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원고

rv hosteller 14- In Siberia

jhkmsn 2015. 10. 6. 09:53

4. Hosteller

 

 In Siberia

    1.

 

 

 

 

러시아 여행길에서 내게 손짓한 것은

 

평원 숲속으로 반쯤 사라지는

 

검은 기차의 움직임이었다.

 

깊은 숲의 고요함과자작나무가지끝의 은빛 반짝임이었다.

 

마음의 귀에 들리는,

 

시베리아 숲 그 어딘가에

 

숨어있을, 바이칼 호수의 바람소리였다.

 

 

 

모스코바 공항에서 안개 자욱한 평원을 가로지르며 도심 족으로 내닫는 택시 안에서 바라보는 잿빛 도시의 외곽 그것은 빛이 사라진 무거운 대지와 눈구름의 하늘 그리고 도심으로 향하는 대로변 나목들의 침묵이다. 빛도 그늘도 아니다. 그 스펙트럼의 중간 어디 쯤, 그러나 어두움이 훨씬 더 강한 쪽의 무채색 풍경이다. 작은 숲들을 이루는 수직선의 검은 빛 나무들이 인상적이다. 먹물로 담아낸 설경산수화들! 빛은 스페인의 카디스의 바다로 다 몰려간 것인가?

 

 

 

시베리아횡단 기차를 기다리는 모스코바역 대합실에피아노 선율이 흐르기 시작하고창밖으로 수직의 탑 너머 지평선이 아득하다.홀 안 자리마다 여행자 가족들로 가득하고혼자 집을 나선 듯 낯 선 이방인 차림의 세 여행객들이유리벽에 제 각기 따로 기대 서 있다.

 

 

 

한 사람은 앉거나 옆으로 누운 수백 명의 다른 여행객들이 그런 것처럼피아노 연주자의 두 손과 건반 쪽을 응시하고,또 한 사람은 바깥으로 몸을 향하고 선 것이 모르긴 해도 평원과 수직을 이루는 잿빛 속의 먼 첨탑 하나 쪽으로 시선이 향하는 것 같고 그 나머지 한 사람은 그 피아노에 등을 돌린 자세이나 두 귀와 마음은 온통그 선율 쪽임에 틀림없다.등짐을 하고 있는 손 하나 선율 따라 움직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저 기품 있는 소나타곡은 베토벤의 것이리라.

 

 

 

가만있자, 혹시 저 깊은 우울함은 무소로그스키 곡 같은데.아니야, 부드러운 음색으로 보아 라프마니노프곡일런지도 모르지. 감미롭고 비통한 탄주를무겁게 뒤따르는 연주자의 손가락들.꿈꾸는 듯한 율동 앞에 연주자의 손가락들이 춤추고. 아니, 뒷짐 진 그 여행객의  손이 오히려 흰 건반위의  탄주를 유도하는 듯하다.모스코바 역 대합실 공간의 전혀 예상치 못한 피아노 탄주.하늘에서 내리는 빛과 색채의 선물.나는 이런 영적 전율의 순간을 누리려고 여기 모스코바에 왔나보다.

 

 

 

달아나는 기차의 차창 밖 먼 곳의 눈덮힌 평원은 내게는  숲의 섬들이 떠 있는 고요한 은빛 바다였다. 눈을 몇 번이나 떠 부벼 살펴보아도 그 풍경은 수평선이 아득히 보이는 바다였다. 모스코바를 벗어나 달리는 이르쿠츠크 행 기차속에서 밤을 맞이한 그 다음날 눈에 들어오는 평원의 적설 풍경이 그러했었다.

 

 

 

유럽쪽 러시아에서 시베리아로 가려면 우랄산맥을 넘어야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달리는 동안 잘 감지되지 않는 것이었다. 간 혹 야트막한 능선 같은 데를 오르며 지나는 것 같아 이제 산맥이 나타나나보다 하였으나 달리는 내내 시야에 포착되는 것은 거의 대부분은 적설의 평원이었고 숲과 지평선의 연속이었다. 그 적설의 대평원은 한낮의 잠든 바다였다. 바다 한 복판을 내닫는 배의 선실의 창가에 나는 서 있고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가까이에는 은은한 은빛의 자작나무 숲이 좀 더 먼 곳에는 점점이 이어지는 검은 빛의 거대한  숲들이 섬이 되어 떠 있는 고요한 적설의 바다였다.

