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회상의 개울
1.어둠과 섬광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살아 온, 김 김동준과 부인 박상금은 딸 넷
다음에 막내이자 다섯째로 귀하게 얻은 아들 대환이 세살나이에
특별한 손재주를 보이는 게 신통하였다. 말도 채 배우지못한 나이의
아들녀석이 손에 든 필기도구로 방의 벽이란 벽을 손에 닿이는 대로
온통 그림낙서로 채우는 것이었다. 벽에 붙은 누나의 그림들을
흉내내어 신기하게 그렇게 혼자 낙서놀이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그림낙서가 점차 더 익숙해지면서 어떤 낙서는 그의 누이들 보기엔
곡선과 여러 점들로 이루어진 어떤 둥근형태가 얼핏 제일 큰 누나의
얼굴을 연상케 하기도 하였다. 아이때부터 그런 특별한 놀이를 좋아했던
아들이 자라 소년이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학교에서 미술과목을 제일
좋아하였고, 그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해에는 <일본어린이 크레파스
대회>에 출품하여 우수상을 받는 재능을 보이기도 하였다.
김대환이 1947년에 마산 백화점에서 개최된 제1회 마산화가회전에
그의 그림을 출품함으로써 마산 지역의 화가들에게 그의 그림솜씨를
알리는 기회가 있었다. 그가 일본에서 귀환동포로 귀국한 부모님과 함께
마산에 정착하게된 지 멀마되지않아서였다.다른 청년화가들, 이른바
문신,이림, 임호 등과 함께 그 전시회에 참여했었던 것이다. 그가19세의
나이에 마산화가회전에 출품한 것은 어린 날의 그 특별한 손재주가
그대로 살아 이어졌음을 뜻한다. 그를 그 전시장으로 이끈 사람은
이 지역의 자유 연극인이자 창동의 예인이었던 안윤봉이었다. 그는 청년
김대환의 그림솜씨에 매료되었고, 그 이래로 항상 그는 화가 김대환의
그림 애호가로 그리고 후원자로 이 지역에서 평생을 그와 함께 살았다.
김대환이 안윤봉의 권유로 처음 그 전시회에 참여한 데에는, 이름난
화가들이 이들이 어떤 화가들인가, 그리고 그들이 그린 그림들은
어떤 것인가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에다, 자신의 그림솜씨가 그들보다
못할 게 뭐 있겠는가, 하는 우쭐함도 작용하였으리라.
1988년에 발행된 <마산미협 50년사>의 한 페이지에 청년 김대환 이름
한 줄이 다른 유명 화가들- 위의 마산 지역의 화가들 뿐 아니라 타지역에서
참가한 화가들로 김기창, 박래현,양달석, 김종영, 최순용, 김해근, 박진명,
김용환-등과 함께 나란히 기록되어 있었다. 이 전시회에는 108점이
출품되었으며 이 전람회가 계기가 되어 당시 마산을 서울과 부산 등 전국을
연결하는 미술의 중심지 역활을 하게 되엇다는 글도 그 아래 눈에 띄게
추가되어 있었다.
다시 교당 김대환의의 소년기로 되돌아 가보자. 그는 청년기 이래
지금의 여든 중반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삶의 대부분을 해안의 도시
마산에서 보내왔지만, 소년기에 늘상 자신의 곁에 있었던 일본
대분항의 바다가 지금도 눈에 선하고 ,청년기에 그의 마음에 화가의 길을
열어 준 일본인 스승 목교당이 가슴에 남아 살아 있다. 일어 표현이 지금도
자연스러운 그는 1929년 3월 3일 일본 구주 대분현 대분시에서 가족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한 막내이자 네째인 외아들로 태어났었다. 그리고 거기서
일본인 소년들과 함께 자랐었다. 그의 부친은, 한일 합방기였던 당시
조선인들 상당수가 그러했듯이, 고향땅에서보다 노임이 더 나은
일본으로 건너와 대분시에 근거지를 마련한 조선인이었던 것이다.
