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산문

과거의 우물 11

jhkmsn 2014. 9. 30. 19:35

                                                       깊은 춤

 

 

플라멩코는 도취의 경지에서 속내를 여과없이 드러내는 예술이다. 아름다움의 가면 뒤에 자신의 영혼을 숨겨두기를 거부한다. 플라멩코의 ‘깊은 춤’은 번떡이는 재치나 기교로 무장되기보다 거칠고 순수한 영혼의 몸짓인 것이다. ‘깊은 노래’도 그렇다. 플라멩코 칸타오르 카라콜의 노래 소리는 테너 스테파노의 벨칸토 목소리와는 전혀 다르다. 오히려 한국의 판소리의 소리꾼의 그것에 더 가깝다. 칸타오르 카르손의 목소리는 내게는 우리의 소리꾼 박동진의 것에 더 가까웠다. 

 

옛 그리스의 디오니소스신은 원래 포도주의 신이었다. 니체에 의하면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디오니소스 신을 위해 야만성을 띤 도취의 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 모인 무리들이 그 열광적인 도취의 춤을 통해 세속의 무거운 삶으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마음을 무한한 것에 합일시켜려 했다는 것이다.

플라멩코의 듀엔데는 그 의미가 이 디오니소스적 도취에 가깝다. 한 마디로 플라멩코는 엄격한 고고함과 절제된 우아함을 바탕으로 한, 이른바 아폴로적인 고전미보다 고통과 쾌락의 소용돌이가 불러일으키는 디오니소스적 도취를 더 귀하게 여긴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풍습에도 그런 도취적 샤마니즘 의식이 있다. 굿놀이 중 신들린 무당의 몰아적 몸짓이 아마 그런 듀엔데와 유사할 것이다.   

 

순수한 형태의 플라멩코 춤은 원래 독무였다. 이 독무가 플라멩코춤의 진수, 이른바 개인의 속 깊은 정서와 내적 밀도를 드러내는 유일한 형식이었다. 어떤 정제된 구도를 지키는 독무자만이 자신의 즉흥무, 자신 만의 독창적 춤을 펼칠 수 있으며, 이를 통해서 만이 듀엔데 춤에 몰두하여 자신을 잊은 춤꾼의 혼을 사로잡는 신비한 힘, 영감의 불꽃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살풀이 춤꾼이 즉흥성을 발휘할 때 보이는 순간적인 몰아적 감흥을 어느 분이 형이상학적 기쁨(metaphysical joy)라는 용어로 표현한 바 있는데, 이는 플라멩코의 듀엔데와 같은 도취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즉흥적이고 내면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플라멩코는 매우 개인적인 예술로서 이 점은 고전 발레와 플라멩코를 서로 구별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 둘의 몸동작은 정확히 서로 상반된다. 발레는 상승 지향적으로 가볍게 공중으로 날아오르려 하고 급기야는 무중력을 동경한다. 이와 반대로 플라멩코는 땅으로 그 에너지를 집중시킨다. 플라멩코 춤의 기본 동작에 관해서는 한 플라멩코 연구가의 관찰을 다음과 요약해보는 것이 좋겠다. 

 

바일라오르 즉, 남자 무용수는 몸을 수직으로 곧추 세우고 우리의 살풀이나 승무 춤을 추는 춤꾼이 몸을 앞으로 다소곳이 굽히는 것과는 달리, 역간 뒤로 젖힌 채 두 팔로 곡선을 그리는 동작을 한다. 춤 동작에서 힘을 집중하는 곳은 다리 부분이다. 남자 무용수의 발동작은 강하며 이 동작의 전체적인 효과는 위엄과 남성다움과 그리고 춤 자체의 열정을 드러나게 하는 데 있다. 여자무용수의 경우 남성과는 달리 상체, 팔 그리고 손의 움직임에 그 중요성을 둔다. 팔을 위로 올려 우아한 곡선을 이루고 손으로 자주 아름다운 원의 형태를 그린다. 몸은 허리를 중심으로 약간 뒤로 젖혀 아치를 이루고 둔부는 우아하게 그러나 과장되지 않게 움직인다. 그리고 얼굴은 매우 진지하고 표현주의적이다.  

