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메모

영화예술

jhkmsn 2017. 7. 31. 14:20

 영화예술



예술은 진실을 조건으로 하는 함께함으로의 길이다.
예술은 ‘내가 알고 있는 나’와 ‘내가 모르는 나’ 사이의 대화이며,
‘내가 원하는 나’와 ‘내가 원치 않는 나’ 사이의 대화이며,
‘나를 위한 나’와 ‘만인을 위한 나’ 사이의 대화이기도 하다.
이 대화가 열어주는 길은 언제나 우리를 낯선 곳으로 이끌며.
이 낯선 어둠의 심연에서 나는 늘 ‘내가 아닌 나’에 목말라 하노라.

   

빈센트의 <별이 빛나는 밤>


빈센트의 <별이 빛나는 밤> 앞에 서 있노라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낯선 세상으로 이끌려 간다. 빈센트가 그리고자 한 별밤이 그에게 무슨 말을 걸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그의 그림은 우리를 낯선 세계로 인도하면서 내가 모르던 나를 일깨운다. 이 낯섦.

   

빈센트<빈센트의 의자>

빈센트의 또 다른 그림 <빈센트의 의자> 앞에 서면 이 낯섦은 기이함을 더한다. 나무의자 풍경은 너무나도 일상적인 것이어서 존재의 드러나 있음을 인식하기 어려운 법이지만, 그림 속 의자는 하나의 사건으로 다가와 느닷없이 낯설어 보이기 시작한다. 의자는 빈센트에게 무슨 말을 걸고 있었으며, 의자 그림은 우리에게 무슨 말을 전하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 되면 의자와 그 위에 놓인 파이프와 담배쌈지가 기호의 굴레를 벗고 캔버스의 사각 틀을 부수고 나와 살아있는 이미지로서 우리 몸뚱이에 새로운 정신을 불어넣고 있는 셈이다.

그림뿐만이 아니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는 시구에 낯선 단어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성인이 되지 못한, 성인의 길을 포기한 영원한 소년, 윤동주의 시구를 읊조리다 보면 우리는 낯섦과 마주친다. 바람에 스치운 별이라니! 이 표현이 교실 문법 세계에서는 전혀 새로운 사건이 아니다. 하지만 멀고 먼 저 성운까지 이르는 바람이란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별에 닿는 바람의 광경 또한 아무리 성능 좋은 천체 망원경으로 포착할 수 없는 현상이리라. 시와 그림 속 의자와 바람과 별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고 무엇을 그리고 있는가?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법이라고. 분명 보이는 현상보다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중요한 법이다. 현상 너머로 열리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담은 그림과 말은 어느새 우리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을 미지의 것으로 이끌어 간다.

죽음을 앞둔 아를르 시절 빈센트는 자신의 침실을 각각 다른 각도에서 네 폭이나 그렸다. 그리고 그 침실 그림의 소품 정도로나 여겨질 의자를 열두 폭 더 그려냈다. 그의 정신적 스승 밀레의 그림에 보이는 딸각발이 의자처럼 빈센트는 일상생활의 소품의 가치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Vincent’라는 자신의 이름를 선명히 새겨 놓은 의자 안쪽의 양파 상자도 이러한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빈센트의 배려를 입증하고 있다. 도대체 빈센트는 왜 열 두 폭이나 되는 의자 그리기에 집착하고, 네 폭이나 되는 자신의 침실 그리기에 집착했을까? 아무에게도 팔 수 없는 그림임을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만해의 시구처럼 ‘다만 님의 수건에 수놓는 바늘과 님의 심으신 꽃나무와, 님의 잠과 시인의 상상과 그들만이 아는’ 이 아무것도 아닌 의자의 신비로움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 의자가 작품으로서 감상의 대상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이러한 개별 작품들이 지니는 신비로움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각 장르마다 자신의 뮤즈를 탄생시켰다. 비극의 뮤즈 멜포멘느, 서정시의 뮤즈 폴림니, 천문의 뮤즈 우라니, 역사의 뮤즈 클리오 등등……제우스와 므네모신느 여신의 딸들인 아홉 뮤즈들의 탄생 즉 예술 장르의 정신과 영감과 이를 이끄는 지팡이로서 뮤즈의 탄생은 길고 긴 여정을 통해 이루어진 역사의 산물이다. 이러한 역사성 속에서 아홉 뮤즈들은 나름대로의 예술로서의 존재 근거를 마련해왔고, 그 영원ㆍ보편적인 고전성을 토대로 개별ㆍ순간적인 현대성을 추구해왔다. 이 장르들이 지니는 개별적 예술 장르로서의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이 아무도 없을 것이다. 때로는 난해하고, 의미심장하며 때로는 친밀하고, 가벼운 듯한 감상의 대상으로서의 작품들은 확실히 규정할 수 없는 무엇을 전하면서 현상에 영향을 주고 있다. 때로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기도 하고, 때로는 좌절을 희망으로 주기도 하며 내 의식의 주인처럼 작용해왔던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라는 시구에 내 마음은 얼마나 부끄러워지고 또 얼마나 신비로움과 환희에 휩싸였던가.