:선생님, 60후반의 나이에 소년시절의 일본의 대분 항구를 회상한
글이 인상적이었습니다.한국인 친구 깜치의 얼굴하며, 일본 소년과의
한바탕 치고받고 하는 풍경을 엊그제 일처럼 기억하든데요. 두 소년이
처음으로 만났을 때는, 일본에 태어난 대환은 조선말을 몰랐고,
조선인으로 부모님따라 처음으로 일본으로 살러 온 깜치는 일본말을
몰랐다는 교당의 글이 꽤나 인상적이었어요. 그리고 깜치에게 말본 말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면서요. 두 소년은 그렇게 친해졌고 나중
둘이 60 노인에 되었르 무렵 일본에서 부자가된 그깜치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니!어쨋거나 한국에서 건너 온 그 깜치는 일본에서 평생을
살게되었고, 일본에서 태어나 조선말을 할 줄 몰랐던 소년 대환은 그 후
일본을 떠나 마산 사람이 되고.... 그 대분항의 추억은 교당에겐
특별한 것이겟네요
:그 때의 대분 해안 풍경은 지금 80 중반의 지금도 생생한걸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 뚜렷해지지요. 아마 그때가 내 나이 열 두세살
무렵이었던가. 장마가 걷힌 오랜만의 맑은 오후 근처에 사는 친구
깜치(깜둥이)와 함께 수영하러 집을 나섰어요. 우리 둘은 오이따항
으로 빤스만 걸친 벌거숭이로 달리곤 했답니다. 해안은 집에서 800미터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에 있었지요. 그 항구 규모는 작지만 그 곳에서
오사카를 오가는 큰 여객선이 자주 왕래했구요.
: 교당의 소년 시절이었다면 도대체 언제쯤입니까?
:해방되기 전의 일이었지요. 1940년 여름으로 소위 대동아전쟁 초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소위 내지 (內 地-일본열도)에 온 반도인(조선인)들은
타국에서 살아 남기위해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닌 시대였지요.그렇지만
우리 어린이들이야 철부지들로 항구의 해안으로 달려가 천방지축으로
뛰고 놀았답니다.
:그 무렵이라면, 전쟁이 종반으로 치닫던 시절 아닙니까?
한국 청년들이 대거 강제로 전쟁에 되었던 시점이었겠군요.
: 그렇지요. 조선에서 징용되어 온 청년들을 전선으로 보내는 군함들이
이 곳 항구에서 출발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군함들이 출항할 때
군의 부라스밴드가 연주하던 왈츠 멜로디가 이별의 항구 분위기를
고조시켰지요.소년기때의 그 순간이 이따금 뇌리를 어지럽힙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소년기를 그 땅에서 보낸 후 한국으로 건너온
교당에게는 20세의 나이에 미래의 삶의 진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한 순간이 있었다. 빛의 상실이 주는 깊고 두려운 어둠 그리고 뒤이은
새로운 한 줄기 섬광의 명멸! 그렇지만 깊히 들여다보면 그 섬광은,
닥친 절망적인 짙은 어둠 뒤에 찾아 온 내면의 그 불빛 번쩍임은,
스스로의 의지로 밝힌 것이었다. 그 결정적인 순간은, 오랜 후 아련한
마음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잠깐 반짝이며 사라지는 들판의 반딧불
같은 것이겠지만, 그 청년의 곁에서 그를 지켜본 관찰자의 시선이라면,
한 순간의 깊은 절망감, 견딜 수 없는 슬픔의 방황에 이어 일어난 특별한
체험의 과정으로 보일 것이다.김대환은 그 나이에 마산에서 한쪽 눈을
치명적으로 다치게 되고, 그 다친 눈을 고치기 위해 의료기술이 좋다는
일본으로 밀항을 감행하였으나 그 실명은 거기서도 치유할 수 없는
상처로 진단받은 시점에 찾아 간 일본인 서화가 목교당과의 만남으로
이어진 과정이 그것이다.
그 섬광은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다른 숱한 체험적 요소들의 퇴적
속에 빛을 잃지않은 광원으로 묻혀있던 중 어느 시점에 홀련히
그 퇴적층을 뚫고 새어나와 그 광채를 다시 발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나이 41세에 가진 첫 개인전이 그것이었다. 청년기의 그 잃음의
상처와 얻음의 반짝임의 그 행운이후 무려 20년만의 일이었다. 극장의
영화 광고판 그림작업에서 벗어나 그가 늘 마음으로 원하던 자유로운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엇다. 1969년 10월 창동의 한성다방에서
가진 그의 첫 전시회가 곧 그 길의 첫 결실이었다.