 

플라멩코의 깊은 춤의 하나인 시규리어는 달랠 길 없는 고통의 표현이다. 국경을 초월하여 이 춤에 어울리는 우리의 시가 하나 있다. 천상병의 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가 그것이다. 이 시의 표제만큼 한 인간의 달랠 길 없는 고통을 이보다 더 적절히 그리고 짧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은 달리 없을 것이다. 이보다 더 아름답게 승화된 깊은 슬픔은 만나기 힘들 것이다. 

 

C 에게 !

플라멩코의 깊은 노래 ‘아이! 아이! 아이!.....’의 아득한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그대의 그림 앞에서 벗들과 슬픔의 술잔을 나눌 수 있는 풍요한 삶이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 허용되지 않기에 그 절절한 시규리어 노래로 혼자 이를 애통해 합니다. 소리꾼 카라콜의 절규를 선도하는 기타 선율이 흐느끼고 그 반주자는 온 가슴과 얼굴로 기타의 몸체를 껴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손을 함게 모은 여러 벗들의 충만감으로 상기된 표정들!  지금 내 눈 앞에 그들의 모습이 선합니다.

 

문득 피카소의 그림 ‘집시 기타리스트’ 가 떠오릅니다. 그의 그림 속에 한 기타 연주자도 그렇게 그의 얼굴을 숙이고 있습니다. 무엇이 나를 플라멩코에 빠져들게 하는가를 지금 어렴프시 알 것도 같습니다. 그 깊은 노래 때문이구나, 하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 깊은 노래가 들리면, 그 소리꾼의 먼 응시가 눈앞에 아른거리고 그의 이웃들이 곁에 앉아 팔마스의 추임새로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한 작은 촛불 모임이 눈앞에 되살아납니다. 그의 젖은 목소리를 따라, 기타선율을 따라, 사색하듯 움직이는 여러 손들도 나무탁자위의 포도주 잔들도 눈에 들어옵니다. 그 소리꾼과 함께 나누는 모임에는 어느 새, 어느 누구와도 함께 나눌 수 없는 슬픔은 다 사라집니다. 

 

카라꼴의 그 시규리어 노래를 두고 시인 가르시아 로르카는 그 멜로디의 굽이치는 물결이 세바스찬 바하의 첼로곡 같다고 했습니다. 연주 내내 악음이 반복적으로 끝없이 이어지며 원을 그리는 바하의 그 무반주 첼로소나타를! 그렇지만 내가 그에게 공감하는 것은 그의 이 말입니다. 바하곡은 원을 이어가며 되돌아오지만 카라콜의 깊은 멜로디는 수평선 쪽으로 사라집니다. 우리들의 영혼이 도달할 수 없는 어떤 먼 끝점으로, 나의 플라멩코로의 몰입은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전에 혼자 안달루시아 여행길에 나섰던 것도 그 탓이었던 같습니다.jh 

 

C에게!

플라멩코는 그 목소리와 춤이 저 하늘이 아니라 이 땅으로 향하고 있어 좋습니다.그 노래를 들으면,그 춤을 보면 바다가 눈에 아른거려먼 대양이 아니라 은비늘 반짝임의 한 작은 바다가 눈에 아른거려 참 좋습니다.  기타선율과 춤에 취하면그 취기를나누고 싶어 집니다.조지훈의 승무를 외우는 J에게이그나시아 산체스를 사랑하는 L에게도 편지 쓰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아침이슬을 솔레아로 춤추던 로레나에게 지금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그녀의 독무가,그 눈 비신 춤이때로는 가슴 뛰게 하는 청둥오리 떼의 날개 짓이 되고,때로는 오두막의 내밀한 소곤거림이 되어,여명의 그 작은 바다 곁으로 나를 인도하던 그녀에게 슬픔의 아디오스를, 전하고 싶습니다.  아래의 사진은 플라멩코 댄서 블랑코 델 레이의 춤의 폭발의 한 순간입니다.솔레아의 깊은 춤입니다. 

내면에 거울을 담은 표현주의 그림 같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춤추려는 의식은 버려라.

