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승대의 연극제
'오직 하나 만을 소망할 때,
그리하여 다른 많은 것들에 무심할 때,
마음은 순수해진다.'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들이 무대 장식이 되는 거창연극제는 고색창연한 구연서원과 요수정 장자 아래로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그 야외무대의 운치를 더한다. 무엇보다 천둥소리와 강한 빗줄기아래에서도 한 여름 밤의 무대는 출렁이고, 비옷 입은 관객들로 꽉 찬 노천의 객석은 웃음과 박수로 요란하다. 공연시간이 아닌데도 수승대의 거북극장 앞은 인파의 물결이 인다. 화려한 배역 의상차림의 십여 명의 국내외 배우들, 그들과 함께 어울리며 맵시를 내는 관객들, 그리고 개천에서 물놀이하다 맨 몸 그대로 달려 나온 꼬마 어린이들로 한 마당 놀이판이 된 것이다.
그들은 모두 즐거운 얼굴로 카메라 쪽으로 향한다. 사진 기자는 샤터를 얼른 누르고는 매미 울음소리 요란한 나무 밑으로 얼른 더위를 피한다. 나도 그들을 뒤따르며 괜히 거들먹거린다. 은행나무 카페엔 불 밝힌 파라솔 아래마다 생맥주잔 부딪치는 소리. 루마니아의 무지컬 배우들과 러시아인 댄서들이 어울린 파라솔도 있고, 독일 배우들이 한국인 통역관 그리고 괜객들이 한 패거리가 되어 떠들고 있는 파라솔도 있다. 그리고 이 옥외 야간 카페 쪽으로 건들거리며 다가오는 콧수염의 이곳 L 감독, 몰리에르의 작품에 나옴직한 걸음거리! 그야 말로 이 수승대 무대의 진정한 배우이다.
그 축제장의 기타와 드럼의 리듬에 내 귀가 쏠리고 나도 어쩔 수 없이 그 쪽으로 향한다. 깊은 밤시간이 달콤하게 흐름은두 젊은이의 드럼 연주 덕이 크다.
스페인인 세레지오와 독일인 다빗의,드럼 2중주의 리듬이
작별의 밤을 더욱 출렁이게 한다.기타의 매혹적인 멜로디가 뒤를 따르고,밤하늘로 향한 화려한 불꽃놀이에남녀 배우들은 서로 얼싸안고 춤추며다시 만날 것을 기약한다.극작가들과 무대감독들 마다손에 소주잔 들어 화합을 자축하고젊은 관객들은 축제의 환호로 그들에게 화답한다. 젊은 무리들의 축제의 장으로 나도 가야겠다.저 드럼의 리듬은 어쩔 수 없는 유혹이다.
이 연극제 기간 중 어느 한낮, 나는 관객들 속에 끼어 수승대의 노천 극장가를 어슬렁거리다가 독일 배우들의 거리 무언극 '춤 맥박'에 나는 매료된다. 해외드라마는 대개 외국어의 대사전달의 한계성에 문제점이 있는데 ,이 드라마는 몸짓 배경음악 그리고 탈무대화를 통해 관객 속으로 파고든다. 불교의식을 연상케 하는 무거운 종소리. 배우의 몸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두 배우 표정에서 드러나는 고독감, 소외감 그리고 상실감에 깊이 공감한다. 등장인물인 두 남여 무용수는 솔로 혹은 두엣의 몸짓 언어로 자신들의 지나온 삶을 회상한다.
나무에 매단 두 가로등의 아련한 불빛. 거구의 굳건한 은행노목, 한나절의 땡볕, 그리고 그늘진 노천의 관객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들. 이런 것들이 이 거리 드라마의 무대를 이룬다. 비가 내리는 날 두 번째 본 그 거리 극. 그 가로등 불빛 아래 세차게 내리는 소나기가 극중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은행나무를 중심에 둔 객석의 관객들은 비옷을 미리 입고 있고 서 있고, 배우들은 굵은 빗줄기 아래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장면들은 리얼하다. 절제된 몸짓, 침묵의 표정 그리고 탈감성적 배경음악 등. 남녀 두 배우는 서로 몸짓과 표정 그리고 눈빛으로 만 교감한다. 그들에겐 언어가 거의 불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번개와 천둥소리가 두 등장인물의 극적 행위를 더욱 실감나게 한다.