 

 

 

그 착시 현상은 아마도 지금까지 나의 삶에서 바다가 오래도록 내 의식을 알게 모르게 지배해 왔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득히 보이는 검은 섬과 하늘과 맞닿은 수평선과 그리고 은빛 반짝임의 한 낮 고요한 남해바다가 그 순간 그 설원의 풍경위에 겹쳐져 떠올라서 그랬을 것이다. 

 

 

 

시베리아 대륙횡단 객차는 달리는 호스텔 방이었다. 6개의 침대가 필요할 때마다 효과적으로 갖추어지는 달리는 작은 규모의 호스텔 방이다. 차이가 있다면 주로 젊은이들이 차지하고 있는 세계 곳곳의 호스텔 방에서는 적어도 내게는 언어가 주는 불편이나 고통은 없으나, 이에 비해 이 객차에서는 말이 통하지 않는 무리들 틈에 끼여, 귀 먹고 말을 못하는 자의 불편이나 고통을 고스란히 감수해야만 하는 그런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달리는 이 싸구려 호스텔에서 나는 자주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객차와 객차의 연결공간에서 차창에 얼어붙은 서리를 닦아가며 바깥으로 시선을 보내는 게 제일 자유롭고 편한 일이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나의 목적지 이르쿠츠크에 이르기까지 모스코바 역을 떠나고부터 내게 보여주는 것은 끊이지 않는 무거운 잿빛 하늘, 바다보다 넓은 적설의 땅, 그리고 은빛 자작나무들의 침묵이었다. 나는 처음 언어불통이 주는 불안감을 뜨거운 러시아 차로 달래며 오로지 시선은 그 흔들리는 풍경에만 두었다. 순간순간 이 땅은 이미 3월인데 온 천지가 잿빛과 눈빛뿐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3등 칸의 같은 객차의 옆 칸막이 공간에 거친 노동자 표정의 남자 세 사람이 세잔느의 한 그림을 연상케 하는 카드놀이를 펼치고 있고, 그 너머 다른 칸막이 공간에는 도베르망 한 마리가 태평스레 주인 여행객 앞에 엎드려 자고 있다.  광활한 적설의 평원이 내 눈 앞에서 은빛 섬과 검은 섬들이 떠 있는 고요한 바다로 보이기 시작한 것은 달리는 이 호스텔에서 하룻밤을 편하게 지내고 부터였다.

 

 

 

3등 칸 승객의 식당차 출입이 통제되고 있음은 뜻밖의 걱정거리였다. 다른 러시아 내국인 승객들과 달리 나는 먹을 것을 미리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 적응하는 길은 오로지 그 어려움을 견디고 참아내는 일 뿐이었다. 그렇게 마음 정하고부터 닷새 정도야 검은 가방속의 빵 조각과 러시아 차 사모바르 만으로도 한 닷새 정도야 버티지 못하겠느냐면서 그냥 달아나는 바깥 풍경에 시선을 쏟기만 하였다.

 

 

 

저녁 무렵 기차가 머문 한 역의 플레트 홈이 한 20여분사이 순식간에 소위 미국 땅의 수아밋 같은 번개시장으로 전용되는 게 아닌가! 음식과 음료수, 술 등을 이고 들고 나온 러시아 주부들로 가득해 지는 것이었다. 이 러시아 여인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후덕한 어머니의 체취! 나는 그네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들의 표정과 몸짓이 담고 있는 것은 따스한 정감이었다. 내가 불안감을 벗고 편안한 이방인 여행객의 시선으로 시베리아의 풍경을 그렇게 즐기게 된 것은 그런 요소들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눈앞에 펼쳐지는 시베리아 풍경은 타이거 숲 지대의 파노라마적 전경이다. 이를테면, 우랄산맥을 넘어 동쪽 편으로 내닫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속의 한 이방인 여행객이 의식 속에 포착한 그 타이거 숲과 평원의 이미지들이다. 모스코바에서 시작된 그 철길은 바이칼 호수 넘어 자리 하고 있는 옛 도시 이르쿠츠크를 그 끝점으로 하고 있었고, 이방인 여행자로서의 내 시선이 머문 곳은 내내 펼쳐지는 적설의 평원과 숲이었다. 

