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산문

글 서문b

jhkmsn 2019. 10. 12. 07:17

           서문으로서의 대담

이 글은 70대의 플라멩코 애호가가 20년전부터 한 플라멩코 댄서와 나누어 온 이메일을 바탕으로 그녀의 댄서로서의 삶을 스케치한 소설(fact-fiction)로서 ,일종의 인물화 같은 글이다. 어느 시점에 이르러 더 이상 춤추지 않는 그녀를 그는 깊은 연민으로 그려내고있다. 회상 속의 그녀는 긴 팔, 검은 눈, 머그 커피 잔을 손에 든 세련된 몸맵시의 매혹적인 댄서이다. 무엇보다  춤추는 그녀를 만나고 싶어 몰리서 그녀의  스튜디오로 찾아온  한 방문객을 위해 마치 무대위에서 처럼 정장으로 오직 그 한 사람의 관객을 위해 춤추던 순간을 그는 잊지못한다.

지금에 이르러 그에게 플라멩코는 춤 이상의 무엇이다. 댄서의 춤을 넘어 소리꾼의 목소리에서 터져나오는 비탄의 소리가 더 본질적이다. 처음 댄서의 춤을 플라멩코의 전부로 여겼던 그가 점차 기타 선율의 영롱한 별빛 반짝임의 건너 쪽 저 아래 계곡에서 번져오르는 어떤 거칠고 긴 외침이야 말로 그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는 플라멩코 임을 깨닫고 있다. 소리꾼의  라멘트의 긴 울림! 그 소리가 곧 플라멩코인 것이다.  기타 선율의 뒤를 따라 캄캄한 어둠속을 헤집고 번져 나오는 그 애통의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그를 인도해준 이가 바로 댄서 헬레나였다. 그 플라멩코의 어두운 동굴 속으로 그를 이끌어 준 이가 바로 댄서 엘러나였던 것이다. 

그가 만약 화가라면, 그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길을 열어준 그녀 바일라오라의 여러 얼굴들을 화폭에 담아 둘 것이다. 화려한 날의 자신감에 찬 표정, 어두운 날의 상실감 가득한 표정, 그리고 바일라오라 본래의 삶이 담긴,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표정을 화폭에 담아낼 것이다.

그는 렘브란트처럼 빛과 그늘으로 그림을 채울 것이다. 그림자가 차지하는 부분이 차례로 커질 것이다.

처음의 것에는 빛이 그늘을 압도할 것이고, 두번째의 것에는 빛이 그늘에 상당부분 잠식되어 있을 것이다. 세번째의 것은 화폭은 가득한 그늘 사이 사이로 내리는 뚜려한 빛줄기가 아름다울 것이다. 그는 화가라면 렘브란트처럼 빛과 그늘의 이미지들로 화폭을 채울 것이다.

이 글의 두 등장인물- 댄서 엘레나와 그녀를 멀리서 지켜보는 플라멩코 애호가-의 내면을 화가의 손으로 소묘해 나가는 필자가 그와 친분이 두터운 한 젊은 기타리스트가 아래와 같이 대담을 나누고 있다.


'아래'

A: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미국인 플라멩코 댄서 한 사람의 존재가 저자의 삶에 어떤 의미이기에 이 글을 쓰게되었는지요?

저자: 그 한 사람의 플라멩코 댄서로 인해 50대 후반에 든 나의 삶에 깊이와 폭에 크다란 변화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예컨대, 그녀를 통해 플라멩코를 알게되면서, 특히 나이가 들면 들수록 자 자신이 플라멩코의 소리에 더 깊게 빠져드는 것을 느낍니다. 그 소리를 틍해 종교적 특히 이성을 넘어 선 기독교정신 자세에 공감하게되기도 하고, 나의 지적 사고력이나 이성적 판단이 하잘것 없는 게로구나 하는 느낌도 강하게 들기도 하고. 나는 지금 플라멩코 소리를 들으면 영혼의 울림과 감동을 맛봅니다. 그 목소리와 기타리듬에 ,그것이 현장의 체험이 아니라 동영상물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소리는 내 혼을 떨리게 합니다. 뭐할 설명할 수 없습니다. 눈시울을 뜨겁게합니다.

A: 그 소리의 말을 잘 알아듣는지요?