교당에게 화가의 길은 후기 인상주의화가 고갱의 의지적인 선택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고갱이 직업 은행가에서 전혀 새로운 화가의 길을
선택한 것은, 의지적 결행으로서 치명적인 선택이었다. 그 선택이,
자신의 꿈의 길로 나선 그 선택은 그에게 현실적인 안정된 삶의 상실을
의미한 것이기에 치명적인 것이었다. 교당의 경우는 , 이와는 달리
누에고치속의 번데가 껍질을 벋고 나비로 태어나는 순리적인 탈바꿈
같은 것이었다. 그가 무려 20년 이상을 간판 그리기로 얻은 안정된 생활이
그 직업을 버리고 전업화가로 나섰다고 해서 그의 현실적인 삶이
흔들린 것이 아니었다. 그가 이미 미인도 화가로 이름이 나기 시작해
그의 미인도, 달마도 영모화 등 전통적인 그림으로 생계를 꾸려갈 수
있었다는 뜻이다.
김대환이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지 몇 년 후 20살때 불행하게도
한쪽 눈의 실명,그 눈을 고치려는 일념아래 감행한 일본 밀항, 일본인 화가
목교당을 스스로 찾아가 그의 문하생으로 몇달간 본격적인 그림공부에
전념하게된 것 등 이른바 20세 전후의 청년이 선택한 치열한 삶의 자세는
결과적으로 그를 운명적으로 화가길로 이끈 마음의 등불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 거기서 17세에 이르기까지 살며 교육받았으므로
그 후 마산으로 이주한 후 줄곧 이 지역에서 살아오는 동안에도 그의 몸과
마음에는 일본의 문화적 흔적이 적잖이 배어있었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그 점은 화가로서의 그에게 어떤 점에서는 긍정적인 요소로도,
다른 점에서는 부정적으로 요소로도 작용하였을 것이다. 예컨대, 교당의
그림에 왜색이 느껴진다는 화가들 사이의 비평이 그 부정적인 요소의
하나일 것이다.
해방 되던 해에 귀환동포로서 마산에 정착한 부모님 곁에서 청년
김대환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홀로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그리기를
독습하던 중 그의 소박한 일상을 송두리채 뒤흔던 불행한 일이 샹겼다.
어느날 간판점의 일터의 동료들과 점심식사를 하던 중 사소한 언쟁이
불씨가 되어 격렬하게 싸움질하는 두 동료를 말리다가 그만 친구 손에
들린 가위에 왼쪽 눈을 다치게 되었고 치료시기를 놓쳐 실명위기에
처하였던 것이 그것이었다. 마산의 평안안과나 부산의 김상룡 안과에서
치유할 수 없는 상태로 진단받은 상황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닥친
불운을 체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그는 다친 그 눈을
고치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부산 영도에서 밀항선으로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숨어 들어갔다. 일본의 선진 의술의 힘을 빌려야겠다는 절망적
몸부림에서엿다.고깃배 크기의 작은 기관선으로 무려 현해탄을 건너
일본 좌세보 항에 사는 셋째 누나댁으로 찾아가기 위해서 였다.그의 나이
20세였을 때였다.
그 곳 일본의 의료 기술아래서도 그의 눈은 더 이상 고칠 수 없었다.
결국 한쪽 눈은 포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그가 그런 절망의 마음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인 서화가 목교당을 만남을 통해서엿다.
80세의 동양화가의 문하생이 되어 몇 개월간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게
된 것이 그의 삶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던 것이다. 육신의 눈은 한쪽
잃었지만, 대신 마음의 눈이 새롭게 열리게 된 것이다. 화가가 될 수
있다면 하는 염원이 처음으로 그 절망의 고통을 진정시켜줌을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지금 팔 순 노인의 그 소년같은 천진스러운 성품이 유년기의 온화한
가정분위기 아래 형성되었을 것임을 그 때의 가족구성에 비추어, 좀은
느낄 수 있지만, 이에 더하여 절망의 순간에 만난 일본인 노화가
목교당의 가르침이 그의 뇌리에 전류처럼 흐름을 느꼈으리라는 점도
유추된다. 그를 통해 그림공부를 화가 스승으로부터 처음 배울 때에
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며,'어린아이의 때묻지않는 천진함이 곧
아름다움이라'는 스승의 비유적 표현을 마음에 새겼을 것임에
틀림없다. 지금도 붓을 잡고 바닥의 종이에 마음을 모으는 교당은
그 스승을 통해 사군자의 기초 배울 때 붓과 먹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기억하고있다:
묵이란, 농담에 따라 빗나기도 하고 담백하기도 하며 사물에 따라
엷기도 하며 깊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