오늘날 삶의 정서에 미치는 영향력 관점에서 말하자면 영화만한 것이 또 어디 있으랴. 어떤 의미에서 현대인은 모두 관객이다. 일반 관객은 물론이고 영화감독, 배우, 스텝, 기획ㆍ제작ㆍ배급 등에 참여하는 영화인들 자체도 다른 영화의 관객으로서, 많은 부분 자신의 성숙된 삶에 대한 성찰을 영화 감상과 더불어 시작한다. 소년ㆍ소녀 시절의 애틋한 감정, 삶의 본질에 관한 철학적 고민, 자신의 운명과 공동체와의 관계에 대한 사색 등 성숙한 삶의 출발점에 늘 영화가 자리 잡고 있다. 나아가 사회인으로서의 삶 역시 영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방인으로서의 소외감을 달래고, 군중 속의 고독을 즐기고, 연인과의 다정한 대화를 기대하거나, 혹은 아무 목적 없이 그저 홀로 즐기기 위해 찾는 영화관은 늘 삶의 공동의 장소로서, 꿈의 공간으로 자리매김 되어 왔다.

모델. 모델들은 촬영 중에는 뚜렷이 드러나지는 않으나 화면상에서는 깊이 있고 진실되게 보인다. 궁극적으로 가장 생명력을 지니는 것은 가장 평범하고 또 가장 빛나지 않는 부분들이다.

로베르 브레송, <시네마토그라프에 관한 노트>

‘영화는 예술인가?’, ‘영화는 종합예술인가?’라는 물음이 고정관념에 갇힌 영화에 대한 사유의 틀을 깨기 위한 앎의 물음이듯, ‘영화는 빛의 예술인가?’ 라는 물음 역시 빛과 어둠의 대립, 명료함과 모호함의 대립, 지식과 의문의 대립, 이해와 수수께끼의 대립, 재확인과 물음의 대립 넘어 그 조우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는 앎의 물음이다.

   
사진1. 시네마토그라프

영화는 기계 문명의 산물이지만 문명의 가능성에 연연하는 기계 문명이 도외시하며 탈피하려 하는 그 전제 조건으로 되돌아가며 예술로서의 가능성을 열어 간다. 또한 이 가능성을 현실화하는 영화 기술의 발명은, 모든 발명의 원칙이 그러하듯 발견을 모태로 하고 있다. 한 층 정밀한 영사기 기술 개발에 혼혈을 기울이던 루이 뤼미에르Louis LumIère는 잠 못 이루며 보낸 1894년 겨울 그 어둠의 정적 속에서, 감히 에디슨조차 그 목표에 가 닿을 수 없던 영사기의 기계적 조건들을 발견한다. 재봉틀의 노루발 원리를 응용하여 개발한 ‘시네마토그라프 Cinématographe’는 구멍 뚫린 필름 띠 위에 가다ㆍ서다를 반복하는 간헐적 움직임을 부여하여 초당 2회전의 크랭크 회전을 통해 16프레임의 이미지-운동을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정지와 진전을 교차하며 움직이지 않는 이미지들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원리는 다름 아니라 이동하는 이미지를 비추고 있는 램프 빛의 흐름 속에 규칙적으로 어둠을 삽입하는 기술에 있었던 것이다.