저저: 그 말뜻을 거의 모른 채 그저 그 소리 자체에 함몰됩니다/

A: 말 뜻을 모른 채 라고요?

저자: 그렇습니다. 아,아, 오 오,....렐렐렐레 .....올레!! 등의의 의성어 소리만 알아들을 뿐 그 속의 말뜻을 거의 못알아듣습니다.

A: 그 소리의 의미를 감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온 몸으로 공감하는 게 아닌지요.

저저: 그 말의 단어를 편집하여 엮은 소 책자에 이런 구절의 싯귀들이 있읍니다 물론 안달루시아 집시들의 언어를 영어로 옮긴 것이지요:

My griefs are so enormous

rhere 's nothing more to know

I am dying ,crazy, with no body's warmth

in the emergency ward.

또 이른 싯구도 있습니다

I am living in this world

every hope has dies:

They won't even have to bury me

I'm already buried alive....

등 이런 시통해 읽을 수 있어 그 뜻을 단편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으니 안달루시아 집시들의 말을, 그들의 소리를 들을 때는 스페인어를 들을 수 없는 나로서는 그들의 말뜻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지요. 그런데 역설적이지만 그 말뜻을 모르기에 더더욱 그 속에 홀려듭니다.

질문자도 혹시 그 소리를 한번 들어보시기를! 나는 판소리 듣기를 좋아합니다만 그 의미를 알고 듣기에 그것이 내게는 한계입니다. 그 뜻을 알아들을 수 있기게 그 소리는 나 자신을 잊을 만큼 끌어당기지는 못합니다.

A: 참 궁금한데요. 사람들은 플라멩코라면 시각적으로 매혹적인 춤을 먼저 떠올리고 우리들 기타리스트들 역시 춤과 기타선율을 전부로 여겨는 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선생님을 통해 플라멩코를 알게 되었읍니다 만, 저로서는 춤과 대담을 나누는 기타의 극적 표현성의 선율에 홀려듭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플라멩코를 노래하는 소리꾼의 목소리 자체를 더 자주 이야기 하더구군요

저자: 최근 들어 더욱 그래요. 지금에 이르러 그 소리가 나의 이성적 판단이나 논리에 근거한 철학적 사고력을 무력화시킵니다. 돌기켜 보니 내가 플라멩코를 알게된 시점을 긱점으로 하여 그 이전의 나와 그 이후의 내가 대체로 나누어진다는 점을 스스로 느낍니다.

A: 그렇게 까지요? 그 전의 삶과 그 이후의 삶이라?

저자: 그런 셈이라네. 그 전에는 그러니까 감성적으로 플라멩코의 소리, 즉 그 특별한 외침의 목소리를 느끼기 전에는 바흐나 베토벤등 클래식칼한 심포니에 내 두귀가 익숙해 있었지요. 눈은 아시겠지만 고흐 드가 등 인상주의 전후의 그림들이나 그 후의 표현주의 그림이 대화의 중심 주제였었구요.

A: 선생님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산문작가 장 그리니에를 주로 들먹여셨는데요.그리고 아이자크 펄만의 바흐의 바이올린 독주 샤콘너를 입에 달고 있었구요.

저자: 그랬었지요. 그 바올리니스트의 바흐의 샤콘너 독주는 마을을 젖어들게 하였지요. 그것은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로 된 슬픔인데요. 그런데 최근 들어 제 귀는 그 바이올린 곡 그 샤콘너보다 기타로 연주되는 사콘너를 더 좋아하게되었답니다.

A: 토마스 만이나 세익스피어 이야기도 요즘은 좀 숙지근해지든데요. 아마도 부쩍 플라멩코 소리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전에는 툭하면 토마스 만의 마의 산 이야기 꺼내셨는데 근자에 이르러 그 소설 이야기 마저도 플라멩코의 탈언어적 라멘트에 함몰된 듯해요. 선생님과 이런 대화를 나누는 중 문득 우리 인간이 가진 아폴로적 이성적 사고와 디오니소소적 직감이 떠 오르는군요. 선생님은 어찌하여 플라멩코의 그 소리로 인해 직관의 삶을 살고있는게 아닌가, 그렇게 여겨저요


저자: 플라멩코의 그 비탄의 육성을 들으며 불현듯 우리의 삶 중에는 말과 글의 중개로서가 아닌 단순한 직관으로 느끼게 되는 영역도 있는 것 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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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월 0일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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