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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호의 녹색 누드, 데프로마시옹, 백치 아다다, 인체의 비율, 강오복, 초현실주의적 몽상,
싯적 비실재성, 이선관 초상화, 표현주의적 요소, 무형식의 자유시, 루오, 유치환의 깃발,
안톤 슈낙
고 현재호의 추모전의 경우, 그 개막식의 연주곡은 화가가 평소 술자리에서
즐겨 부르던 '백치 아다다'를 그리고 기타연주자 자신이 좋아하는 가요곡
'가을을 남기고 떠난 사랑'을 연주하였다. 그 첫 곡은 인문의 요청에 따라
며칠전부터 기타맨이 연습을 거듭하여 준비했었다, 현재 남성동의
신명근 갤러리에 걸려있는 그의 유화 소품 '누드'의 모델이었던 여인이
그 노래를 좋아했었다는 말을 화가로부터 들었다고 했었다. 누드라고 하면,
매력적인 모습의 여체가 그려지는 게 보통이지만, 현재호의 이 누드의 경우,
화가는 대상을 데프로마시옹하여 인체의
비율은 커녕 볼륨감 마저 없는
수척한 녹색의 여체로 표현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처연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인문은 티없는 녹색의 이 누드화를 특히 좋아였다.
두번째 곡은 기타맨 자신이 노래까지 불렀다. 장내의 여러 여성 관객은
이 곡이 기타를 타고 흘러나오자 그 선율을 따라 함께 노래 불렀으며
연주가 끝나기가 바쁘게 그는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그날의 후자의 곡은
여러 번의 행사에서 그가 연주해왔었던 다른 곡보다 관객들의 정서에
더 잘 어울렸었다.
이에 앞서, 인문은 이 전시회를 위한 그림평 쓰기에 적잖이 애를 먹었다.
만초집에서 인문과 마주앉은 그림소장인 강오복씨는 전시회에 올릴 그림을
보여 주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무턱대고 인문에게 그림평을 한마디 써달라는
것이었다. "선생은 현재호 생전에 그를 그의 화실에서나 성미집에서
자주 만나던 사이니 그림 볼 것도 없이 쓱쓱 그냥 써 주면 되지않느냐"는
것이었다.'아니, 보지않는 그림에 대해 글을 써달라니, 그런 경우도 있소?'
하고 인문이 반문하자, 그 소장인은 "뭐 선생의
머리속엔 현재호 그림이
다 들어있다던데 뭘.'하며 다짜고짜로 맡기는 것이었다.
' 정 그렇다면, 그 대신 나도 한 마디 청할
게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전시회 개막식에서 인사말에 앞서 기타 연주자가 나와 두 곡 정도 치게
될거요. 출연료는 없어도 되니,부담 가질 필요는 없고요.', 하고는
그 기타맨을 들먹었다. 어쨋거나 그는 전시회에 걸릴 그림을 보지도
않은 채 그 며칠 후 그에게 그림평을 써주게 되었다. 그 전시회를 위한
그림평은 아래와 같다.
'아래'
<현재호 추모전에 부쳐>
6월 2015
보편적으로 그림이나 조각 등에 대한 감상이나 비평의 글은,
작품을 보는 것이 먼저이고, 글쓰기는 그 다음이다.
전시를 위한 작품을 본 평자의 사색과 감흥이 손끝을 통해
어휘와 단어의 조화로 이루어지는 글로 표현되는 순리적인
과정을 거친다. 책에 대한 서평의 글도 그러하다. 누군가의 책을
읽은 게 먼저이고, 글쓰기는 그 다음의 것이다. 보지않은 그림이나
읽지않은 책에 대해 어떻게 비평의 글을 쓸 수 있겠는가. 만약
그림 소장가가 그림비평가에게, 전시회될 그림을 먼저 보여줄 생각도
않은 채, 그 그림전에 대한 비평의 글을 부탁한다면, 그리고
그런 부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승낙하는 글꾼이 있다면,
이런 비상식적인 대화를 두고 사람들은 우스개로 여길 것이다.
그런데 고 현재호 화백의 그림을 두고 이런 희한한 일이 있었다.
그림 소장가인 강오복씨와 그림산문집 '창동인 블루'의 저자인 필자
사이에 그런 대화가 실제 있었다. 둘이 만초집에서 만난 술자리에서
그가 전시작품을, 그림이나 사진으로, 보여주는 과정을 생략한 채,
그냥 며칠까지 비평의 글을 한 편 써달라고 부탁하였고, 이 부탁을
필자는 , 전시될 그림을 미리 볼 생각도 않은 채, 태평스럽게
승락한 비현실적인 풍경이 바로 그것이다.
한 사람은 '믿고갑니다', 그리고 다른 이는 '그럽시다'라는 말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헤어진 뒤에 필자는 스스로 자신에 대해 실소를 금치못하엿다.
참 엉뚱한 일에도 다 있구나 싶었다. 어떤 작품들이 전시될 것인지도 모른 채
그 작품들에 대한 그림평을 써주겠다고 약속하다니! 코메디 같은 일이야!