   
사진2. 조이트로프(zoetrope)

이것을 ‘규칙적 명멸 효과 critical flicker effect’라 부른다(따라서 영화 이미지의 움직임의 근거로 제시되는 잔상효과라는 불명확한 표현의 사용은 자제되어야 한다). 빛의 기술(明)을 통해 혼자서 즐길 수 있는 키네토스코프를 발명한 에디슨이 영화 탄생사에서 불명예 퇴진한 것 역시 이 어둠의 기술(明滅)을 개발하지 못한 탓이다. 조이트로프zoetrope의 고정된 바깥 원통에 쳐진 세로 칸막이가, 중심축을 따라 회전하는 이미지를 간헐적으로 보이게 함으로써 이미지-운동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이미지의 흐름을 규칙적으로 제어하지 못하면, 즉 24개의 프레임이 진행되는 동안 프레임 당 두 번 이상 빛을 차단하지 않는다면, 이미지들은 결코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극장에서 영화를 감상하는 관객은 러닝타임의 1/3 이상에 해당하는 시간 동안 완전한 어둠 속에 잠겨 있게 된다. 하지만 그토록 빠른 명멸의 교차를 인간의 시각으로 포착할 수 없기에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는 관객은 드물다.

   
사진3. <안달루시아의 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나서는 프루스트의 소설 제목처럼, 잃어버린 어둠을 찾아나서는 영화 역시 우리를 미지의 세계로 인도한다. 「안달루시아의 개」에는 왜 안달루시아도 개도 보이지 않는가? ?자전거 도둑?은 누구인가? ?400번의 구타?의 구타 장면은 왜 세 번뿐인가? ?죽은 시인의 사회?는 혹시 대한민국 영화계 아닌가? ?시네마 천국?에는 천국이 있나? ?양들의 침묵?과 살인은 무슨 관계인가? ?시민 케인?의 로즈버드는 우리 모두의 꿈 아닌가? 극장을 나서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관객 앞에 드리우는 것은, 구체적으로 질문할 수 없는 조심스러운 수수께끼처럼 남겨진 빛의 그림자들이다. 영화 감상은 우리가 무시해온 이 그림자들을 되돌아보는 인생의 귀중한 순간이리라. 이렇게 영화 혹은 영화 감상은 삶의 심연으로의 여정인 것이다.

빛을 찾아서, 즉 잃어버린 어둠을 찾아서. 우리는 빛의 추구에 있어 우리가 종래 가져 왔던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 아마도 영화에 있어서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부분 역시 바로 이점일 것이다. 어둠을 찾아 나서지 아니하고 빛을 찾아 나서는 것은, 흙 속에 묻힌 뿌리는 보지 않고 아름다운 꽃망울만 보려는 것과 같다. 아름다운 꽃망울은 단지 가능한 것일 뿐이다. 그 전제 조건은 뿌리이듯이, 어둠은 곧 빛의 전제 조건이다.

빛은 가능한 것이다. 빛의 가능성의 문제는, 예술 전반이 안고 있는 문제이다. 빛의 가능성은 어둠의 체험으로부터 비롯한다. 빛이 오로지 저 높은 곳 혹은 저 깊은 곳에만 있는 것일 따름이라면, 빛이 오로지 심오하거나 요원한 것일 따름이라면, 빛이 인간의 정신으로는 이를 수 없는 것일 따름이라면, 빛은 불가능한 것으로서 오로지 인간의 정신에게 초월적인 것으로서만 비쳐질 따름일 것이다. 빛의 초월성이란 사실 빛을 여기에 없는 것이기에 저기에 있는 것으로 상정하는 데서 비롯한다. 그런데 설령 초월적인 빛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추구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이겠는가. 빛 속에서 빛을 추구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어둠이 아니면 또 어디에서 빛을 추구할 수 있겠는가. (다음에 계속)



영화(映畵, film)는 순간을 기록한 장면을 연속적으로 촬영하여 기록한 동영상을 같이 기록한 음성과 함께 편집하여 어떤 내용을 전달하게끔 꾸며서 만든 영상물이다. 활동사진(活動寫眞, motion picture)이라고도 한다. 중국, 월남에서는 전영(電影)이라 부른다.

종래에는 광학적인 방법의 필름으로 촬영한 다음 편집 제작 과정을 거쳐 영사기를 통해 여러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영화관에서 상영하였다. 최근에는 텔레비전과 멀티미디어 컴퓨터의 발달로 많은 영화가 제작부터 감상에 이르기까지 디지털 방식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 인디 영화라 불리는 독립 영화 역시 발전하고 있다(독립 영화란 이윤을 목적삼는 일반적인 상업영화와 달리 창작자의 의도가 우선시 되며 자본과 배급망에서 '독립'되어 있어 '독립 영화'라 불린다).

목차

역사

머이브리지의 '멈춰진 동작사진 실험' - 말이 달리는 길을 따라 여러대의 카메라를 설치해 촬영했다.