 

 

 

어둠에 잠기는 차창 밖 풍경 속에 불현 듯 이 여행길 길나서기 전 한 지붕 아래에서 아들과 나눈 일주일간의 짧은 생활이 중첩되어 눈에 아른거린다. 드물게 맛보는 살찐 삶! 오늘은 내가 떠나고, 그리고 내가 돌아오기 전에 아들 너는 미국으로 떠나고, 이 드문 행복감을 언제 다시 맛보게 될지. ‘너의 삶의 목표는 손이 쉽게 닿지 못하도록 적당히 높은 곳에 두어라.’ 이 말 한 마디는 해주고 싶었는데.... 

 

 

 

인간을 왜소하게 만드는 거대한 산과 절벽의 북미대륙 풍경과는 달리, 하늘을 가리지 않는 수평의 숲을 군데군데 안고 있는 이 시베리아 평원은 그 광활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겁주지 않는다. 그 폭은 가늠할 수 없고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야생의 존재가 결코 위협적이지 않다. 더더구나 권위적이지 않다. 이 순간 우연히 내게 그렇게 보이는 것인가? 내닫는 기차의 흔들림이나 차내의 분위기에 점점 익숙해져서? 그 이전까지의 심리적 불안이나 초조감에서 서서히 벗어나면서부터 차창 밖 풍경에 몰입할 수 있을 만큼 마음이 안정되어 그런 가? 이 순간 시베리아의 평원은 마치 어머니의 젖가슴 같다! 

 

 

 

기차 안에서 이틀 밤인가를 보냈을 무렵 다음 역 정차할 곳이 옴스크라는 것을 알게 부터 그 고요한 순백의 설경위로 문득 떠오르는 시베리아 유형수들의 피빛 삶의 흔적들! 아 그렇다. 내가 시베리아를 젊은 날 처음 느끼게 된 것은 인간 내면의 그런 몸부림이 담긴 글들을 통해서였다. 토스토에프스키의 ‘죽음의 집’에 묘사되어있는 한 유형수와 개의 포옹은 미국인 냉철한 역사학자 조지 케난이 눈으로 보고 피력한 아래의 사실적 기록을 보면 가슴속으로 더욱 애틋하게 다가올 것이다. ‘ 이 세상에서 인간의 육체적 고통과 절망이 여기보다 더 깊게 스며있는 유형지는 아마 없을 것이다...유배자들은 혹한의 시베리아의 유형지로 쇠사슬에 손과 발이 묶힌 채 몇 달이나 짐승처럼 끌려갔다...........'

 

 

 

나는 플렛홈에 선 채 잠시 토스토에프스키가 4년을 죄수로 보냈던 유형지, 옴스크의 역 플레트 홈에 서서 그의 소설에 담긴 한 유형수와 개의 포옹을 상상한다. 

 

 

 

유형수는 감옥에서 만난 개에게 다가선다.

 

개는 처음엔 사람을 경계하는 눈빛이나 그의 마음을 받아 준다.

 

그 곳 감옥에서 오랫동안 어느 누구로부터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던 개였다.

 

그는 개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그리고 자신이 먹던 빵을 건네준다.

 

개는 온순해져서 그를 정겨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 댄다.

 

몇 해 만에 처음으로 자기를 귀여워해 주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그 유형수가 있는 곳이면 그의 곁에는 언제나 그 개가 있다.

 

감옥 뒤에서 혼자 말없이 걷고 있는 그를 찾아내고는 컹컹 짖어대며

 

그를 향해 달려든다. 그는 품에 안기는 개에게 입을 맞추고 머리를 끌어안는다..

 

개는 그의 어깨에 앞발을 올려놓고 얼굴을 대기 시작하였다.

 

                                         

 

모스코바 역을 떠난 지 3일째 새벽, 기차가 어느 한 역에 가만히 정차하고, 그 좁은 칸막이 공간의 아랫칸 침대를 차지하고 있었던 40대 초반의 그 러시아 여인이 세 개의 큰 가방을 끌며 내렸다. 그녀는 내게 신경질 적이었고 노골적으로 적대적이었다. 그 원인은 아마도 내게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아,그 좁은 공간에서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게 싫었었다. 화장끼 진한 얼굴의 첫 인상에다 배꼽을 드러낸 간이복 차림의 방자한 행동이 그랬고, 옆 칸막이 노동자 차림의 승객 하나가 술에 취한 목소리와 그녀 곁, 그러니까 내 침대의 아래에 다가와 그녀와 나누는 수작에 어쩐지 홍등가의 여인으로 여겨졌었던 것이다. 그녀는 내 덮는 홋이불 덮개 자락이 조금만 아래로 내려가면 신경질적으로 그 끝을 내 침상위로 위로 휙하니 던지듯 올려놓기 까지 했었다. 

