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못다한 이야기
1.
미인도 화가로서의 교당을 주제로 집필을 시작하기전 한 두가지
요인으로 얼마간 망설임이 있었다. 그 중 교당의 화풍과 관련된
것으로서 그의 채색화 작품엔 '왜색'( 이 말은 일본에 대해 부정적인
표현으로, 정치외교적 차원에서는 수긍이 가는 말이지만, 예술에
관한 한 '일본'이라는 용어가 더 적절할 것 같다.)의 흔적이 느껴진다는
세간의 수군거림이 그것이다. 필자도 그의 작품에 대한 그런 부정적인
시각에 막연히 공감하였었다. 일본 채색화의 어떤 점이 한국인 동양화가
교당에게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 또는 교당의 채색화에서
일본의 전통적인 그림의 흔적이 어떤 점에서 예술적 저해의 요소로
작용하는지에 대해서는 탐구적 물음을 가져보지도 않은 채 그냥 그런가
보다하였다. 그런 비판에 공감한 데에는 필자의 주관적 인식이 바탕이
깔려있었다. 평소, 빛과 그림자의 흑백 대비로 인간의 내면을 표현해
주는 렘브란트 작품이나 담백하고 고졸한 김정희의 그림을 선호하였던
필자의 눈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그와는 다른 호기심으로 그의 작품을 대한다. 젊은 날의 교당이
처했던 독특한 삶의 체험으로 인해 그의 채색화는 남다른 화풍을
띠게 마련일텐데 그게 어떤 점일까 하면서이다. 아울러 그의 작품에
일본 채색화의 흔적이 담긴 것은 그로서는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고,
더 나아가 긍정적인 요소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태어나
청년기 직전까지 일본에서 자랐으며, 더구나 그에게 동양화를 가르친
분이 일본인 스승, 목교당이었으니, 그의 작품에 일본예술의 영향이
스며있지않다면 그게 오히려 더 부자연스러운 일로 여긴다.
일본화가의 그림이 지닌 감각적이고 장식적인 색채가 아름답다거나 ,
많은 나라 작가들의 작품들과 한데 섞여있어도 일본인 작품들은
그들의 독자적인 아름다움의 특성으로 한 눈에 들어온다는 글들은
내게 새로운 일본예술에 대해 눈이 새롭게 열리게해 주었다.예컨대,
후기 인상파화가들 중 고갱이나 고호가 일본의 우끼요에 그림에 반한
것은 그 판화에 담긴 독특한 색채감 때문이라는 말이 새롭게 들였다.
게다가, 우리에게 친숙한 로댕의 조각품,'생각하는 사람'이 일본의
국보 1호인 고류지 목조 '미륵반가사유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느낌을
받았다는 한 그림 연구가의 글 역시 일본예술을 다시 인식하게
해주었다. 필자는 젊은 날 일본인 작가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의 그 탐미적 문체에 담긴 감각적 표현들에, 그리고 켄코라는
옛 일본인 작가의 글귀 한 토막- '우리가 아디시노의 이슬처럼
, 토리베이야마 위의 연무처럼 사라지지않는다면, 그리하여 이 땅에
언제까지나 살아남아 미적거린다면, 그 어떤 무엇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할 것인가! -에서 느껴지는 탐미중의적 사색의 시선이 좋았던
적이 있었던 필자였다.
그러던 중 교당의 1990년대의 작품들 중 여인의 초상화들을
보면서 혼자 속으로 그래서 그런 비판적인 목소리가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그 초상화 그림들은 그의 대표적인 한복의 미인도와는
좀 다른 분위기의 것이었다. 연한 채색의 초상화로, 오래도록 그의
손에 익었을 간판그림위의 미인들의 잔영이거나, 또는 미군병사들의
초상화를 직업적으로 그려주던 젊은 시절의 그의 능숙한 손재주의
흔적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외 다른 의문도 스스로에게 던지던 때였다.
되었다: 극장 간판위의 미인들에 익숙한 손으로 인해 교당이
잃은 것은 무엇일까? 극장 앞 행인들의 발길들 붙들고 시선을 빼았던
그 탁월한 묘사력이 혹시 그에게 무엇을 잃게한 것은 없을까? .