최초의 영화는 흔히 《중국인 세탁소에서 생긴 일》 또는 《열차의 도착》을 꼽는다.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 카페에서 프랑스의 뤼미에르 형제시네마토그래프(Cinematographe)를 공개하였다. 이듬 해 3월 22일 렌가(街)에 있는 국민공업장려회에서 《뤼미에르 공장의 점심시간》이라는 제목의 필름을 시사(試寫)했고 정부로부터 특허를 얻었다. 이것을 영화의 탄생으로 보는 것이 오늘날 통설로 되었다. 하지만 초기의 영화는 단지 신기한 볼거리에 지나지 않았으나, 조르쥬 멜리에스는 영화를 이야기를 전달하는 도구로 이용하는데 큰 공헌을 했고, 다양한 장르와 연출기법들을 만들어 나갔으며,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화가 예술의 한 장르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후 데이비드 그리피스찰리 채플린으로 대변되는 무성 영화의 전성기가 도래하였고, 1927년에는 최초의 유성 영화(토키:talkie)《재즈 싱어》가 워너 브라더스에 의해 뉴욕에서 공개되었다. 이후 미국에서는 할리우드스튜디오 시스템의 발전으로 인해 많은 영화가 제작, 상영되었고 할리우드의 황금기를 누리게 된다. 유럽에서는 예술로서의 영화에 대한 탐구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고, 이는 네오 리얼리즘, 누벨 바그, 뉴저먼 시네마 등으로 불리는 예술로서의 영화에 대한 감독들의 다양한 활동들이 이루어져 왔다. 하지만 1950년대 TV가 상용화되면서 영화의 영향력은 한번 주춤하게 된다. 하지만 그 당시 헐리우드에서 개발한 신 기술은 3D기술과 ATMOS기술이었고 3D는 아직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편할만큼 발전되지는 않은 상태였고 ATMOS기술을 극대화 시킨 영화 《벤허》가 개봉하면서 헐리우드는 전세를 뒤엎는다. 그렇게 영화시장은 다시 호황기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 뒤 20세기말에 이르러 기존의 할리우드 스튜디오들은 거대 미디어그룹으로 성장하였고, 이러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하는 블록버스터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영화 산업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영화 산업은 단순한 예술의 한 장르가 아닌, 거대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변화하였다. 2010년 기준으로 전 세계의 극장매출은 300억달러를 돌파하며 현재 2017년에는 그보다 한참 높아진 시장크기를 지니게 되었다. 이르며 VHS/DVD 매출은 2003년 기준으로 532억 달러로 극장 매출의 2.5배에 이르고 있으며 해마다 10% 정도의 성장을 보이는 거대 시장이 되었다.[1] 점차 영화시장은 영화에만 국한되지 않고 하나의 프랜차이즈 산업으로 자리잡아 게임, , 피규어, 그래픽 노블 등등 다양한 매체로 퍼져나가며 특히 게임과 소설들은 영화화를 노린듯한 형태로 일원화되고 있는 추세이다.

영화의 흥행성적은 《타이타닉》의 압도적인 매출에 국한되어 있었지만 《아바타》로 제임스 카메론이 스스로의 기록을 갱신하고부터 헐리우드의 흥행성적 경쟁에 불이붙어 현재는 전세계 흥행성적이 10억불이 넘어가는 영화가 30개 정도를 돌파하며 상위권의 《반지의 제왕》이나 《죠스》같은 영화들을 전부 갈아엎고 《스타워즈 에피소드7:깨어난 포스》나 《어벤져스》같은 신세대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차지하고 있는 상태이다. 북미는 영화시장의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있으며 과거 영광을 거쳤던 발리우드는 점차 침체기가 지나 현재는 가끔 나오는 작품들을 제외하면 미미한 영향력을 보여준다. 중국의 영화시장이 2위로 엄청난 상승세를 그리며 《몬스터 헌트(착요기)》와 《미인어》등의 자국 영화의 흥행과 《퍼시픽 림》이나 《워크래프트》같은 해외에서 흥행성적이 애매했던 헐리우드 영화들을 먹여살리면서 새로운 공략국으로 자리잡았다. 현재 헐리우드 영화들은 중국시장을 목표로 둔것이 너무 적나라하게 보이는 영화들이 다수 등장하고 있다. 거기에 한국은 영화시장의 3위를 차지하며 대부분의 영화가 한국에서 흥행하고 좋은 평을 받는다면 해외에서 성공한다는 공식이 생겼다고 말이 나오는 만큼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들이 한국에서 선개봉하는 경우가 많아지고있다. 그리고 《인터스텔라》의 한국 흥행성공부터는 한국 관객들의 영화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되면서 한국을 목표로 한 마케팅이나 내한사례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하지만 이런 영화 산업의 상승세에도 불구하고 현재 영화 산업의 미래를 완벽히 장담하기는 힘든데 이유는 과거의 영화들에 비해 영화들이 시리즈화되어가거나 리부트, 리메이크 되면서 고전 작품들을 새롭게 재구성하거나 속편을 제작하거나 프리퀄을 제작하는 경우들이 심각하게 늘어나면서 일원화된 영화 산업의 형태에 대한 부작용이 생겨나고있다.