 

 

 

그 칸막이 공간에는 간난아이를 안고 앉은 젊은 여인도 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밉살스런 여인은 그 어린애에게 쏟는 정성이 지극했었다. 아이 토닥거리는 솜씨가 그 어머니보다 훨씬 나았다. 울음을 달래는 솜씨나 우유를 먹이는 자세에 정성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그 아이는 그녀의 품에 있을 때는 소리 없이 잠이 들거나 방긋거리는 것이었다. 그 순간만은 치근대는 술꾼도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평소에 울음 우는 아이 곁에서 잘 견디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를 때마다 그 밉살스럽던 그녀가 은근히 고맙기까지 했었다. 

 

 

 

기차가 정차하기 훨씬 전부터 그녀가 어두운 기차의 흔들림 속에서 짐을 꾸리고 두꺼운 외투를 입은 채 얼굴, 몸 단장하는 것을 나는 윗 칸에서 누워 듣고 있었다. 그녀는 잠든 그 아이의 얼굴에 가만히 입맞춤하고 가방을 끌기 시작하였다. 그 순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말없이 그녀의 가방을 하나 끌고 그녀보다 먼저 객차의 출구 쪽으로 향하였다. 그리고 기차에 서서 저만치 가방들을 메고 끌고 하며 플렛트 홈을 걸어가는 그녀에게 손을 들어 작별인사를 보냈다.  

 

 

 

시베리아의 3월 초 새벽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잠깐 밖으로 나선 나의 몸속으로 독한 냉기가 스며들었으나 싸락눈을 간간히 뿌리는 하늘이나 숲의 풍경은 이 이방인 여행객에게 그렇게 차가운 존재가 아니었다.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차창으로 들어오는 그 숲과 평원의 풍경은 언젠가 장거리 버스로 달렸던 북미대륙이나 스페인의 메마르고 거대한 산악들과는 달리, 곁에 다가서면 언제나 그 품을 열어 맞이할 것 같은 그런 풍경이었다. 인간을 거부하는 거대함과는 다른 풍경이었다. 그  숲도 설경은 인간을 거부하는 거대한 권위적 존재가 아니라, 고통의 짐을 내려놓고 싶은 어머니의 품으로 낮고 가까이에 서 있는 듯 했다.   

 

 

 

지금 달리는 이곳 시베리아의 철길위로 내리는 눈은 그 깊은 냉기에도 정겨웠다. 차창 밖의 눈 내림은 내게는 한겨울 오두막의 정겨운 한 가닥 불빛이며 그 속에서 잠깨어 나누는 할머니와 나이어린 손자의 소곤거림이었다. 달리는 객차위의 내 마음은 순례자의 담담한 외로움 같은 것이었을 뿐 지난날 가슴 가득했던 열망이 가져다 준 눈시울 뜨거워짐이 아니었다. 달리는 차 안의 훈기 속에 승객들 대부분은 평화롭게 잠들어 있다. 객차 바닥의 그 도베르망 개는 자신의 주인인 어린 소년의 신발에 턱을 괴고 편안히 눈을 감고 있고, 객차 바깥 공간에서는 여 승무원이 한가히 담배를 즐긴다. 시베리아의 여명을 나는 그렇게 맞고 있다. 

 

 

 

전에 북미대륙을 혼자 나흘 밤과 낮 내내 달리는 그레이하운드 버스편으로 횡단한 적이었었다. 서부지역의 포틀란드에서  동남부 쪽으로 아득히 떨어져 있는 도시 아틀란타까지 였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동터 오르기 전의 뿌연 새벽을 달리는 버스의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멀리서 점점 다가오는 듯한 수평선 쪽의 하늘에는 새벽별들도 함께 달렸다.

 

 

 

 저 내밀한 소곤거림, 와, 아름답구나! 그 새벽 하늘에 푸르스름한 어둠속에 담긴 것은, 그러나 그 때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열망, 그리움 그리고 날카로운 회한의 별빛들이었다.  눈길을 달리는 객차의 바깥 냉기서린 출입구 칸에 나와 서서 소매로 차창을 닦은 뒤 시선을 밖으로 향한다. 여명의 어두컴컴함 속에서도 검은 숲들의 파노라마가 이어진다. 그 뒤를 이어 심안에 떠오르는 뚜르게네프의의 한 사냥꾼!