그림소장인도 그렇지. 전시될 그림을 보여줄 생각도 않고 어떻게
그렇게 태연히 글 부탁할 수 있는가, 원 참!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호의 그림에 관해서라면 '그럴 수 있겠구나'
하는 희한한 생각이 필자에게 들게 된 것은 그가 지난 날 현재호의 화실이
있었던 어시장 쪽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였다. 그는 " 현재호의 그림이라면,
있음직한 일이야 ! 그럴 수 있겠어!"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왜냐하면,
그림소장가나 글꾼 둘 다 그 화가의 초현실주의적 몽상의 세계에 알게 모르게
물들었을 터이니 그런 비현실적인 약속이 태평스레 이루어졌으리라고 여겨지게
되었던 것이다.
현재호의 그림이라면, 그의 몇십 점의 회화들이 당장이라도 눈 앞에
아른거리는 필자이니 그럴 수도 있었던 것이고, 그림소장인 역시
현재호의 그림세계의 그 싯적 비실재성에 젖어 지냈을 터이니 또한
그럴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리나 저러나, 필자는 솔직히 이번 현재호 추모전이 누구보다도
더 궁금하다! 내가 모르는 그림들도 더러 있을 것이라니, 혹시
전에 대우갤러리에서 보았던 티없이 맑은 초록빛 해안 풍경의
작품들도 있으려나? 시인 이선관 초상화 처럼 표현주의적 요소가
물씬 풍기는 그런 인물화도 있을 것인가, 아니면 루오 분위기의 진한
어두움의 싯적 리듬의 작품들이라도? 필자는 스스로에게 던지는
그런 물음들이 이어져 남들보다 더 궁금하다.
현재호의 무중력의 그림세계속에는 눈을 감은 초현실주의적 인물들의
무언의 신뢰와 적은 소유가 주는 무한히 큰 넉넉함이 스며있다.
인물들의 침묵은 물안개빛 몽상의 화면위에서 부드러운 검은 선을 타고
애잔하게 흐른다. 그래서인지 이 화가의 그림들과 마주하는 이들은
저마다 서럽고 달콤한 취기를 맛본다. 그의 그림은 특유의 암시적 색채로
인해 회화적이기 보다 오히려, 비감의 싯적 산문이다.무형식의 자유시이다.
화가의 시선에 포착된 시장 바닥 아낙들의 고단한 삶이 화가의 마술적 손에
의해 캔버스 위에서 화롯불 온기를 지닌 비현실의 삶으로 둔갑한다.
창동의 한 화가가 필자에게 현재호는 현실의 절망감을 면제받은 운좋은
보헤미언이라고 귀속말로 들려주었을 때 , '맞는 말이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던 적이 있었다.
현재호가 평소에 남들과 대화할 때 표현하는 말은 그의 그림에서 만큼이나
이성적 논리의 굴레를 벗어나 있었다. 그에게는 의사전달에 필요한 적절한
어휘들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던 화가였다. 그렇지만 신기하게도 이 점은
그의 그림에 대해 간혹 대화를 나눌 때 그렇게 불편을 주지않았다. 오히려
그런 점이 그와 마주하는 이들의 시적 몽상을 자극하는 묘한 요소이기도
하였다.
현재호와 그의 그림이 지닌 묘한 흡인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 것은 필자가 그와의 만남이래 스스로에게 던지던 물음이었다.
그의 그림속에 담긴 허구적 대상과 그 모티브는 대부분 사회적 저층의
인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의 초현실주의적 그림들은 그 속에
수줍음이 가득한 얼굴의 감은 눈, 나무뿌리처럼 투박하고 굵은 손,
드러내놓은 유난히 풍성한 젖가슴 등에 스며있는 무한히 적은 소유의
온기로 인해, 우리네 관객들의가슴을 찌른다.
그렇지만 필자는, 그림보다 글에 더 잘 매혹되는 필자는, 그 어떤
무엇보다도 단어, 단어들의 글 향기에 더 잘 취한다. 싯적 반짝임의
구절들, 이를 테면, 아래의 이런 표현들이 그런 것이다:
-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지어이의 손수건' (유치환)-
- 출세한 부녀자의 좁은 어깨, 가난한 노파의 눈물. 철책속에 갇힌 사자의
앞발에 담긴 한없는 절망'(안톤슈낙)-
그리고 -내게 그림은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온다'(피카소)-
이에 더하여, 한 술친구가 '현화백은 무엇을 제일 좋아합니까 '라고 던진
물음에 ,소주잔 가만히 내려 놓으며 답한 현재호의 그 어눌한 말투의
한 마디와 그 말 속에 담긴 무지게꽃 핀 창동의 하늘 풍경도 필자의 마음에
남아있다.그 한마디는 이것이다:
-소낙비 그친 오후 불종거리의 희다방 옥상에 걸린
무지개를 좋아하였다.-
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