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부
회상
이 글의 <제 1 부> 가 스페인 여행 중에 만난 플라멩코의 시각적
요소인 춤이 그 중심에 있다면, 그 여행후 7년이 지난 시점에
시작된 <제 2 부>의 글은 은둔자가 된 그 여행자의 귀에 남은
그 칸테의 소리에 대한 회상이다.
1. 칸테 혼도(cante jondo)
그 어떤 것도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다.
말도 행동도, 이미지도 꿈도......
하지만 때때로 하나의 외침소리가 우리를
해방시켜 준다.
-장 그러니에-
1.
플라멩코를 처음 듣거나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것의 네가지 기본요소-
춤, 칸테(노래), 기타연주 그리고 콤파스( 리듬)-중의 하나인 칸테에는
마음과 귀가 쉽게 끌리지 못할 것이다. 우리귀에 익은 멜로디가 담겨있지
않는 듯한 그 노래의 야성적 소리에 거부감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이에겐 마치 잘 삭힌 서남해안의 가오리 요리에 처음 접할 때 그
이상한 냄새에 코를 움켜지듯, 그 소리가 처음엔 귀에 거슬릴 것이다.
플라멩코 칸테는 음악적 화음이나 멜로디와는 관련없이 그냥 터져나오는
어떤 울부짖음으로 들릴 것이다.
인문에게도 마찬가지로 꽤난 오래동안은 그러하였다. 맨 처음 미국땅에서
우연히 들은 그 소리는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다. 노래라고 하면
일정한 패턴으로 순치된 소리로 화음과 멜로디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비음악적 아우성은 대중 앞에 노래부르는 자의 가다듬은 표정이
아니라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애통하는 자의 일그러진 표정에서 쏟아져
나오는 무질서한 불협화음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인문이 처음 만난
그 거친 소리에 호기심이 동한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건 아마도 그의
심리적 요인 탓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그가 만난 플라멩코는 주로 기타 반주에 의한 춤이었고
그 소리엔 꽤나 오래동안 동화될 수 없었던 것이다. 불협화음에다
멜로디가 무시된 듯한 그 거친 노래 소리가 귀에 거슬렸던 것이다.
미국으로 그리고 스페인으로 혼자 여행길에 나섰을 때에 그 소리를
듣고 싶어한 경우는 드물었다.여기서 드물었단 말은 그 때쯤에는
그 소리 중의 하나인, 그 소리에 멜로디와 리듬의 요소가 강한
'알레그리아스'에는 귀가 꽤난 친숙해졌다는 뜻이다.안달루시아에서는
밤이면 타불로 혹은 플라멩코 주점에 들어서면 그 노래는 기타선율과
플라멩코 춤과 잘 어울리며 인문을 매혹시켯다.
바일라오르, 즉 남자무용수는 몸을 수직으로
곧추 세우고 약간 뒤로 젖힌 두 팔로 굵은 곡선을 그리는
동작을 이어간다.춤 동작에서 심신을 집중하는 곳은 다리
부분이다. 그의 힘찬 자파테아토(발동작)는 신들린듯 민첩하며
이 동작의 전체적인 효과는 남성적 위엄과 국건함과 그리고
춤 그 자체의 열정을 드러내는데 있다. 바일라오라, 즉
여성무용수의 경우, 남성과는 달리 상체, 두 팔과 손목의 율동적인
움직임에 그 중요성을 둔다. 팔을 위로 올려 우아한 아라베스크적
곡선을 만들고 손으로 끊임없이 원의 형태를 이룬다.
상체는 허리를 중심으로 약간 뒤로 젖혀 아치를 이루고 둔부는
유혹적으로 그러나 과장되지 않게 움직인다. 무엇보다도 얼굴 표현은
매우 진지하고 표현주의적이다. 플라멩코의 깊은 춤의 하나인
시규리어는 집시들의 달랠 길 없는 고통의 표현이었다.
그의 스페인 여행길에선 그라나다 세크라멘토 지역의 집시동굴
근처에서 들리는 여인의 깊은 노래와 그라나다의 도심속 인적 드문
골목길가에 플라멩코 pena에서 펼쳐지는 바일라오라 후아나의
솔레아 춤이 그를 매혹시켰었다.
아래의 글은 인문이 플라멩코에 홀려 나선 스페인 여행길에
혼자 중얼거렸던 독백의 한 구절이다:
집시마을의,
노새 나귀들이 터놓은 좁은 골목길 마다
세리주 향이
나그네의 마음을 붙든다는
헤레스(Jerez)에서는
칸테 혼도의 그 깊은 맛은
세리주 잔에 담아 마시고.
(*필자의 산문집<플라멩코 이야기> 중에서)
인문은 지금 플라멩코의 시각적인 춤 동작보다 그 비음악적
흐느낌과 아우성의 노래소리에 더 끌리고있다. 캄캄한 밤 하늘에서
진주알 같은 별들이 반짝이며 쏟아져 내리는 듯, 한 순간의 침묵의
절벽아래에서 돌연히 출렁이며 솟아오르는 파도가 되는 듯한
기타선율 사이 사이로 터져나오는 그 거친 소리는 집 서재에 칩거해
있는 무력한 노인의 침체된 마음을 출렁이게 한다. 그 노래 말은
여전히 알길이 없다. 그리고 모른다고 해서 전혀 문제될 것도 없다.
어느 누구도, 심지어 스페인어를 배운 외국인이라도 그 집시들의
토속적인 언어의 의미를 제대로 맛볼 수 없으리라.
혼자 바라보는 모니터의 화면위의, 노래하는 자의 그 거친 호흡과
꾸밈없는 얼굴 표정, 그리고 친구 동료들이 모인 패쇄된 공간의
하얀 포도주 잔,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 등을 통해 인문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 벅차오름을 맛보며 삶의 푸석거림을 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