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is high time you left
1. Goodbye
11. Emails from Manhattan
111. Guitarist of Chang Dong
1V. visions of Esmeralda
V. The Fife Player
V1. 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
1.
초가을 어느 흐린날 노인이 두 청년 동행자와 더불어 왼편으로 가까이 올려다 보이는 천주산 정상과 오른 편의 좀 낮은 산 봉오리 사이에 낙타 등의 두 봉 사이의 앉음 자리같은 오목한 모양의 재에 올라 맞은 편 산자락과 마주하며 앉는다. 그 재는 창원과 함안의 경계선으로 산정상에 오르는 등반객들이 쉬어가는 곳이다. 그 곳에서 두 젊은 이들은 다시 짐을 챙기며 노인에게로 시선을 보내고 노인은 앞쪽의 낮은 산등성이를 가리키며 말한다.
“김군, 저기가 내가 말한 거길세. 그렇지만 여기에 멈출 것이네.”
“예? 저기까지 가시지않고요?”.
“오늘은 그렇다네. ”.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날 기색이 없자, 한 청년은 가방에서 대금을 꺼내 손에 들고, 다른 청년은 앉은 채로 바닥에 내려놓은 장구를 앞으로 당기며 북채를 만지작거린다. 노인은 다시 말을 건넨다.
“ 저 산등성이에 낙옆송이 한 그루 눈에 들어오지. 주변의 어린 소나무들 사이의 저 나무 말일세, 저건 떡갈나무야. 키가 소나무들보다 좀 커 바람에 많이 시달리는 편이지.”
“예, 눈에 잘 띄는 군요. 바람 탓인지 큰 가지들이 여럿 찢겨져 있네요”
“떡갈나무는 좀 딱딱해서 바람에 약한가봐.”
“오늘은 비도 없고 해도 없으니 걷기에 참 좋던데요.”
“그래. 참 좋은 날을 선택한 것 같아.”
노인은 이어 그 나무 옆 군락을 이룬 관목들을 가리키며, “저건 진달랠세. 봄이면 꽃이 허드레지게 펴 주변의 마른 나무들 사이에 유난히 눈에 띄지.”
“저긴, 참 아늑하게 보이네요. 뒷 언덕이 나즈막하게 둘러쳐져있고.” 김군은 그렇게 말하고는 뒤이어, “저희들, 이제 준비할까요?”, 한다.
“그러세.” 하고는, “조금 기다려주게나. 내가 먼저 고할 말이 있으니.
“아, 예.”
“김군, 솔직히, 이 자리는 오늘 나의 고별의 의식을 위한 곳일세.” 라고 노인은 말을 잇는다
“예?”
“ 오늘로 여기 오름은 마지막이 될 거라는 의미지지. 처음엔 이 고별의 자리에 내가 아는 소리꾼을 한 분 모셔올까 했었다네. 그러다 대금연주로 마음을 바꾸었고, 이렇게 김군을 초청하게 되었지. 그래서 김군 아버지에게 전화로 부탁을 했었고..”
“선생님은 판소리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안향련의 소리를 이따금 들어요”
“그러셨군요”
노인은 다시 앞쪽을 가리키며, 말한다.
“실은, 저 곳 떡갈나무아래엔 봄이면 이름없는 산꽃으로 피어나고 겨울이면 적설아래 풀잎으로 눕는 스무살의 새댁이 잠들어 계신다네. 난 오늘 저 분에게 작별의 인사를 드리려한다네. 그래서 두 젊은 국악인을 이렇게 모신 것이라네. 더 이상 이곳에 오를 수도 없을 것이니 이렇게라도 해서 내 나름으로 마지막 인사를 드릴려고. 내 나이 이미 일흔 중반이고. 나 다음엔 글쎄......”.
그 말에 두 청년은 조금은 숙연한 표정으로 노인의 눈길을 따라 그곳을 바라본다. 노인은 그대로 말을 잇는다.
“내가 저기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십대 소년이었을 무렵이었다네. 아마 추석 성묘 때였을 것이네. 아버지와 삼촌 들 따라 왔었는데. 그리고 이어 해마다 추석때면 어른들 틈에 이끌려오다시피 했었네. 그땐 얼마나 멀고 아득하던지. 그렇게 시작된 일이 중년이레 이제는 나의 의무가 된 셈이지. 그리고 오늘 저기와 알맞게 거리를 둔 건 그런 사정이 있어서일세. 저 떡갈나무 근처 전달래밭 가에 나의 부모님 두 분과 그리고 할아버지께서도 계시거든. 세 분을 모셔와 내 손으로 저기에 뿌렸어요. 이제 저기서 흙이 되고 바람이 되셨을테고...... 이제 내가 먼저 고하겠네”
“저희들은요?
”내가 고하는 동안 두 분은 우선은 그냥 편하게 앉아 있기만 하면 되네”, 하고는 노인은 저쪽을 향해 혼자 독백을 시작한다:
아버지, 소자가 오늘 할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올라왔습니다.
