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창동'은 그림 바라보는 것이 큰 즐거움인 한 도회인의 '그림읽기'이다.
옛 마산의 도심 창동의 이 곳과 저곳, 그리고 그 곳에서 그림 그리며
살다 세상 떠난 지역 화가들의 옆 모습이 이 글 속에 담겨있다.
그 곳 골목길의 빛바랜 주점의 간판과 실내 주객들의 뒷모습
또한 그 도회적 풍경 속에 포착되어 있다. 조각가 문신의 <마산 앞바다>,
최운의 <꽃게>, 김대환의 <춤추는 기생>, 현재호의 <어시장 좌판대>,
윤병석의 <추상의 바다> 그리고 변상봉, 남정현, 허청륭 등 이른바
그 곳 화가들의 그림들이 이 글을 이끌고 있다.
이 글의 중심 무대인 창동의 실제 모습은 외형적으로 회화적 대상이
되기엔 너무 평범하다. 이 도심의 거리를 다니며 아무리 살펴보아도
형태나 색체가 눈에 띄는 대상이 없다. 창동의 큰 길가에서나 골목 어디에도
이 곳의 구심점이 될만한 특유의 구조물이나, 역사적 유물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창동의 도심은 이 도회인의 마음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이 도회인에겐 돈 버는 것보다, 사회적으로 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보다,
글 쓰는 게 더 중요하다고 진지하게 생각하던 젊은 날이 있었고,
먼 여행길에 나설 때에는 릴케의 한 마디보다 더 귀한 충고는 없었다:
'한 줄의 시를 쓰기 위해서는
많은 도시,
많은 사람,
많은 책과 만나야 한다.
그리고 반짝이는 별과 함께 덧없이 사라지는
여로의 밤들을 회상할 수 있어야 한다.'
근자에 이르러 그는 창동 나들이를 한 날은, 그렇지 못한 날과는 달리 의미있는
하루로 여겨지고있다. 창동 골목 어딘가에서 마음 가는 이들과 함께 릴케나
밀란 쿤데라를 들먹이며 술잔이라도 든 날은 그렇지 못한 날에 비해 하루가
의미 있었다는 마음 뿌듯함으로 귀가할 수 있었다.
옛 마산에서의 유소년기와 청년기의 삶의 흔적, 그리고 '리듬이 있는 산문은
어떤 형식의 글로 되어야하는가' 라는 주제에 몰두하며 홀로 헤맨 필자의
혼자만의 긴 문학적 여로, 미로 속으로 들어 선 것 같은 현대미술 읽기,
그리고 스페인 집시의 플라멩코 춤의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의 손짓 등이
그 도심을 무대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소년기의
갯벌 해안이 글 속에 은비늘 반짝임으로, 그리고 청년기의 숲 속 결핵병동이
진한 잿빛으로 녹아있다. 한 밤의 반딧불처럼 현재의 삶의 들판 위로 떠다니는
과거의 두 흔적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이 글 속에 붙들어 두고 싶어서 였다.
심안에 자주 아른거리는 그 먼 빛의 바다로, 그리고 더 선명히 유동하는
그 깊은 숲의 잿빛 기슭으로 되돌아갈수만 있다면, 하는 심정이었다.
누구에게나 지나온 삶 가운데 의미 있는 족적은 극히 제한적이다.
모든 흔적이 다 귀한 원석이 될 수는 없다.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하는 이들-
화가이든, 글 쓰는 사람이든-에겐 더욱 그럴 것이다.
'삶은 곁에서 보면 대부분 치사하고 그 흐름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지나 온 흔적들 중 몇 몇 만이 빛과 색채를 띤, 의미 있는 것으로
심안에 포착될 뿐이다. 화가들에게 그림의 대상이나 모티브가 중복되는
경우가 흔하다. 삶이 어떤 순간, 순간을 빼고는 거의 다 화폭에 담길 수 있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삶이 다 작품의 모티브가 될 수 없다.
작가나 화가들의 마음의 그물에 걸려 남는 것은 삶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그들은 그 의미 있는 순간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 동일한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포착한다. 소설가 섬머세트 몸의 저서 ' 요약(The summing up)'을 보면
그 내용 중에는 그 소설가의 다른 저서들의 내용과 불가피하게 부분 부분 중복되어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뭔가 글이나 그림으로 말하고 싶은 것이 마음에 가득한 이들은
이를 구체화시켜 줄 수 있는 내용이나 대상을 찾아 헤매기 마련이지만,
짓고자 하는 글의 집에 꼭 어울리는 원자재들은 드문 법이다.
수필론( The Art of the Personal Essay)의 서문을 쓴 작가 필립 로페이트( Phillip Lopate)도
이와 관련하여, 글을 쓰다보면 앞선 내용과 중복되는 일은 불가피한 것이므로
산문가는 이를 개의치 않아야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다고 충고하였다.
중요한 것은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이 담기는 어떤 형식이다.
지나온 삶의 어떤 순간, 순간이 작품 속에서 의미 있는 진실이 되는 것은
그 형식을 통해서이다. 그 소재로서의 내용물이 아닌 것이다.
의미 있는 삶은 극히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글 '도회인의 그림읽기'의 내용 중에는 앞선 저서들, 이를테면,
'여행과 깊은 노래', 그리고 '플라멩코 이야기' 등-에 등장했던
내용들이 중복되기도 하였다. 지나 온 삶의 흔적들 중 마음속에
되살아 나 끊임없이 유영하는 몇 몇의 단상들이 그런 것들이다:
유년기의 은비늘 반짝임의 바다, 청년기의 절망의 잿빛 숲,
그리고 장년기 이후의 창동의 골목길 등등...
이 글에서는 체험적 요소들이 연대기적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글 구조와 그 내용물의 균형적 조화에 더 큰 의미를 두었다.
필자의 다양한 삶의 체험적 사실들 중에서 글의 구조물에 균형적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들만 가려 뽑았다. 이 과정에서 혹시, 희랍신화 속의
폴리페몬 이야기에서처럼, 글의 틀에 내용을 맞추려다 자칫 내용의 사실성이
손상을 입지 않을까 염려스럽게도 하다. 글 자체가 논픽션으로 보다 일종의
허구로 비쳐질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렇다.
끝으로, 이 연작산문의 등장인물들은 거의 실명 그대로 그려져 있다.
학야라는 등장인물 만이 필자를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개인적인 삶의
실체를 맨살 그대로 드러내놓기가 필자에게는 좀 쑥스러워서 그렇게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글 속에 실명 그대로 등장하는 분들이 넓은 아량을 베풀어
주리라 믿는다.
2010년 4월
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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