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창동인블루 시리지의 다섯번째인 이 글 역시 그림에 대한 필자의
사적인 그림읽기이다. 옛 마산의 도심 창동의 골목길에 발자취를 남긴,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이 곳 골목을 드나드는 이웃 화가나 예인들에
대해 필자의 개인적인 호기심과 부러움이 담긴 산문의 글로서
소설적 형식을 가미한 그림이야기이다.
창동인블루 5의 표지는 조현계의 그림으로 장식하였다.
“요즘은 현장 사진을 찍어서 실내에서 작업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렇게 하면 새소리와 추위·더위 등 전해지지 않은 게 많아요. 비올
때의 풍경은 투명하면서도 독특한 느낌이 있는데, 그것도 감각적으로 살릴 수 있고요. 그래서 제 그림이 환하지만은 않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유화처럼요.”
자연의 오묘한 감각과 유화의 무게감을 갖고 있는 그의 그림은 얼마 전 추석 때 찾은
전남 고흥의 저녁하늘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해질녘 분홍 하늘을 행여 놓칠까 마음이 급해 선 몇 번에 그어내린 산수는 힘을 갖게
됐고, 추상적인 느낌마저 더해졌다. 현장에서 우리 산수를 그리다보니 수채화가인데 우리 전통 한국화 풍이 배어나오기도 한다.
최근에는 붓끝 나무 부분으로 누드 크로키를 그리는 데 푹 빠져 전시장 입구 한쪽 벽면을 가득 채웠다. 40년이 넘는 붓질에서 나오는 선들이니 육감을 담는 데 짧은 시간도 부족함이 없다.
작가는 “붓끝으로 그려 신선한 화법이라고 말씀들을 많이 해주신다”며 “현장에서 담아낸 직접 채집한 그림들, 새로운 화법으로 그린 크로키까지 다양한 매력을 많이 느끼고 가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슬기 기자
요즘 나는 이따금 자책의 시간을 갖는다. 화가의 손에 대한 편견
화가의 손이 끊임없이 진화한다는 점을 간과 했었다.
조현계, 정은승, 정순옥 등 지역화가들에 대한 기존 관념아래
가진 편견에 대하여.
그림에만 몰입하는 화가의 손은 캔바스위에서 성장한다.
어느 시점부터 화가의 손이 형태와 색의 변화를 멈추는 화가들이
대부분이다. 왜? 현재호 남정현 그리고 박?의 그림에 화가의
손은 성장을 맘추고 있다.
하나는 화가의 손은 묶어두지않으면 스스로 자란다.
두뇌의 지적 사고와 무관하게 스스로 자란다는 점을 새삼스레
느낀다. 정은승의 그림이 사간의 흐름에 따라 스스로 진화한다는
것을 느끼다.
두번째는 자신의 주변, 체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창동 미술의 좀더 깊이잇는 관찰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다.
윤용:
?????구본웅과 이상/
?????마그레트의 파이프윤용:
<푸른 누드>는 색을 입혀 오려 낸 구아슈 조각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당시 아프리카 조각을 모아뒀던 마티스의 컬렉션,
그리고 1930년의 타히티 방문은 그에게 이러한 기법의 영감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마티스가 이러한 성과들을 종합해 독창적인
연작을 선보이는 데는 20여 년의 시간과 잠깐의 침체기가 필요했다. 마티스는 색을 입혀 오려 낸 구아슈 조각을 배열하는 과정이
캔버스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한결 쉬운 작업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이 과정을 '종이에 드로잉'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형상은 오려 낸 조각들 사이의 공간 속에서 정의되고 있으며, 그 효과는 거의 부조의 느낌을 자아낸다. 물론 2차원이라는 데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푸른 누드>는 색채와 형태를 완벽하게 통합하고자 한 마티스의 오랜 여정의 절정이자
이러한 화풍의 종착점을 보여 준다. 그러나 <푸른 누드>의 이러한 독창성이 마티스의 계승자들에게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다. 비알라 같은 1960년대 프랑스 예술가와 로스코 같은 미국 추상화가들은 마티스가 닦은 토대를 기반으로 각자의 성과를
달성해 갔다.