 

 

 

 

사냥꾼이 아니라면 새벽에 숲 속을 방랑하는 즐거움을 어찌 하겠는가. 발은 이슬에 젖어 하얗게 반짝이고 있는 풀밭에 녹색의 발자국을 남긴다. 젖은 관목을 헤치고 나아간다. 밤에는 거의 질식할 정도로 따듯한 향기가 가득 차 있다. 대기엔 상쾌한 쓴 쑥의 달콤 씁쓸한 향기, 메밀과 클로버의 달콤한 냄새가 배어있다. 멀리 떡갈나무 숲이 햇빛에 진홍빛의 발하며 벽처럼 솟아올라있다. .....시간이 무심히 흐른다.’   

 

 

 

아, 저 숲길을, 하얀 눈길을 걸어볼 수 있다면, 그렇지만 불현 듯 ‘...그만, 이 길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시베리아로 가던 도중 죽었던 불라드미르카야’라는 한 토막의 글귀와 그리고 임종직전의 한 농부와 의사의 대화 한 구절이 떠오르며 내 심안의 풍경을 뒤흔들어놓는다.   

 

 

 

‘어디 가느냐구요? 뻔하지 않습니까? 집이죠. 상태가 그렇게 좋지 않다니, 상황이 그렇다면 정리해야할 것이 많습니다.’‘하지만 정말 위독한 상태입니다, 바실리 드미트리 씨. 이곳에 오신 것조차 놀라울 정도입니다. 여기 계세요, 부탁입니다.’‘아닙니다, 선생님. 죽게 된다면 집에서 죽겠습니다. 여기서 죽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당황하실 겁니다. 집에 있어야지요.’ 

 

 

 

자작나무 숲이 보고 싶어, 그리고 바이칼 호수가의 바람소리가 듣고 싶어 나선 이 시베리아 여행길은, 그런 의미에서 오래 동안 바다를 동경하며 가슴벅차하던 지난날의 여행과는 다른 것이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막연하나마 숲이 나의 집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숲에서 자라 넓은 어깨와 수평으로 안정된 눈을 가진 소년이 먼 여행 후 노인이 되었을 때, 그가 태어난 그 숲으로 혼자 들어가 다시 숲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는 사랑하였다. 그리고 그 소년을 닮고 싶었던 나는 항상 막연하나마 은빛이 신비로운 저 자작나무 숲을 나의 집으로 선택할 수 있었으면 했었던 것이다.

 

 

 

시베리아 여행에서 내가 몰입한 것은 내닫는 기차 여행 그 자체였다. 나는 달리는 물체에 얹혀 함께 이동하는 것을 좋아한다. 오래전 우리나라의 동, 서해와 남해를 완행버스로 달리고 쉬고 한 것이 나의 긴 달리기 여행의 시작이었다. 그 후 미국에서  그레이하운드 버스 속에 앉아 자고 먹고 하며 4박 5일을 미 대륙을 횡단한 적도 있었다. 그런 신체적 적응력이 이번 시베리아 횡단 길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부채질했을 것이다. 

 

 

 

나의 모스코바-이르쿠츠크 왕복 여행은 열흘간을 지속적으로 내닫는 기차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귀착지, 이르쿠츠크에서는 단지 하룻밤만을 그 도시의 한 소박한 호텔에서 묶었을 뿐이었다. 그 하룻밤 동안 러시아 사우나로 굳은 몸을 풀기도 하고 내장에 가득 찬 단단한 변이 주는 극도의 불쾌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만약 그렇게 흔들리며 달리는 차체에 적응할 수 없는 체질이었다면 그 험한 여로를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이르쿠츠크를 이 여행의 귀착지로 정한 것은 바이칼 호수에 대한 나의 특별한 호기심에서였다. '네가 진심으로 기도의 참뜻을 알고 싶다면 가을날 바이칼 호수에 가라'는 충고를 가슴에 담고 나선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 나는 이 바이칼에 이르지 못 하였다. 그것은 원래 의도했던 시베리아 여행의 뜻을 그 절반도 이루지 못하였음을 의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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