그 채색의 인물화들은 보편적인 미의 기준-이를 테면, 격조 ,혹은 품격
등을-를 놓고 볼 때, 작품으로서의 예술성이 약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여인들에게서 유랑극단이나 신파극의 여배우나 아니면, 1960년대의
산업현장의 직업여성들이 연상되었으니까. 그리고 그 그림들은
특정시대의 여인상에 관한 자료로 남겨질 일이지, 그것에서 예술성을
논할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아래의 편지체의 산문들은 평소 필자가 그에게 편지에 담아 보내고
싶었으나 보내지못한 회화에 관한 사색의 글들이다.
2.
2013년 어느날
선생님!
교당의 팔순기념전 전시장에서 정자봉 교수와 귀속말로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전시작품들 중 제가 딱지를 붙인 그 수묵화 한 점 '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전 ,저 '춤'이 제일 마음에 듭니다. 저 춤은 춤꾼 스스로 취한 몸짓
입니다. 붓질 한번의 어이짐으로 묘사의 차원을 넘어선 심상을 잘도
표현해냈군요.''라고
그리고 교당이 그린 '여인네들의 슬픔'을 담은 수묵화 한점도
처음 보았습니다.굵고 물기 머금은 일필로 그린 여인들엔 예상치
못한 현대적 감각이....! 한옷에 가득한 여인네들의 슬픔이 사실주의적
기법아래 담겨 있었습니다. 순간적으로 반 고호의 스케치 한 점 '
불행한 노인'이 그 위로 오버랩되었습니다. 고호가 인상주의적 빛의
마술에 마음이 홀리기 전에 그렸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원색의 물결로
채운 그의 후기작품들에 대한 느낌과는 전혀 다른, 음영이 짙은
그림이었습니다. 제 눈에는 수묵화가 채색화보다 더 좋은 가 봅니다.
렘브란트의 '빛과 그림자'의 그림들이 마음에 들었던 것처럼요.
학야 올림
0월 0일 2013
교당에게,
제가 화실에서 물감냄새를 맡으며 그림들을 가까이에서 느껴보기 시작한 것은
고 현재호를 알게 되면서 였습니다. 그 작가의 그림이 지닌 묘한 매력에 끌려
그를 화실로 자주 찾아가면서 부터였지요. 그게 지난 15,6년 전 일이었습니다.
그 이후부터 점점 지역의 다른 화가들의 그림,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자면,
서양화로서의 유화에 마음과 눈길을 보내왔습니다.
동양적 회화인 수묵화는 그동안 제가 자연스럽게 친해질 기회를 갖지못했습니다.
솔직히 저의 심리적인 열등감 탓도 좀 있습니다. 제가 한자와 한문에 눈이 어두운게
수묵의 깊은 맛을 잘 느끼지 못한 막연한 요인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특히 서예의 경우, 종이위의 그 싯귀가 서예가 자신의 글이 아니라,
남의 시를 복사하여 옮긴 것이라 여겨 창작과는 무관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 글자 한 획, 한획 마다 서예가의 마음와 정신을 담고있음을 깨닫지못했거든요.
부끄럽지만 옛 서예가 한석봉님의 글 앞에서도 그렇게 느낀 적이 잇었습니다.
*아래의 서술문을 편지체로 수정요*
수묵화의 눈필에 대한 호기심은 교당과의 친분이 한참이나 쌓인 후부터
였습니다.중국화의 원활한 선의 운용은 선이 물상의 윤곽을 표현하면서도
면과 양감의 효과를 겸하게 한다.
동양화에서 기장 기본적인 것은 직선과 곡선이지만, 그 변화는 다양하다.
서화가는 바로 이런 선의 각종 작용을 운용하여 물상과 사상을 표현한다.
인물화에서 인물의 자태와 표정은 모두 선에 의지하여 표현된다.
만약 붓을 사용하여 종이에 단순히 꺽ㄱ고 끌면서 그려낸 선이 굵고 가늘고
마르고 젖은 것 등이 모두 같고 조금의 변화도 없다면 ,글자든 그림이든
선으로 조합되어 나온 것이 보기에 딱딱해서 판에 박은 듯 단조로워 ,
예술미가 결핍될 것이다.
수묵의 고유한 특성인 직관 함축미를 종이의 수용성과 붓의 활달한 운필의
기세가 주는 특별한 미감, 담백한 수묵의 향기를 교당의 서재에서 매실맛을
즐기며 교당의 운필을 지켜보며 느끼게 되었습니다..
햑야
0월 0일 2013
선생님!
