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앞에서 말한 것 처럼, 엘레나 대역으로 선정된 한국인 플라멩코 바일라오라, 나디네가 무대의 중심인물이 되어 진행된 315 추모공연은 다음해에, 그리고 그 다음해에도 지속되면서 연이어 3년이나 이어졌다. 그 3년여 시간 동안 인우는 그가 맡아 진행하는 공연 일에 몰입하느라 엘레나를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그의 머리속은 온통 그 공연에 관한 사항들로 채워져 엘레나가 떠오를 틈조자 없었던 것이다.
이 3년의 추모무대를 기획하고 연출하였던 인우에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점 하나는 플라멩코 춤도, 살풀이 춤도 아니었다. 기타의 울림도 아니었다. 그것은 판소리를 하는 여성 소리꾼이 부른 아리랑의 첫 대목이었다. 낮고 깊게 흐르는 목소리에 담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의 울림이었다. 그 날 공연 프로그램의 첫 순서로 판소리 소리꿈의 그 '아리랑'이었던 것이다. 막이 오르고 첫 무대의 시작전까지만 해도 웅성거림이 잦아들지않던 객석이 그 소리의 첫 음절에 일시에 압도되었다. 웅성거림이 일시에 사라지는 것이었다. 무대 안쪽 한 편에 서서 객석과 그녀를 지켜보고있던 연출자 인우는 어둠 속의 그 첫 소리 '아리랑....' 에 직감적으로 오늘의 무대는 대 성공이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었다. 만약, 인우가 그 추모공연을 계속 맡아 진행했다면 그 다음 공연은 틀림없이 그녀의 그 '아리랑'을 프로그램의 가장 중심에 두었을 것이다. 인우에게는 그날 공연에서 들은 그 젊은 판소리 소리꾼의 아리랑은 두고 두고 잊히지 않았던 것이다. 그 판소리꾼의 소리와 장면은 엘레나의 춤에 그가 매료된 것 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플라멩코의 칸테의 경우, 소리(칸테)를 제대로 내는 한국인 소리꾼을 인우는 아직은 만나지 못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게 인우의 판단이다. 왜냐하면 플라멩코 칸테는 안달루시아의 집시 출신이 아니면 쉽게 터득할 수 없는 소리이기 때문이이다. 그 집시 특유의 방언으로 된 시구(copla)가 현대음악적 요소인 코드나 화성을 무시한 '아필라'의 소리에 실려 터져나오는게 플라멩코 칸테인 것이다. 판소리를 남도 소리꾼 집안이 아니면 쉽게 터득할 수 없듯이, 그 플라멩코 칸테 역시 안달루시아 집시출신이 아니고서는 쉽게 소화할 수 없는 배태적인 소리인 것이다.
플라멩코 춤은 미국인 엘라나 일본인 미추에가 배울 수 있었지만, 미국인이나 한국인 중에서 그 소리를 배운 인물은 인우는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 소리의 경우, 무슨 악보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입에서 입으로 그저 전승되어 흐를 뿐이기에 그 집단 속에서 태어나 거나 어릴 때부터 그 속에 셖여 자리지않고서는 쉽게 터득할 수 없는 영역인 것이다.
그 세번의 추모공연을 전후로 플라멩코에 대한 인우의 미감이 점점 달려졌다. 처음엔 플라멩코라면 춤이 그 중심이었으나, 시간이 좀 지나면서 기타의 멜랑콜리한 소리에 , 그 깊은 우수의 감미로움에 점점 더 깊이 매료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칸테였다. 극복할 수 없는 삶의 불행감이 그 애통의 소리를 통해 더 리얼하게 피부에 와 닿는 것이었다.
스페인의 그라나다에선가 아니면, 카디스에선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여행자로서 혼자 도심의 직선길을 깊은 상념에 빠져 걷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플라멩코에의 몰입이었다. 머리속엔 오직 플라멩코의 춤과 노래(소리) 그리고 기타의 울림뿐이었다. 춤, 특히 독무의 경우, 그것이 어떤 형식의 것이건 간에 그것은 본질적으로 내향성의 것이었다. 표현하는 것이었다. 춤은 그 내용이나 혹은 노래의 의미를 따르기 보다 자신의 내면을 표현함으로써 그 내향성을 더욱 심화시킨다.
지난 날 안달루시아 집시들에게는 세상은 그들에게 비정하고 강압적인 사회였다. 이런 적대적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적극적인 표현으로서의 외침, 즉 고통과 절망과 그리고 항의의 열렬한 표현이었다.이것이 곧 플라멩코의 기원이자 그 본질적 요소이다.그들에게 이런 외침은 심지어 상호고류의 수단인 언어적 표현을 대신하기 까지 하였다.이것은 이른 바 플라멩코의 칸테(소리)인 것이다. 이 소리 중 깊은 노래의 하나인 '시규리어'의 첫 도입부로 시작되는 아이! 아이!가 곧 그런 표현 , 박탈감과 절망감의 적극적인 반응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들 소리꾼(칸타오라 혹은 칸타오르)의 목소리는 벨칸토의 미성과는 거리가 멀다. 멜로디의 고저나 화음의 조화로움도 없다. 그저 애통하는 소리인 것이다.
인우가 나이 50대 후반에 들어선 2001년의 시점에 처음으로 체험한 플라멩코의 춤과 노래 ,그리고 우수의 기타소리가 노년기가 점점 깊어지고있는 지금에도 그의 내면세계에 여전히 살아 자리잡고있다. 그리고 그가 그런 플라멩코 탐미가가 된 데에는 바로 그 엘레나와의 만남과 그리고 그녀와와 지속적인 이메일 교류가 그 배경에 깔려있엇던 것이다. 실제로 그가 플라멩코의 발생지인 스페인 안달루시아로 혼자 여행길에 나선 것도 그녀가 마산에 와 플라멩코 공연을 한 뒤 곧바로 이루어졌었고, 지난 3년간 지속되어온 자신이 기획하고 연철하였던 추모공연도 사실 그 발단은 그녀와의 메일 소통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엘레나가 자신의 공연계획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엘레나가 이 무대에 설 수 있다면 한번 시도해보겠다. 그녀는 이를 진심으로 반겼고, 게런티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기쁜 마음으로 마산으로 가 그 추모의 무대에서 춤을 추겠다, 등등의 말이 오고가면서 판을 벌이게 된 것이 곧 그 추모공연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춤을 그 추모공연의 중심 축으로 하여 짜여졌었으나, 결과적으로 엘레나는 오지 못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추모공연은 그녀가 그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연작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플라멩코 바일라오라c3-2 (0) | 2019.08.30 |
---|---|
플라멩코 바일라오라c3-1 (0) | 2019.08.29 |
플라멩코 바일라오라c2-3 (0) | 2019.08.28 |
플라멩코 바일라오라c2-2 (0) | 2019.08.27 |
플라멩코 바일라오라c2-1 (0) | 2019.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