수승대에는 조선시대의 고색창연한 고옥이 한 채 있다. 청송당이 바로 그 곳이다. 이 연극제를 탐방하러 온 이 고옥에서 지낸다. 평소엔 비어 둔 채 그저 관리만 하는 문화재 고옥이다. 내가 기거하게 된 방안에는 돗 자리하나와 배를 가릴 얇은 이불이 준비되어 있을 뿐이다. 깊은 밤 이 고옥의 청마루에 누우면, 대문 밖으로 청아한 개울물 소리 들리고, 뒷문 사이로 들어 온 솔바람이 겨드랑 사이로 파고드는 진기한 거처지! 수승대의 무대마다 밤이 내리면 더불어 내리는 별빛이 그 고요를 달랜다. 지금 이 어둡고 적적한 고옥에서 연극제 의 마지막 밤을 보내는 나그네는 끊이지 않는 공상에 빠져든다.
'해피'가 강아지의 이름이라니! 게다가 입이 험하고 못생긴 수컷 개에게 그렇게나 이쁜 이름을! <해피 오! 해피> 그런 근사한 제목아래 극의 흐름은 이름값을 못내고 싱겁다. 그렇지만, 극의 여운이 한밤에까지 남아 있는 것은 그로 인해 내게 행복감이 좀 보충되어 그런가? 그 지저분한 개-' 해피'-를 극의 중요 케럭터로 삼은 데는 아마도고대 그리스에서 거리의 개처럼 생활(kynicos bios)했다는견유학파 디오게네스에 매혹된 연출자의 의도인 듯.'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신의 특징이며,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신에 가까운 자유로운 인간이다.' 해피의 넉두리는 원래 그 철학자의 입버릇이었으니.
청송당 고옥의 밤은 나그네의 혼자말로 점점 깊어간다. 어둠속의 몽상은 점점 더 깊어간다.
혼자 스스로를 상대로 주고받는 모노로그의 그 별미는, 가로등 밝힌 한 밤 노천카페에서
분장을 지우지 않은 배우들과 어울리는 상큼한 기분보다 더 귀한 맛이다.
낯선 먼 땅 호스텔에서 맛보는 이국적인 대화의 매력과는 다른 특별한 느낌이기도 하다.
여름밤 듣는 이 없는 독백의 이 1인 무대야 말로
진정한 자유인의 것이니까.
계곡 숲과 마음이 늘 향하고 있는 먼 바다쪽.
내게는 숲 깊은 오솔길은 우리를 사색의 늪으로 침잠케 하지만,
먼 바다는 뭔가 억누를 수 없는 동경을 불러일으키지.
숲은 시선을 안으로 향하게 하고,
바다는 수평선 바깥쪽으로 이끌고,
그런데 수승대 입구의 저 연극제 푯말,
'순수한 욕망, 끝없는 상상'이 여간 궁금하지 않는 걸.
그 앞 푯말이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아.
순수와 욕망이라?. 모순된 그 둘을 저렇게 태연히 한 묶음하다니!!
수승대에서 거창 연극제가 열리면 이 고옥은 임시로 내외 연극인들의 모임이나 기자들의 휴식처로도 이용되는 공간이었다. 나는 이 번 2007년 연극제에 우연히 자유기고가로 초대되어 보름간의 축제 기간 내내 이 고옥에서 지내게 되었다. 저녁 시간 이후부터는 이 사무실이 그냥 빈 집으로 남는다기에 수승대 바깥의 지정된 외래객 숙소 대신 이 곳을 거처로 삼고 싶다고 요청하였던 것이다. 그럭저럭 보름이 지난 이 곳 연극제의 마지막 밤을 나는 이 고옥에 혼자 누워 그렇게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수승대에 처음 오던 날 그 입구에서 내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였던 그 푯말 한 부분, '순수한 욕망'이 다시 감은 눈 위로 떠올라 맴도는 것이었다.