인문:
인물의 사지는 종이 접듯 포개져서 ‘장식적 육체’로 최소화했다. 이 누드가 여성이라는
사실은 타원형 머리 아래로 돌출된 두 개의 작은 가슴을 통해 알 수 있지만, 또 다른 경로를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푸른
누드’는 마티스가 1907년에 유화로 제작한 야수주의 전성기의 대표작 제목과 같다. 그 원작 유화에서 여성은 <푸른 누드 II>에서처럼
한 손을 구부려 머리에 올리고 두 다리도 구부린 채로 재현되었다. 따라서 말년에 제작된 ‘푸른 누드’ 연작은 그가 전성기에 누린
야수주의를 간결한 장식주의로 축약해 놓은 듯도 하다. 어느 미술사가는 ‘푸른 누드’ 연작이 “뭔가 만질 수 없는 재료로 만들어진
조각 같아서, 조각처럼 입체적이지만 평면적이고 장식적인 정확성도 띠고 있다.”고 평했다.
하지만 그가 노년에 보인
미니멀리즘 미학은 당시 유행하던 추상 미술을 뒤따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회화의 본질에 관한 논쟁이 구상 미술과 비구상•추상
미술로 양극화되어 전개되던 1947년 그는 “요즘 유행하는 이 구상 예술과 비구상 예술 사이의 구분법을 넘어서야 할 필요를
느낀다.”는 메모를 남겼다. ‘푸른 누드’는 비록 형체가 존재하지만 관습적인 재현 방식을 버리고, 비록 추상화처럼 평면적이지만
재현을 포기하지 않은 그런 과도기적 그림이다. 즉 둘 사이의 타협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의 태양이 밤에도 빛날 수 있다면 나는 색채에 물들어 잠을 자겠네…
아직 그려지지 않은
아직 칠해지지 않은 희망을 품고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 이젤에 못 박힌다.
끝난 걸까? 내 그림은 완성된 걸까?
모든 것이 빛나고 흐르고 넘친다.
저기에는 검은색, 여기에는 붉은색, 파란색을 뿌리고
나는 평온해진다.”
화가 샤갈이 1950년대에 쓴 ‘그림’이라는 자작시의 일부다. 세상을 오로지 색과
캔버스로만 사유한 예술가의 내면이 담긴 글로 자주 인용된다. 피카소는 일찍이 샤갈을 두고 마티스 이후 색채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작가라고 칭송하고 그만큼 빛을 잘 이해하는 사람도 없다고 말했다.
우주 삼라만상은 온통 색으로 구성돼 있다. 인공이든 자연이든 세상은 색채 그 자체다. 빛나는 태양 빛과 어우러져 모든 사물과 현상은 그 고유의 빛을 발하고 있다. 빛이 있어서 세상은 아름답고 예술은 더욱 빛난다.
정은성:그래요?!. 통영의 섬은 자도 마음에 들어요.
인문: 그런데 박선배, 제게는 최영림의 그림들이 연상되던데. 역시 그분과는 인연이
있었군요. 서라벌 예대에서 교수와 학생으로 만나셨다고요?
0년대 초기의 작품은 목판화의 음각기법을 응용하여 제작되었고 검은색이나 짙은 청색의 단조로운 색조 속의 큐비즘적인 형태를 취하는 등 어두운 색채를 보입니다.
그러다가 60년대 접어들어 한국적인 설화를 주제로 한 해학이 넘치는 작품을
연작형태로 만들었습니다
민화나 민담, 불화에서 소재를 가져와 재구성하여 명랑하고 소박한 느낌을 주는 작품들은.
황토색 주조에 흙모래까지 도입한 토속적이며 따뜻함과 건강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며 꽃, 여인들과 아이들,
어쩌면 이산가족으로 아픈마음을 달래며 제작한 작품이 더 없이 포근하고
따뜻한 체온을 느끼게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
-토속적이니 민화적이니 하는 내그림에 대한 평이 싫지 않다
결국 내 그림이 마티에르나 소재가 우리것이라는 의미일텐데, 나의 개성을 우리것을 찾는
노력으로 보아준다면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최영림 (1916
이 글의 후기는 인문이 원로 화가회 회장 박춘성의 개인전 관람후
두 가지점에서 스스로 에 대한 자기 반성ㅇ으로 부터 시작된다.
박 화백은 100년 전의 풍경이나 생활상을 화폭에 담고 있는 화가로 정평이 나 있다.
수많은 화파(畵派)가 등장해 화단을 휘두르는 동안 박 화백은 여러 미술풍조에 동조하지 않고
50년 화업을 이뤄오는 동안 혼자만의 독창성을 노래하며 외길을 걸어 왔다./
똑같은 사물이라도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성향과 철학에 따라 그 그림은 천차만별로
세상에 공개된다.( 대상의 재현???) /
마산 출신의 이림의 제자.