이제는 이곳에 더는 오를 수 없을 것 같기에 이렇게나마 이별을 고하고저 합니다.
여기엔 이제 할아버지도 와 있고, 저 분의 한 점 혈육인 아드님과 며느님도
이곳으로 모셔져 이 양지 바른 땅의 흙과 공기가 되셨으니……
오늘은 특별히 대금산조 한 곡조로 이 소자의 할머니께 이별의 예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 오른쪽의 다른 한 분의 할머니에게도 이별을 고합니다.
아버지를 키우시고 자식 여럿을 낳으셨던 또 한분의 할머니십니다.
그래도 아버지를 낳으신 저 할머니는 너무 애닯습니다.
세상에, 스무살의 나이로 젖먹이 아기를 남긴 채 돌아가시다니요.
스무살의 할머니가 천지에 또 있습니까.
그래서 이렇게라도 해야겠기에…..”
노인은 한 동안의 침묵 후 두 연주자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자, 이제 시작함세” 라고한다.
이어 한명은 음료수로 목을 축이고, 다른 이는 장구를 앞으로 더 당기며 채를 잡는다. 느린 진양조를 시작으로 산고개의 적적함을 흔들어 깨우는 대금 선율이 건너 쪽에 시선이 닿아있는 노인의 내면으로 파고들고. 장구채는 이를 뒤따르며 그 흐름에 완급을 준다. 취구를 벗어난 대소리는
운율과 장단 아래 자유분방하게 흩어지다 모이고, 떠는 음은 떠는 음대로, 밋밋한 음은 밋밋한 대로 서로 밀고 당기며 산고개 너무 오솔길 따라 넓게 번져나간다. 소리 따라 노인의 상념도 안으로 안으로 향해 피어오른다.
고개에 올라서기만 하면
저 떡갈나무가 눈에 들어오니,
저기가 진달래꽃밭이니,
스무살의 할머니를 여지껏 잃지않고
잘도 찾아 왔었군.
같은 한 분이
소년에게는 막연히 할머니더니
노인에게는 스무살의 새댁이라.
소년은 세월에 얹혀 노인으로 변하고,
할머니는 거기 그대로인데 새댁이 되고.
여긴 시간이 뒤죽박죽인가
살아있는 자를 등떠미는 시간이
여기 풀잎 앞에선 걸음을 멈추는가,
아니, 제자리에서 끊임없이 맴돌기만하는가?
봄의 이름없는 산꽃
겨울의 메마른 풀잎
스무살의 할머니.
할머니, 오늘로 이렇게 하직을 고합니다.
언젠가 여기서, 어머니의 얼굴이라도 기억할 수 있다면
하시며 흐느끼시던 아버지께서,
그리고 이 손자를 이렇게 오늘에 이르도록
평생을 뒷받침해주신 어머니도
이제 이곳으로 곁에 계시니
이 손자, 그나마 가슴 아픔이 좀 덜합니다.
혹시라도 운 좋으면,
언젠가 나도 한 줌 재로 뿌려져
저기 떡갈나무 아래 어딘가에
스며들게 되려나.
자진모리로 들어서는 소리와 더불어 그의 상념도 출렁인다. 선율장단이 저 아래 달천계곡에서부터 이곳으로 이어지는 산길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그 길은 위로 굽이지며 끝없이 이어진다. 키 큰 밤나무가 그늘을 내리고 잘 정돈된 가파른 길이 나타나는가 하면, 길가로 가늘게 가느다랗게 피어있는 이름없는 들풀들이 머리 마다 분홍빛과 노란 색의 꽃들을 머리에 이고 줄지어 선 완만한 경사길이 그 뒤를 잇기도 한다. 얼마후 길 바닥에 배를 깔고 앞드려 따스한 가을 햇살을 즐기는 독사 한 마리가 놀라 허급지급 길가 잡풀속으로 몸을 숨기는 곡선 길이 나오는 가 하면 , 진로가 갑자기 진행 방향과는 거의 반대쪽으로 꺽이며 흔란 감을 불러 주는 길이 나타나기도 한다. 회상으로 떠오른 지난 날의 그의 산행이다.
이윽고 대금의 선율이 잦아들고 노인은 불현듯 어느 책에서 읽은 ‘시간의 무질서’에 관한 한토막 이야기를 떠올린다. 설경을 무대로 30대의 젊은이의 주검을 70대의 노인들이 애도하는 장면의 묘사이다. 산행중 크레바스속으로 사라진 후 계곡의 빙하속에 보존되어 오다 빙하의 이동으로 어느 날 산 아래에서 지난 날의 모습 그대로 완벽하게 보존된 채 발견되었던 어느 네팔인 세르파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렇게 시간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일이 일어나는 어느 산악지대에서처럼 이 곳 산 고개에 앉은 노인의 마음에도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시간의 절서가 뒤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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