무엇을 위한 욕망인가?
순수란 말이 어떻게 욕망의 수식어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욕망은 꿈틀거리는 것이지만, 순수함이란 정지된 상태인데?
추상표현주의나 뜨거운 추상은 욕망의 의미와 어울릴 것 같아. 그러면 기하학적 추상은 순수함에 어울릴까?
'순수한 소망'은 한가지 일 이외엔 무심한 마음이라던데. 난 그 말에 공감해. 그렇다면 이 수승대의 이 푯말의 욕망은 도대체 무엇을 향한 욕망인가?
순수한 욕망? 때 묻지 않은, 아니면, 순진무구한? 도대체 그 말은 무슨 뜻인데? '순수'가 욕망'과 함께, 여러 탐욕들과 어울릴 수 있다는 건가?
덜한 게 종종 더 많은 것이 됨을! 욕망의 가지를 잘라내어라,
그러면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혹시 그건 아마 더 많이 가지려는 감각의 삶이 아니라 점점 더 적게 소유하려는 정신의 삶에서만 존재하는 건 아닐까?
아, 나도 저들과 같이 무대 위에 설 수 있다면, 멕베드의 긴 독백을 읊조릴 수 있다면!아니야, 객석 앞에 선다는 건 욕심이야.내게는 이런 어둠의 빈 무대가 제격이야,나 스스로 배우도 되고 ,관객도 되는.그래서 혼자 독백의 향연을 펼치는 거지 뭐.Life's but a walking shadow, a poor player..........And then is heard no more........
그것은 어느 바보가 지껄이는아무 의미 없는 말 ........이 글귀에 관한 한,우리말보다 영어 구절이그 리듬이 더 좋아 원문을 섞어 낭송하니 양해해 주시구려아, 영어로는 그 의미를 모르는 분이있을 수 있겠지만 상관하지 마시구요.
말이란 때로는어느 나라 것이건 그 의미를 떠나리듬과 울림 자체만으로도 그 분위기가 전해지니까요.판소리라면, 전라도 사투리라야 제 맛이고, 플라멩코는 물론 스페인어로죠.
이 사람은 아랍어를 전혀 모르면서도 그 말을 듣기 좋아합니다. 아랍어는 그 소리가 음악 같다니까요.말이란 그 기능이 꼭 의미전달에만 있는 게 아니지 않소. 그냥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어 의미 없는 말로라도 마음을 건네고 싶어 중얼거리기도 한다니까요.
저어기, 뿔테안경 낀 신사분! 옆자리 한번 둘러보소.막이 오르기 전 당신의 옆자리에 앉아 졸던그 늙은 건달 어디갔오?
나요. 내가 바로 그 건달이요.가면 쓴 이 이야기꾼이 곧 그 사람이오. 일개 구경꾼인 주제에 맨 얼굴로 여러분 앞에 서면무대가 썰렁해질 것 같아이렇게 가면을 좀 썼다오.인물 좋은 나도 그냥 있는데,지가 뭔데 나와 설쳐, 하며 끌어낼까봐 두럽기도 하고요.
뿔테 안경 신사분, 아니 그렇소?
사실 말씀드리자면, 오늘 살풀이 춤꾼 부탁으로 이렇게 무대위에 오르게 되었다오. 그녀가 춤추기 전 귀천의 싯귀을 마음으로 한번 느끼고 싶다고 했다오. 그녀는 귀천의 첫 구절이 마음에 떠오르던 순간 그 시인의 눈에 가득했을 경이의 눈빛을, 나의 시낭송을 통해느끼고 싶다고 했다오.
무대에 오르니 귀천의 시인이 세익스피어의 그 멕베드를 좋아했을 것 같다는생각이 순간적으로 들기에그렇게 한번 읊어 본 것이요. 이 구절은 그 말의 의미로나,세익스피어 특유의 리듬감으로 가슴을 뛰게 하는 글귀니까요.
젊은이는 공허를 언제나 채우려하지만, 늙은이는 공허와 더불어 살아가는 길을 찾는다.한 밤 청송담의 공허 속에서 불쑥 떠 오른 말이다. 이 연극제의 마지막 날 밤 나는 한 밤의 공허를 그렇게 달래고 있다, 스스로 소리꾼의 아니리로, 때로는 고수의 추임새로.
