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산문

과거의 우물 3

jhkmsn 2014. 9. 30. 19:05

                          

                   

                        I.

                               

                    

                                오래동안 아무 일도 없다가

                                돌련 눈이 제대로 떠지는 거지요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

 

 

 

                      모노로그

 

글은 무엇으로 쓰는가.

매일 매일 조금씩 글을 쓰다 보니 이런 물음이 자연히 생겼고,

그건 내 삶의 일부가 된 글쓰기의 긴 과정 중에 스스로 풀렸다.

이제 그 물음은 내게 더 이상 풀어야할 숙제는 아니다.

이제 숙제로 남은 물음은,

내게는 어떤 글이 어울릴까,

나는 어떤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이다.

빈 백지 앞에서 스스로에게 던지는 그런 물음은 끊이지 않는다.

이 물음도 제 스스로 풀리기를 기다린다.

아래의 모색의 모노로그도 그런 물음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넌 지금 전체적인 구도에 너무 집착하고 있어.

완성된 글의 원경은 나중의 일이야.

눈 앞 한 페이지의 공간,

한 페이지의 백지가 더 중요해. 

작업에 몰입하는 순간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면하고 있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와 정면으로 씨름하는 일이다. 

그 한 페이지의 문장을 단어 하나 하나로 지어나가는 일이다. 

완성된 글 숲 전체를 머리속으로 미리 그리는 일은

한가한 산책길에서나 어울린다.

페이지와 씨름할 때는

큰 숲은 머릿속에 두지 말라.

이번에는 왜 이렇게 글 작업을 서둘까? 

East of the sun- 그 책을 찾아야 할텐데.

그래야만 시베리아의 숲과 바이칼 호수를 더 잘 살펴볼 수 있을 터인데.

 집 서재의  헌 책 묶음들 다 뒤져서라도 찾아내야지.

 젊은 날  잠 못 이루게 하였던,

러시아인 토스토에프스키,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숲,

달아나는 기차,

‘기도의 의미를 알려면 가을 바이칼 호수 앞에 나서라’.

이런 것들이 나를 러시아로 날아가게 하지 않았던가!  

 내 가슴에 담긴 기독교적 요소는

신교도적 교리가 아니라,

종교적 믿음이 아니라,

가슴 벅차게 한 유년기의 골목길 새벽 송가나

영혼을 끌어당기는 바하의 첼로 선율 같은 것임을

내 가족들에게 이해시키고 싶은 열망도 얼마간

가슴 한 모퉁이에 숨겨져 있었고... 

러시아 여행길에

무엇보다 보고 싶은 것은

모스코바의 봐실리 성당의 황금빛 쿠뽈이 아니라

페테르부르그의 서구적 도회 풍경이 아니라

달아나는 기차가 그 속으로 사라지는 시베리아의 아득한  숲인 것을. 

이 글쓰기 여행 후  

이제는 젊은 날 ‘수평으로 안정된 두 눈’으로 평원을 내닫고

늙어서는 혼자 숲으로 들어가

자신의 삶이 원래 그 일부였었던 대지로 묵묵히 돌아가는

어느 아메리카 인디안 부족의사나이들처럼,

그렇게

내 삶과 마주할 수 있기를!

 

이 글 작업중에 많은 그런 모색의 혼자말이 있었다. 때로는 르네 샤르의 한 구절의 물음- 왜 저길이 아니고 이 길인가?-도 있었고, 다른 하나의 물음인 보드레르의 사색- 리듬과 각운이 없으면서도 충분히 음악적이며.... 상념의 물결침에 걸맞는 시적 산문을 쓸 수 없을까?-도 혼자말의 한마디였었다. 무엇보다 릴케의 아래의 권유를 빈 백지와 혼자 마주했을 때 특별히 좋아했었다: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많은 도시,

많은 사람,

많은 책과 만나야 한다.

그리고 반짝이는 별들과 함께 덧없이 사라지는

여로의 밤들을 회상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글은 어떤 것일까 ? 이 산문은 그런 물음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고자 나선 긴 사색의 과정이었다. 전에 어떤 책에서, 바이칼 호수에 이르면 그 곳의 바람 소리에 기도의 의미를 좀은 깊게 느낄 수 있으리라는 글귀를 읽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그 호수가 있는 시베리아에 가고 싶어 무작정 모스코바 행 비행기에 오른 적이 있었다.

 

이 시베리아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를 이르쿠츠크로 정한 것은 그 도시의 곁 바이칼 호수에서 이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그 험한 철길을 따라 그 호수와 만난 것은 멀리서 보이는 그 쪽의 아득한 물빛과의 짧은 한 순간에 불과했다. 더 이상은 아니었다. 호숫가에 서서 사나운 칼바람과 마주하지는 못하였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멀리서 바라보고, 또 바라보고만 했을 뿐 그 쪽으로 더 다가서지 못하고 돌아섰던 것이다,

 

기독교적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나의 해묵은 물음의 중압감이 순간적으로 사라진 것은 그렇게 나선 시베리아 여행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 먼 여행에서 지친 몸으로 돌아와 우연히 펼쳐 든 밀린 쿤데라의 책,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 속에서 반짝이는 아래의 한 줄의 글을 통해서 였다: .

................나는 나의 무신앙과 그들의 신앙이 묘하게도 비슷하다는

그런 이상하고 행복한 느낌을 맛보며 성당 안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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