1970년대 이후에는 서정적인 자연주의 형태로 시골생활의 정경을 소재로
삼은 작품들도 병행시켰다. 1971년에 비구상작품 「관계」가 카뉴국제회화제에 출품되었다.
하나는 화가의 손은 묶어두지않으면 스스로 자란다.
두뇌의 지적 사고와 무관하게 스스로 자란다는 점을 새삼스레
느낀다. 정은승의 그림이 사간의 흐름에 따라 스스로 진화한다는
것을 느끼다.
두번째는 자신의 주변, 체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창동 미술의 좀더 깊이잇는 관찰이 필요하다는 점을
깨닫다.
인문은 창동을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화가의 손'을 전부터 부러워했었
처음 현재호를 만나게 되면서, 그리고 창동의 여러 화가들의
작업실에서 물감냄새에 친숙해지면서부터 그런 마음이 생겼던 것 같다.
붓을 한번 손에 쥐어보고싶었으나 자신에게는 그런 손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생각이 강해 그저 화가들의 손놀림을 지켜보며 ,포시옹의 말처럼, "
예술은 손과 함께 만들어지는 것이다, 정신이 제아무리 대단한 수용력과 창의력을
가졌다해도 손의 도움이 없었다면 내면에 타오르는 어떤 환영을 시각적으로
고정시킬 수 없었을 것"이니 하면서 그들의 손길을 신기하게 바라만 보았을
뿐이었다.
후기에서는 1960대를 전후하여 창동을 무대로 활동하였던 화가들, 이를테면,
????를 윤용화백이 피력한 개인적인 회상을 담았다./
관은 전주(全州). 본명은 정규(正揆). 경상남도 마산 출신. 한의사 가문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1936년에 서울의 조선미술원에서 서양화가 박광진(朴廣鎭)에게 유화를 배우다가 다음해동경(東京)으로 가서 데이고쿠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 서양화과에 입학하였으나 중도에 자퇴한 뒤 마산으로 돌아와 홀로 제작생활을 하였다.
마산의 중·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를 지내며 개인전과 혁토사(爀土社)·흑마회(黑馬會) 등의 그룹에 참가하여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시각의 자연풍경·선창가·어물 및 인물 풍정 등 정감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959년에 서울로 이주하여 뒤늦게 국전(國展)에 참가, 몇 차례의 특선을 거쳐 추천작가·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을 역임하였고, 신기회전(新紀會展)·형상전(形象展) 등에도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60년 무렵부터는 미술계의 새로운 분위기에 동조한 추상작업으로 중후하고 풍부한 색상과 구성적이며 상징성을 내포하는 자유로운 형상의 화면을 추구하였다. 그 경향의 작품은 주로 국전에 출품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에는 서정적인 자연주의 형태로 시골생활의 정경을 소재로 삼은 작품들도 병행시켰다. 1971년에 비구상작품 「관계」가 카뉴국제회화제에 출품되었다.
'청년' 100년 전 농촌을 그리워한 독자적 심상
최영림과 박춘성-마고 출신의 박춘성은 마산상고에서 교편을 잡았던 최영림을
서라벌 예술대학에서 교수와 학생으로 만나다.
양달석-마산의 미술 여명기에 1947년 마산 창동의 당시 마산백화점 에서 개최된 전국미술전람회에
이림 이준 문신 최운 등과 다불어
서울의 깇ㅁ기창 박래현 그리고 부산에서 활동하던 양달석도 참여.
거제 출신의 양달석은 당시 소를 기르며 어렵게 지내던 시절의 기억이 평생 그의 작품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림 속에 산과 들에 소와 함께 있는 목동의
모습이 유독 많다. 소와 목동이 등장하는 평화롭고 목가적인
농촌풍경을 묘사해 '동심의 화가'라는 수식어도 붙었다.
소와 목동의 화가'로 널리 알려진 여산(黎山)양달석은 주로 부산에서 작품생활에 전념하였다.
주로 민족정서가 물씬 풍기는 목가적 풍경을 독특한 표현 기법으로 동화처럼 그려낸 서양화가로서
50여년에 걸쳐 수많은 미술전, 전람회
참여와 수상경력은 물론, 36회의 개인전을 개최하였으며
<사슴과 소녀>, <농가>, <목동> 등 2,600여 점의 걸작품을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