K의 플라멩코 춤 시연은 일단은 성공이야.
갑작스레 소나기가 쏟아지기라도 어쩌나 싶어
며칠 전부터 엔간히 애태웠지.라이브 기타 반주가 아닌, 테이프 반주로, 그녀를 춤추게 했으니!
나의 간절한 부탁으로 무대에 오르긴 했으나
자파테아토 하기엔 무대바닥이 고르지 못한 것도 걱정이었고.
그나마 공연 시작 전 내가 해설 겸 프로로그로 분위기를 좀 잡기는 했었어.
하여간 거북극장의 그 플라멩코 시연은 관객들의 호기심으로 가득 했었다니까
.내년 플라멩코 공연 길은 터놓은 셈이야.
관객들 모두 낯선 율동의 춤에 홀리고무대 배경의 배롱 꽃에 취한 표정들이었어,
이국적인 그 스페인 집시 춤은 그들에겐 모르긴 해도 처음이었을거야.
만개한 배롱꽃과 더불어 현란했던가 봐.
배경에 활짝 핀 그 배롱나무는 유혹적인 남자 무용수가 되어,
그녀와 더불어 플라멩코 두엣을 이루는 것 같았어.
뮤지컬 '춘향, 그 가슴속의 독비'는 객석의 큰 박수를 받을 만 했었어. 춘향을 신분 상승 욕구가 강열한 신세대 여성으로 그려놓다니,그 배역의 말투가 여간 당돌치 않았어.연출자는 춘향을 ,이른바, femme fatal로 그리고 싶었던가 봐. 변학도의 존재가 특별히 눈에 띄었어. 기존의 탐관오리 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였어. 피고인 춘향이의 변명이 오히려 궁색한데,변사또의 심문은 준엄하고 논리 정연했어. 그 점이 여간 재미있지 않았어.
그런데 그 대감댁 막내아들 이몽룡은 쯧쯧, 줏대 없는 마마보이라니!그렇지만 짜임새가 엉성했어.극이 진행되는 동안 어떤게 춘향의 본 모습인지, 그 정체성이 점차 흐려졌어. 정절의 상징인 춘향과 요부형의 새 춘향,그 둘 중, 어느 쪽이 극중 진짜 이미지인지 혼돈스러웠어. 변사또를 나쁜 길로 홀리지도 않고, 예상과는 달리 이 도령 역시 그녀로 인해 신세망치는 처지에 놓이지도 않던 걸.
그렇지만 아래의 서정주의 시 '춘향'에게야 비할 수는 없어:
안녕히 계세요 도련님.
지난 오월 단옷날,
처음 만나던 날
우리 둘이서 그늘 밑에 서 있던
그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같이
늘 안녕히 계세요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천길 땅 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더라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예요?
더구나 그 구름이 소나기 되어 퍼부을 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예요.
연극제의 마지막 밤 나의 그 몽상의 독무대는 그 후에도 한 참이나 계속되었다. 점점 더 가까이 들리는 바깥 저 편의 계곡물 소리에 나의 몽상적 중얼거림도 덩달아 끝도 없이 이어졌다. 축제의 마지막 날은 청송당의 빈 마루에서 나 혼자 모노로그 배우가 되어 있었다.
너에게 한가지 욕망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 이외의 일에 철저히 무심해져야한다.
그 욕망만으로 너를 단순화 시켜라. 가정에서,
친구에게서,
심지어 우리 자신의 언어의 굴레에서도
벗어나라.
보들레르가 말한 것처럼 하나의 주제에 매달려라. 화장실에서도, 심지어 창녀의 침실에서도 너의 마음이 그 하나의 주제에게로 만 향하도록!'진정한 책은 환하게 밝은 한낮의 담소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둠과 침묵의 아이이다'.
마르셀 프로스트의 이 표현! 영감의 불빛은, 그래, 그럴꺼야,
주로 어둠속에 홀로 있을 때, 내면의 어떤 희미한 곳으로부터 스며들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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