심히 채우는 그 비어있는 공간,

너의 손이 닿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대는.

왜냐하면 손놓고 멍하니 사는 것보다

뭔가를 위한 행동이 더 나은 것이니까.

그 순수성의 백지.

너의 죽음의 페이지.

 

위의 이 글귀는 시인 애니 딜라드의 몇 줄 권고를 내가 우리말로 간신히 옮긴 것이다. '누가 당신에게 글쓰기를 가르쳐 주었는가?' 라는 물음에 대한 그녀의 답이다. 내 시선을 붙들던 그 원문은 지금도 내게는 여전히 암시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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