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메모

200612 re Rembrandt & 폴 세잔

jhkmsn 2020. 6. 12. 07:19

Re Rembrandt.

In his landscape drawings of the 1650s, every dot and scribble contributes to an effect of space and light; problems which had baffled earlier landscape painter, for example, the difficulty of the middle distance , of getting into a picture smoothly from a low point of view , did not exist for him. The white paper between three strokes of the pen seems to be full of air.

And Rembrandt loved the facts of landscape: He had an appetite for the movement of rushes , the reflection of canals, the shadows on the mills, as voracious as that of Constable. Yet when he came to paint he felt that all these observations were no more than the raw material of art.For him, as for Rubens, landscape painting meant the creation of an imaginary world, vaster, more dramatic and more fraught with associations than that which we can perceive for ourselves. Looking at his drwaings and etchings we may regret this high ambition which has deprived us of masterpieces in our own mode of seeing. But Rembrandt's greatest landscapes, with their their solemn, legendary atmosphere , may in the end seem more satisfying than the transparent records of perception, however miraculous their precision and delicacy.

렘브란트가 예술가로서 한창 원숙기에 이르렀을 당시 그의 작품 속에서 그림자가 차지하고있는 부분이 점점 커가고 있었음을 밝혀야할 필요가 있을 수 있다. 마침내 모든 것을 사로잡아버리고 마는 그림자 부분을, 다만 거역할 수 없는 거역할 수 없는 격렬함ㅇ로 빛이 갑자기 튀어오르는 어느 한점 , 우리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잇는 초자연적인 것의 계시를 주었던 유일하면서도 같은 가치를 빛이 부여하는 어느 한점은 제외해야할 것이다. 그는 라인강변의 늪이 많은 곳에서 태어났다. 어린 아이었던 그가 자라면서 방앗간의 작은 천창을 통해서 바라다 보이는 늪의 정원이 바로 그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보였던 것이다. 렘브란트는 특히 노년에 접어들면서 애칭에 천착햇는데, 그 에칭속에서 그는 자신의 미학을 극단으로 몰고갔다. 황혼무렵에 아직도 많이 남아잇는 듯한 어슴푸레한 빛, 억제된 어떤 열정으로 내던져져있는, 점점이 끊어져 있는 듯한 묘선들이 그것이다. 이것은 마치 이제 막 공중을 향해 나아가는 화살과도 닮았다. 이것이 바로 추상적인 빛인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그 빛이 감각을 느끼는 외피가 없다고 여기고 있다.그 때 그 빛은 오히려 마티에르가 완벽하게 지배를 하고있음을 나타내게 있는데도 말이다.

위대한 예술가들이 실ㅊ천해보여주엇던 밝고 어두움의 대조와 이름없는 예술가들이 보여주었던 구역질나게 하는 혼합, 그리고 지난 세기말의 퇴폐적인 애매모호함, 이들 사이에는 공통적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지난 30년 동안 빛이라고 하는 것이 온갖 영역에서 얼마나 당당하게 승리를 누ㄹ왔던가를 새삼스럽게 내가 강조해야할 필요는 없다. //

 

Faul Cezanne.

프랑스의 화가. 사물의 본질적인 구조와 형상에 주목하여 자연의 모든 형태를 원기둥과 구, 원뿔로 해석한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했다. 추상에 가까운 기하학적 형태와 견고한 색채의 결합은 고전주의 회화와 당대의 발전된 미술 사이의 연결점을 제시했으며, 피카소와 브라크 같은 입체파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어

폴 세잔(Paul Cézanne)은 1839년 프랑스 남부의 엑상프로방스에서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화가가 되기를 꿈꿨으나 아버지의 강권에 못 이겨 1859년 엑스대학교의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화가가 되려는 그의 욕망은 꺾이지 않아 1861년 법률 공부를 그만두고 파리로 향했다. 그는 학창시절부터 절친하게 지냈던 에밀 졸라(Émile Zola)의 권유로 파리의 아카데미 쉬스에서 미술 공부를 했다. 여기에서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아르망 기요맹(Armand Guillaumin) 등을 만나 후에 인상파 화가들과 인연을 맺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의 초기 파리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미술 공부를 시작한 아카데미 쉬스의 몇몇 학생들만큼 기교가 뛰어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곧 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결국 6개월 만에 고향인 엑상프로방스로 돌아왔다.

세잔은 1862년 화가로서 성공할 것을 다짐하며 다시 파리로 갔다.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와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의 영향을 받은 그의 초기작은 대체로 어둡고 극적이며 거칠게 바른 물감을 특징으로 한다. 세잔은 살롱전에 출품을 준비하며 그림을 그렸지만, 매번 쓰디쓴 고배를 마셔야 했다. 1863년 살롱전에서 거절당한 화가들을 중심으로 ‘낙선전’이 열렸다. 그는 이 전시회에서 마네(Edouard Manet), 피사로, 앙리 팡탱 라투르(Henri Fantin-Latour) 등과 함께 작품을 전시했다. 20년 후인 1882년에 그의 작품은 처음으로 살롱전을 통과했다.

1870년대 들어서면서 그의 양식은 변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세잔은 마리 오르탕스 피케(Marie-Hortense Fiquet)와 사랑에 빠졌으며,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했다. 특히 피사로에게서 인상주의 기법 및 이론을 배우고 함께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렸다. 세잔은 스스로를 진정한 인상주의 화가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1874년 제1회 인상파 전시에 참여했다. 그는 인상파에서 주목했던 광선에 관심을 가졌으나, 빛과 명암의 표면적인 분석을 넘어 기본이 되는 형태를 탐구했다. 1877년 제3회 인상파 전시를 고비로 그는 점차 인상파를 벗어나는 경향을 보였고, 구도와 형상을 단순화한 거친 터치로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해 나갔다. 이때의 작풍이 더욱 발전하여 후에 야수파와 입체파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근대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동기가 되었다.

세잔은 1886년 졸라와의 오랜 우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것은 졸라의 소설 『작품』(1886) 때문인데, 세잔은 이 소설의 주인공인 ‘실패한 천재 화가’ 클로드 랑티에가 바로 자신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와 완전히 결별했다. 1895년에 세잔은 화상 볼라르(Ambroise Vollard)의 기획으로 첫 개인전을 열어 좀 더 많은 대중에게 이름을 알렸다. 말년에 그는 고향인 엑상프로방스에 돌아와서 작품에만 몰두했으며, 1900년경부터는 재능과 독특한 화풍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의 모든 형태는 원기둥과 구, 원뿔에서 비롯된다”는 견해를 밝힐 만큼 자연을 단순화된 기본적인 형체로 집약하고, 색채와 붓 터치로 입체감과 원근법을 나타내는 새로운 기법으로 회화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20세기 회화의 참다운 발견자로 칭송되고 있으며, 피카소를 중심으로 하는 입체파는 세잔 예술의 직접적인 전개라고 볼 수 있다. 작품을 구분하면 《목맨 사람의 집 The House of the Hanged Man at Auvers》(1872~1873)이 그의 전기 작품 중에 손꼽히는 걸작이며, 《에스타크 L'Estaque》(1883~1885),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The Card Players》(1892~1896) 등은 원숙기의 작품이고, 《대수욕도 Les Grandes Baigneuses》(1898~1905), 《생트 빅투아르산 Mont Sainte-Victoire》(1902~1904) 등이 대표적인 후기 작품이다. 또한 정물 그림과 초상화에도 많은 걸작을 남겼다. 세잔은 1906년 그의 고향에서 숨을 거뒀다. 1907년 개최된 대규모 회고전은 젊은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고, 세잔의 작품은 현대미술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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