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의 할머니 앞에서
초가을 어느 흐린날 노인이 두 청년 동행자와 천주산 정상이 올려다 보이는 고개에 올라 맞은 편 가까운 산등성이와 마주하며 나란히 앉는다. 자리에서 한 참을 앉아 쉰 후 두 젊은 이들은 짐을 챙기며 노인에게로 시선을 보낸다. 노인은 저 앞쪽의 한 그루 떡갈나무를 가리키며 말한다.
“김군, 저기가 내가 말한 거길세. 그렇지만 여기서 멈출 것이네.”
“예? 저기까지 가시지않고요?”.
“오늘은 그렇다네. ”.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날 기색이 없자, 한 청년은 가방에서 대금을 꺼내 손에 들고, 다른 청년은 앉은 채로 바닥에 내려 놓은 장구를 앞으로 당기며 북채를 만지작거린다. 노인은 다시 말을 건넨다.
“ 저 떡갈나무는 주변의 어린 소나무들보다 키가 커 바람에 많이 시달리는 편이지.”
“예, 그렇잖아도, 큰 가지들이나 여럿 찢겨져 있네요”
“떡갈나무는 좀 단단해서 바람에는 오히려 약한 가봐.”
“오늘은 비도 없고 해도 없으니 걷기에 참 좋던데요.”
“그래. 참 좋은 날을 선택한 것 같아.”
노인은 이어 그 나무 옆 군락을 이룬 관목들을 가리키며, “저건 진달랠세. 봄이면 꽃이 허드레지게 펴 주변의 마른 나무들 사이에 유난히 눈에 띄지.”
“저긴, 참 아늑하게 보이네요. 뒷 언덕이 나즈막하게 둘러쳐져있고.” 김군은 그렇게 말하고는 뒤이어, “저희들, 이제 준비할까요?”, 한다.
“그러세.” 하고는, “내가 먼저 고할께 있으니 잠시 기다려주게나. 이 자리도 일종의 공연 행사같으니, 내가 진행자처럼 먼저 한 마디 하겠네.” 라고 노인은 말을 잇는다
“예? 아, 그러면요”
“처음엔 이 고별의 자리에 소리꾼을 모셔올까 했었다네. 그러다 대금연주로 마음을 바꾸었고, 이렇게 김군을 초청하게 되었다네. 그래서 먼저 김군 아버지에게 전화로 부탁도 햇었고..”
“ 판소리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안향련의 소리를 이따금 들어요”
“그러셨군요”
노인은 다시 앞쪽을 가리키며, 말한다.
“실은, 저 떡갈나무아래엔 봄이면 이름없는 산꽃으로 피어나고 겨울이면 적설아래 풀잎으로 눕는 스무살의 새댁이 잠들어 계신다네. 난 오늘 저 분에게 작별의 인사를 드리려한다네. 그래서 두 연주자를 이렇게 모신 것은 나의 이 고별의 의식을 위함일세. 내 나이 이미 일흔 중반이고. 나 다음엔 글쎄......”.
그 말에 두 청년은 조금은 숙연한 표정으로 노인의 눈길을 따라 그곳을 바라본다. 노인은 그대로 말을 잇는다.
“내가 저기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십대 소년이었을 무렵이었다네. 아마 추석 성묘때였을 것이네. 아버지와 삼촌 들 따라 왔었는데. 그리고 이어 해마다 추석때면 어른들 틈에 이끌려오다시피 했었네. 그땐 얼마나 멀고 아득하던지. 그렇게 시작된 일이 중년이레 이제는 나의 의무가 된 셈이지. 그리고 오늘 저기와 알맞게 거리를 둔 건 그런 사정이 있어서일세. 저 떡갈나무 근처 전달래밭 가에 나의 부모님 두 분과 그리고 할아버지께서도 계시거든. 세 분을 모셔와 내 손으로 저기에 뿌렸어요. 이제 저기서 흙이 되고 바람이 되셨을테고...... 이제 내가 먼저 고하겠네”
“저희들은요?
”내가 고하는 동안 두 분은 우선은 그냥 편하게 앉아 있기만 하면 되네”, 하고는 노인은 저쪽을 향해 혼자 독백을 시작한다.
“아버지!
소자가 오늘 할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올라왔습니다. 이제는 이곳에 더는 오를 수 없을 것 같기에 이렇게나마 이별을 고하고저 합니다. 여기엔 이제 할아버지도 와 있고, 저 분의의 일점 혈육인 아드님과 며느님도 이곳으로 모셔져 이 양지 바른 땅의 흙과 공기가 되셨으니…… 오늘은 특별히 대금산조 한 곡조로 이 소자가 할머니라 부른 스무살의 새댁에게 이별의 예를 드립니다. 저 나무 오른쪽 한편에 유아기의 아버지를 키우시고 자식들 여럿을 낳으셨던 다른 한 분의 할머니에게도 오늘 이로써 이별을 고합니다. 그래도 저 새댁 할머니는 너무 애닯습니다. 세상에, 스무살의 할머니가 천지에 또 있습니까. 그래서 이렇게라도 해야겠기에…..”
노인은 한 동안의 침묵 후 두 동행자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자, 이제 시작함세” 라고한다. 이어 한명은 음료수로 목을 축이고, 다른 이는 장구를 앞으로 더 당기며 채를 잡는다.
느린 진양조를 시작으로 산고개의 적적함을 흔들어 깨우는 대금 선율이
건너 쪽에 시선이 닿아있는 노인의 내면으로 파고들고. 장구채는 이를
뒤따르며 그 흐름에 완급을 준다. 취구를 벗어난 대소리는
운율과 장단 아래 자유분방하게 흩어지다 모이고,
떠는 음은 떠는 음대로, 밋밋한 음은 밋밋한 대로 서로 밀고 당기며
산고개 너무 오솔길 따라 넓게 번져나간다.
소리는 노인의 마음처럼 그 울림이 깊고 처연하다.
같은 한 분이
소년에게는 할머니더니,
노인에게는 ,그 참, 스무살의 새댁이라.
소년은 세월 따라 노인으로 바뀌고,
할머니는 세월을 거슬러 새댁으로 되시고.
저기가 진달래꽃밭이니,
저 떡갈나무가 눈에 들어오는 표적물이니
스무살의 할머니를 여지껏 잃지 않고
잘도 찾아 왔었는데.
할머니, 오늘로 이렇게 하직을 고하합니다.
언젠가 여기서, 어머니의 얼굴이라도 기억할 수 있다면
하시며 흐느끼시던 아버지께서,
그리고 이 손자를 이렇게 노인으로 살아남도록
평생을 뒷받침해주신 어머니도 이곳으로 곁에 계시니
이 손자, 그나마 슬픔이 좀 덜합니다.
혹시라도 운 좋으면,
이 손자도 저 떡갈나무가 보이는 곳으로 올 수 있다면.....
대금선율은 어느 새 자진모리로 들어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