예술적 의의

영화는 영화 작가가 체험한 실재시각과 청각 이미지의 창작적 구성을 통해 재현하는 예술 행위이다. 즉, 카메라 필름·조명·사운드 등 근대 과학 기술의 급진적 발달이 가져다 준 기계공학적 표현 도구를 이용하여, 영화작가가 그의 메시지를 대중에게 진술하는 종합적 예술 장르인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의 종합 예술이란 의미는 연극·문학·음악·무용·조각이나 미술의 제반 요소가 전체 영화를 이룩하는 데 필요불가결한 부분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 이외에, 영화는 여타의 구예술에서 독립된 새로운 제7예술이라는 것을 말한다.

영화 예술의 특징은 움직임이다. 즉 카메라 앞에 놓여 있는 피사체들의 동작, 카메라 자체의 기동력, 렌즈와 셔터의 시간적 조절에서 유기되는 동작, 그리고 개개의 분리되어 채록된 이미지들의 조립을 통해 생기는 영화적 동작이 주가 된다. 그래서, 영화를 음악과 가장 유사한 예술 또는 시적 동작표상이라고 한다. 여기서 동작은 영화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이데아'를 전개시킬 수 있도록, 그의 생각을 조직·구성하고 전달할 수 있는 표현의 동력이다. 이것은 '몽타주'라는 기초적이며 본질적인 영화의 창작 방법에 의해 조성된다. 몽타주 이론의 창안자인 러시아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이나 푸도프킨은 영화를 시작에 비유함으로써 영화의 표현수단, 즉 배우·의상·장치·색채·앵글·조명·쇼트·렌즈·구도·상징·카메라 동작과 일체의 청각적 요소를 선택하고, 이들을 작가의 획책된 의도에 따라 제한된 시간적 콘티뉴이티 내에서 조립한다는 영화의 기초론을 제시,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이것은 정석이다. 환언하면 영화의 청사진격인 시나리오에 기술된 문자 매체인 단어··과 문장을 영화의 표현 매체에 의해 소상 이미지로 대치시키고 다시 이들을 운율적 구성법에 의해 조립할 때 개체의 이미지들이 전체적인 톤 안에서 생명력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이 창작의 과정은 순전히 작가의 주관적 경험과 개성적 스타일에 의해 감정과 판단력의 조화를 통해 구현되는 감독의 예술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영화는 실제의 삶과 달리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도약한다. 각기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거리감 없이 시간적 통일 내에서 하나의 전체로 인식케하는 신비적 묘기를 지닌다. 이러한 영화의 비기는 커팅·프레이밍·트랜지션·카메라이동, 그리고 리듬과 템포 등 기초적 영화 미학의 수단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 영화적 시간은 동작의 영화적 재현을 위해 선택된 각기 분리된 쇼트들의 수와 그 지속시간에 의해 지배되며, 관객의 지각력을 통한 심리적 흐름의 통일에 의해 결정된다. 영화의 공간성도 몽타주 수법에 의해 조성된다.

영화의 가장 큰 제약은 막대한 제작 자금과 영화 미디어의 강력한 대중동원의 사회적 기능이다. 이것은 영화 작가의 창작의 자유를 저해하는 두 가지 기본 요소이기도 하다.

영화 작가는 시인이나 화가와는 달리, 영화를 제작하는 데 숱한 인원과 장비를 동원해야 하며, 또 완성된 영화는 흥행을 통해 최소한 제작비를 다시 회수해야 한다는 절대적인 제약을 받는다. 이것은 영화가 예술과 대중 오락의 양면적 성격을 동시에 지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숙명적 난점이기도 한 것이다.

영화에 대한 일반론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몽타주론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통일된 정론이 없다. 이 점은 영화가 아직도 미개척의 예술 분야이며, 활자 문명 시대의 바톤을 이어 영상문명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오늘날 대표적인 새로운 예술의 장르로서 영화의 가치와 의미가 탐구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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