교당은 지난 60여년의 삶에서 손에 붓을 놓은 적이 없었더군요.
40대 중년에 이르기까지 생업으로 간판그림 그리는 일을 하실 때에는
브러쉬(도색용 서양화 붓)이 손에 쥐어져 잇었고,
40대에 들어선 이래 수묵화가의 외길의 삶을 이어오면서는
그 손에는 이제는 붓(서화를 위한 붓)이 쥐어져 있었습니다.
교당의 손에는 평생 붓이 쥐어져 있엇습니다. 지금도 여전하구요.
간판위에 미인을 그려 뭇 시선에 오래도록 남는 인상을 남긴
그림이라는 그 부러쉬의 든 손은 진정한 화가의 손입니다.
붓은 곧 화가의 손입니다.현재 손에서 부러쉬난 붓을 놓은 사람이
스스로를 화가라고 부르면, 그에게 저는 '화가였다'라고 고쳐 말하라고
권고하고싶은 마음이 입니다. 손에서 붓을 내려놓는 순간부터
화가가 아니라는 게 저의 마음이었거든요.
너그럽지 못한 짓이긴 하지요.
요즘 불현듯 이런 생각을 좀 했습니다: 간판위에 미인들에 익숙한 손으로
인해 교당이 잃ㅇㄴ 것은 무엇일까? 극장 앞 행인들의 발길들 붙들고
시선을 빼았던 그 묘사력이 그에게 무엇을 잃게 한 것은 없을까?
인물화가로서의 그 손은 ?
동양화의 붓은 서양화의 부러쉬처럼 안료를 바르기 위한 도구로서의
붓이 아니라 ,붓끝을 봉망 혹은 예봉이라하여 화면을 일도 양단할 수
있게 하는 칼입니다.
수묵화는 안에서 우러나는 어떤 보이지않는 신비의 힘을 요구하게 되고
그 힘은 칼의 힘 ,곧 붓의 힘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의미이지요.
그리고 먹이란 일상재료중의 한 색인 흑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시적 색상을 흡수한 무채의 빈색(空색), 즉 진색을 의미한다.
이런 오묘한 먹빛을 굳이 색 이름으로말하면,아득하고 가물거려 만색이
두루 있으면서 보이지않는 표묘의 현색이라고 할 수 있는 색으로
단순히 흑색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먹이 움직여 변화를 일으키면 오색을 갖추게되고
이러한 것을 일컬어 옛 화가들은 득의라고 햇다.
먹빛이 단순한 흑백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외에도
四彩에 속하는 건습과 농담이 더해진 복합색이라는 말이 된다.
...먹 빛은 질료적 의미로서 화가의 의식세계나
0월0일
선생님!
우연히 눈에 띈 선생의 90년도 수묵 인물화 한 점과 그리고
92년도 습작으로 여겨지는 한 수묵인물화가 수묵 담채나 채색화의
다른 인물들보다 더 마음이 들기에, 문득 앞으로 저런 수묵화의
여인들을 더 다양하게 더 새롭게 낳을 수는 없을까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현묘한 먹색의 여인을 선생님의 자유로운 운필로
표현한다면 어떤 미인을 낳을까 하고 말입니다. 제게는
교당의 자유로운 손이 담백한 먹의 선 만으로 그려낸 사의의
수묵화 한점,'춤추는 여인'화 한점이 다른 여러 채색화 여인들보다
더 마음이 들었기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에 제가 선생님의 채색화 여인들에게서 막연히, 아마도 편견일
수도 있겠ㅈ만, 일본의 전통적인 채색화의 흔적이 느껴져
그런 그림을 얼마간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본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 흔적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인데도 말입니다.
화가의 그림에 그가 태어난 자란 곳의
토양이 묻어나지않는다면 그건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요.
선생은 일본 태생이었습니다. 부모님이 한국인이셨지만
태어나 15,6 사춘기에 이르기까지 자란 곳이 일본 땅이었으니
붓을 든 손에 일본의 전통적인 채색화의 영향이 묻어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필자의 그런 시선이 편견일 수 있습니다.
일본과의 역사적 악연을 겪은 한국인들은 대개 저마다 일본의
문화적 영향을 무턱대고 경계하면서 살아왔으니까요.
동양화의 수묵화에 아래와 같은 미의 세계가 있음을 최근에 이해하게
되면서 교당에게 그런 바램을 좀 갖게되었던 것ㅇ지요.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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