네가 표현해야할 것은 너의 영혼이다. jh

(*숄을 걸치고 춤추는 플라멩코 댄서 블랑코 델 레이)

 

플라멩코에 몰입하다보면 늘 우리의 판소리가 머리에 떠오른다. 그 생성에 있어서도 그 둘은 비슷하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판소리나 살풀이 춤 등 우리 민중의 춤과 노래들은 남도에 그 발생의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하였다. 플라멩코가 스페인 남도 안달루시아에서 생긴 것처럼. 민중속의 이름 없는 소리꾼들은 어느 지배체제 아래이건 물리적 핍박과 심리적 억압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네들은 언제나 이 억압을 견딜 수 있는 방안을 스스로 찾아야했었는데 그것이 곧 노래와 춤이었다.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집시족의 끊임없는 피해망상과 전라도 민중의 정치적 박해받음 의식은 거의 동질의 것이었다. 삶의 고통, 억압 그리고 가난과 불운에서 벗어날 길이 그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체념적 자세로 삶을 이어가는 동안 집시족은 플라멩코의 깊은 노래나 춤에서, 그리고 남도의 민중들은 판소리나 살풀이춤에서 위안과 심리적 안식을 얻었다. 그 때 그들은 그들만을 위한 배타적 소수 집단을 이루며 그들끼리만 마음과 몸을 서로 의지하면서 척박한 삶을 견디어 내었던 것이다.

 

현실적인 삶을 위협하는 물리적, 형이상학적 힘들과의 갈등, 그리고 이들과 맞서거나 혹은 최종적인 체념의식이 노래와 춤으로 생생하게 표현되었던 것이 곧 플라멩코 춤과 노래이고, 판소리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표현이나 몸짓이야말로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수단이었기 탓이다. 그들에게는 순수한 ‘예술을 위한 예술’의 개념은 어울리지 않았던 것이다.무엇보다 플라멩코가 한 종족의 전통의식에서 형성된 것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사람들의 공통 체험과 정서를 반영한 것이어서 어떤 특정의 문화권에만 국한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민족적 차원을 넘어 여러 나라의 다양한 관객들이 플라멩코 공연장에서 정서적으로 그 노래와 춤에 깊이 빠져드는 경우를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판소리는 광대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두전승예술’이다. 입으로 전해지고 공연 마당에서 자연스레 청중과 호흡을 같이하며 계승 발전되어 온 공연예술이다. 이 점은 플라멩코의 노래(cante)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판소리가 남도지방의 떠돌이 소리꾼들의 노래였던 것처럼, 플라멩코 역시 안달루시아 지방의 집시족의 민중성을 기반으로 하여 계승 발전되었던 것이다.

 

단지, 판소리에는 춤의 요소가 독립적으로 형성되지 않은 반면, 풀라멩코의 경우 춤(baile)이 점점 더 큰 요소로 발전되어 왔다는 것이 한가지 큰 차이점이다. 한 마디로, 플라멩코와 판소리 둘 다 그 놀라울 만큼의 자연발생 속에서 이 세상에서 고통 받으면서 새벽의 동터 오름처럼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아우성의 충동을 억누를 수 없는 자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살풀이춤의 경우, 그것은 희망이 없는 암울한 침묵의 몸짓이지만 단순한 슬픔의 춤이 아니다. 독무자의 슬픔이 그 바탕이 되어 있지만, 그 춤은 거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비탈을 넘어 정과 환희의 세계로 승화시킨다. 춤추는 자의, 그리고 슬픔을 공유하는 이웃의 애잔한 심경을 하얀 명주수건에 풀고 달랜다. 여성적인 섬세함과 부드러움을 내재한 강한 인내의 표출로 그 흐름이 자연스럽고 고급스럽다.

춤은 한 편의 시로 흐른다. 춤사위는 한쪽으로는 맺고, 중간에 이를 어르고 이어가고, 다른 쪽으로는 푸는, 그리하여 가득 참과 비움이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풀어버리는 것은 비우는 것으로 그것은 끝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성결을 위한 일대 도약, 이를 테면 한과 애절함, 환란과 비애를 환희로 승화시키는 예비의 몸짓인 것이다. 홀로 춤추는 무희의 몸짓엔 시적 기품이 서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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